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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煬帝의 제2차 고리 침략 2 /小寒節仲候鵲始巢(까치 집 짓기)地山謙山茶(冬柏)風初日(陰11/27)戊午

solpee 2021. 1. 8. 10:01

紀6  大業 9》 (癸酉,613)

 

 

 ⑬상략...............

 황제가 고리를 정벌하면서 양현감에게 명령하여 여양에서 운반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드디어 호분랑장 왕중백과 급군 사람인 찬치贊治:군의 태수 아래에서 업무담당관)조회의 등과 더불어 모의하고, 고의로 조운을 지연시키고 때맞추어 출발하지 않게 하여 요하를 건너간 여러 부대로 하여금 식량이 결핍하게 하려고 하였더니, 황제가 사자를 파견하여 그것을 재촉하자 양현감은 겉으로는 수로에 많은 도적이 있어서 앞뒤로 출발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

 ⑬....帝伐高麗,命玄感於黎陽督運,遂與虎賁郎將王仲伯、汲郡贊治趙懷義等謀,〈按《隋志》,帝改州爲郡,郡置太守;罷長史、司馬,置贊務一人以貳之。贙務,卽贊治也。《隋書》成於唐臣,避高宗名,故改「治」爲「務」。治,直吏翻。〉故逗遛漕運,不時進發,〈逗,音豆。遛,音留。〉欲令渡遼諸軍乏食;帝遣使者促之,〈令,力丁翻。使,疏吏翻。〉玄感揚言水路多盜,不可前後而發。

 

 양현감의 동생인 호분랑장 양현종과 응양장군부낭장 양만석이 함께  좇아서 요동으로 갔는데, 양현감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부르니 두 사람이 모두 도망하여 돌아왔다,

 양만석은 고양에 도착하여 감사 허화에게 붙잡히게 되어 탁군에서 목이 베어졌다.

 玄感弟虎賁郎將玄縱、鷹揚郎將萬石,並從幸遼東,玄感潛遣人召之,二人皆亡還。萬石至高陽,〈高陽縣屬河間郡。〉爲監事許華所執,〈按《唐六典》,武庫署、太倉署皆有監事,蓋因隋制也。監,工銜翻。〉斬於涿郡。

 

 당시 우교위대장군 내호아는 舟師(수군)를 거느리고 동래에서 장차 바다로 들어가서 평양(今 遼陽)으로 가려고 하는데, 양현감이 그 집의 노복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사자로 동방에서 온 것으로 하고 내호아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게 하였다. 6월 3일에 양현감이 여양(浚縣) 진입하여서는 성문을 닫고, 대대적으로 남자 장정을 색출하고 帆布(범포:돛 용 천)를 가져다가 투구와 갑옷을 만들고 관속들을 임명하니, 모두 개황 시절에 있었던 옛 제도를 표준으로 하였다. 편지를 주변에 있는 군에 보내고서 내호아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각기 군사를 징발하여 창소(黎陽倉:浚縣)에 모이게 하였다.

 .....................중략..............................

 時右驍衞大將軍來護兒以舟師自東萊將入海趣平壤,玄感遣家奴僞爲使者從東方來,詐稱護兒反。〈驍,堅堯翻。〉六月,乙巳,玄感入黎陽,閉城,大索男夫,〈索,山客翻。〉取帆布爲牟、甲,〈帆,施於船上以汎風,時軍興織蒲不給,以布爲之。牟,兜牟也。〉署官屬,皆準開皇之舊。〈不用帝所改官制。〉移書傍郡,以討護兒爲名,各令發兵會於倉所。〈倉,謂黎陽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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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보다 먼저 양현감은 몰래 가동을 파견하여 장안에 도착하게 하여서 이밀과 동생인 양현정을 불러 여양에 이르게 하였다. 군사를 일으키게 되자 이밀이 적시에 도착하니, 양현감은 크게 기뻐하며 모주로 삼고서, 이밀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항상 무리들을 구제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요. 계책을 장차 어떻게 내겠소?"

 先是玄感陰遣家僮至長安,〈先,悉薦翻。〉召李密及弟玄挺赴黎陽。及舉兵,密適至,玄感大喜,以爲謀主,謂密曰︰「子常以濟物爲己任,今其時矣!計將安出?」

 

 이밀이 말하였다.

