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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煬帝의 제1차 고리 침략 3 /小寒節初候雁北鄕水雷屯梅花風4日(陰11/25)丙辰

solpee 2021. 1. 7. 15:14

紀5  大業 8》 (壬申, 612)

 

 

 ⑨. 5월, 제장들이 동정하는데, 황제가 친히 그들을 경계하여 말하였다.

 "지금 백성들은 조문하고 죄지은 자를 토벌하려는 것이지 공명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오. 제장들이 혹 짐의 뜻을 알지 못하여 경무장하여 갑자기 엄습하거나 고군으로 홀로 싸워서 일신의 명예를 세우고 훈상을 기다리는 것은 대군이 가는 법이 아니오. 공 등은 진군하되 당연히 세 길로 나누며 공격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세 길에서 서로 알게 하고 경무장한 군사로 독단적으로 진격하여 실패하여 죽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또 무릇 군대가 전진하고 머무르게 되면 모두 반드시 보고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회보를 기다려야 하지 오로지 멋대로 해서는 안 되오