 "천자가 출정하여 멀리 요하(今 永定河)에 있고, 幽州에서도 오히려 1천 리나 떨어져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큰 바다가 있고 북쪽으로는 강한 호족이 있는데, 중간에 있는 한 개의 길로는 이치상으로 극도로 어렵고 위험합니다. 공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그가 생각지도 못하는 곳에서 출동하여 멀리까지 말을 몰아 계로 들어가서 임투의 험준함을 점거하고 그의 목구멍을 조이십시오. 귀환하는 길이 이미 단절되었으니 고리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반드시 그의 후방을 뒤좇을 것인데, 순월이 지나지 않아서 물자와 양식이 모두 떨어져서 그의 무리는 항복하지 않으면 궤멸될 것이니 싸우지도 않고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상책입니다."

 密曰︰「天子出征,遠在遼外,去幽州猶隔千里。南有巨海,北有強胡,中間一道,理極艱危。公擁兵出其不意,長驅入薊,據臨渝之險,〈臨渝關,隋屬平州盧龍縣,卽所謂盧龍之險也。顏師古曰︰渝,音喻,今多讀如榆。〉扼其咽喉。〈咽,於賢翻。〉歸路旣絕,高麗聞之,必躡其後,不過旬月,資糧皆盡,其衆不降則潰,可不戰而擒,此上計也。」〈麗,力知翻。降,戶江翻。〉

 

 양현감이 말하였다.

 "다음 그 다음 계책을 말해보시오."

 이밀이 말하였다

 "관중은 사방이 막혀서 천부가 있는 나라인데, 위문승이 있다고 하나 염두에 둘 거리가 안됩니다. 지금 무리를 인솔하고 북을 치며 행군하여 서쪽으로 가서 성을 지나가면서 공격하지 말고 직접 장안을 탈취하고 그곳의 호걸들을 수용하여 그들의 관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험한 곳을 점거하여 그곳을 지키십시오. 천자가 비록 돌아온다 해도 그 근본을 잃었으니 서서히 도모할 수 있습니다.

 玄感曰︰「更言其次。」密曰︰「關中四塞,天府之國,雖有衞文昇,不足爲意。今帥衆鼓行而西,〈帥,讀曰率;下同。〉經城勿攻,直取長安,收其豪傑,撫其士民,據險而守之。天子雖還,失其根本,可徐圖也。」

 

 양현감이 말하였다.

 "다시 그 다음 계책을 말해보시오."

 이밀이 말하였다.

 "정예의 군사를 선발하여 밤낮 배나 빠른 속도로 길을 가서 동도를 습격하여 탈취하고 사방을 호령하는 것입니다. 다만 당의가 그것을 밀고하였으니 먼저 이미 굳게 지키고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공격하여 100일이 되어도 승리하지 못하면 천하의 군사들이 사방에서 도착할 것이니, 저 같은 노복이 알 바가 아닙니다."

 玄感曰:「更言其次。」密曰:「簡精銳,晝夜倍道,襲取東都,以號令四方。但恐唐禕告之,先已固守。〈禕,許韋翻。〉若引兵攻之,百日不克,天下之兵四面而至,非僕所知也。」

 

 그렇지 않으니, 지금 백관들의 가족들이 모두 동도에 있어서 만약 먼저 그곳을 탈취하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오. 또 성을 지나가면서 점령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엄을 보일 수 있겠소? 공이 세운 하책이 바로 상책이오."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낙양(동도)으로 향하고, 양현정을 파견하여 용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먼저 하내를 탈취하게 하였다. 당의가 성을 점거하고 방어하며 지키고 있어서 양현정이 잡을 수 없었다.

 玄感曰︰「不然,今百官家口並在東都,若先取之,足以動其心。且經城不拔,何以示威!〈其後玄感攻弘農,自速敗亡,其識度已見於此。〉公之下計,乃上策也。」遂引兵向洛陽,遣楊玄挺將驍勇千人爲前鋒,〈將,卽亮翻;下同。驍,堅堯翻。〉先取河內。唐禕據城拒守,玄挺無所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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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동성이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포로 만든 자루 1백만여 개를 제조하여 흙을 채워서 쌓고 쌓아서 어량대도(고가도)로 만드는데, 넓이는 30보이고 높이는 성과 더불어 가지런하게 하여 전사들로 하여금 올라가서 그들을 공격하게 하려하고, 또 팔륜누차(바퀴 여덟개 누각차)를 만들었는데 높이를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내려다보며 성안에 화살을 쏘고자 하며, 기일을 지정하고 장차 공격을 하려고 하니, 성 안은 위급하고 궁지에 빠져있었다.

 遼東城久不拔,帝遣造布囊百餘萬口,滿貯土,〈貯,丁呂翻。〉欲積爲魚梁大道,〈築道若魚梁然。〉闊三十步,高與城齊,使戰士登而攻之,又作八輪樓車,〈樓車下施八輪。〉高出於城,夾魚梁道,欲俯射城內,〈射,而亦翻。〉指期將攻,城內危蹙。

 

 마침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편지가 도착하자 황제는 크게 두려워하여 납언 소위를 이끌고 장막 속으로 들어가서 말하였다.

 "이 아이는 총명한데 걱정거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소위가 말하였다.

 "무릇 옳고 그름을 알고 성패를 살피는데 마침내 그것을 총명하다고 부릅니다. 양현감은 소략하니 반드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로 인하여 점차 혼란이 이루어지는 단계가 될까 두렵습니다."

 황제가 또한 달관의 자제들이 모두 양현감의 처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그것을 우려하였다.

 會楊玄感反書至,帝大懼,引納言蘇威入帳中,謂曰︰「此兒聰明,得無爲患?」威曰︰「夫識是非,審成敗,乃謂之聰明,〈夫,音扶。〉玄感粗疏,必無所慮。但恐因此寖成亂階耳。」帝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益憂之。

 

 병부시랑 곡사정이 평소에 양현감과 더불어 잘 지냈는데,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곡사정은 그와 더불어 왕래하기를 모의하고 양현종 형제가 도망하여 돌아오니 곡사정은 몰래 그들을 보냈다. 황제가 장차 양현종 등의 무리를 끝까지 처리하려고 하자 곡사정은 마음속으로 스스로 불안해 하다가 26일에 고리로 도망하였다.

 兵部侍郎斛斯政素與玄感善,玄感之反,政與之通謀,玄縱兄弟亡歸,政潛遣之。帝將窮治玄縱等黨與,〈治,直之翻。〉政內不自安,戊辰,亡奔高麗。〈史言段文振之言驗。麗,力知翻。〉

 

 28일 밤 2경에 황제가 비밀리에 제장을 소집하여 군사를 이끌고 귀환하게 하니, 군사물자·기계·공격용 도구가 쌓인 것이 마치 언덕이나 산과 같았으며, 군영의 보루와 장막은 고정되어 있어서 움직여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모두 버리고 물러났다.

 庚午,夜二更,〈二更,乙夜也。甲、乙、丙、丁、戊分爲五夜,守卒分番守漏,鳴鼓以相警,謂之持更。更,工衡翻。〉帝密召諸將,使引軍還,〈還,從宣翻,又音如字。〉軍資、器械、攻具,積如丘山,營壘、帳幕,按堵不動,皆棄之而去。

 

 무리들의 마음은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다시 부대별로 구분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길로 분산되었다. 고리가 즉시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러나 감히 나오지 못하고 다만 성 안에서 북을 치며 시끄럽게 할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가 되어 바야흐로 조금씩 밖으로 나와서 사방 멀리까지 정찰하였으나 오히려 수군이 속이는 것이라고 의심(곡사정의 귀순으로 이미 수군 정보를 알았을 터 소위 통감필법이다)하였다. 이틀이 지나자 마침내 수천의 군사를 내보내어 뒤쫓아 밟았지만 수군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항상 서로 8,90리 정도 떨어졌으며, 장차 요수(영정하)에 도착하려고 하자 어영이 강을 이미 건넜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과감히 후군을 압박하였다. 당시 후군에는 여전히 수만 명이 있었는데, 고리군이 추격하여 노략질하며 공격하자 맨 뒤에 있던 파리하고 약한 수군 수천 명이 죽거나 약탈당하였다.(이미 무너진 수군이 엉망진창 뒤죽박죽 철군하였다고 가정하면 전사및 포로가 수십만이 넘었을 것. 사마광의 날조된 통감필법이다.)

 衆心恟懼,〈恟,許拱翻。〉無復部分,諸道分散。〈復,扶又翻。部分,扶問翻。〉高麗卽時覺之,然不敢出,但於城內鼓譟。至來日午時,方漸出外,四遠覘偵,〈覘,丑廉翻,又丑塹翻。偵,丑鄭翻。〉猶疑隋軍詐之。經二日,乃出數千兵追躡,畏隋兵之衆,不敢逼,常相去八九十里;將至遼水,知御營畢渡,乃敢逼後軍。時後軍猶數萬人,高麗隨而抄擊,最後羸弱數千人爲所殺略。〈麗,力知翻。抄,楚交翻。羸,倫爲翻。〉

 

 애초에, 황제가 두 번째로 고리 정벌을 하면서 다시 태사령 유질에게 물었다.

 "지금의 단계는 어떠한가?"

 대답하였다.

 "신은 실제로 어리석고 미혹하여서 오히려 앞에 있었던 견해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만승을 움직이신다면 수고로움과 비용은 실제로 많이 들 것입니다."

 황제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내가 스스로 갔어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 다만 다른 사람을 파견하여 가게 한다면 어찌 성공할 수 있겠는가?"

 初,帝再征高麗,復問太史令庾質曰︰「今段何如?」〈今段,言自今以後一段事也。復,扶又翻。〉對曰︰「臣實愚迷,猶執前見,〈庾質前對,見上卷八年。〉陛下若親動萬乘,勞費實多。」〈乘,繩證翻。〉帝怒曰︰「我自行猶不克,直遣人去,安得有功!」

 

 귀환하게 되자 유질에게 말하였다.

 "경이 전에 내가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마땅히 이것 때문이었소? 양현감 그는 성공할 수 있겠는가?"

 유질이 말하였다.

 "양현감의 지위와 세력이 비록 높다고는 하나 평소 인망이 없는데다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을 이용하여 요행으로 성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천하는 한 집안이 되었으니 쉽게 동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及還,謂質曰︰「卿前不欲我行,當爲此耳。〈還,從宣翻,又音如字。爲,于僞翻。〉玄感其有成乎?」質曰︰「玄感地勢雖隆,素非人望,因百姓之勞,冀幸成功。今天下一家,未易可動。」〈易,以豉翻。

.....중략..........

 

 황제는 원홍사가 곡사정의 친척이어서 홍화군에 머물며 지키게 하였는데, 위위소경 이연을 파견하여 말을 달려가서 그를 붙잡게 하고 이어서 대신 남아서 지키게 하니, 관우(함곡관 서쪽)늬 13개 군의 군사들이 모두 징발 명령을 받았다. 이연이 무리들을 통솔하는 것은 관대하고도 간소하여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귀부하였다.

 帝以元弘嗣,斛斯政之親也,留守弘化郡,《隋書‧元弘嗣傳》云︰屯兵安定。遣衞尉少卿李淵馳往執之,少,始照翻。因代爲留守,關右十三郡兵皆受徵發。十三郡,天水、隴西、金城、枹罕、臨洮、漢陽、靈武、朔方、平涼、弘化、延安、雕陰、上郡也。御衆寬簡,人多附之。

 

 황제는 이연의 관상과 겉모양이 기이하고 이름도 도참에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에 그를 시기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서 징소하여 행재소에 오게 하였으나 이연이 병을 만나 알현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생질 왕씨가 후궁에 있어서, 황제가 물었다.

 "너의 외삼촌은 어찌하여 늦는 것이냐?"

 왕씨가 병 때문이라고 대답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죽을 것 같으냐? 살 것 같으냐?"

 이연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술을 멋대로 마시며 뇌물을 받으면서 스스로를 위장(대원군 처럼 파락호 생활로 위장함)하였다

 帝以淵相表奇異相,息亮翻。又名應圖讖,忌之。讚,楚譖翻。未幾,徵詣行在所,淵遇疾未謁,謁,見也。幾,居豈翻。其甥王氏在後宮,帝問曰︰「汝舅來何遲?」王氏以疾對,帝曰︰「可得死否?」淵聞之,懼,因縱酒納賂以自晦。李淵事始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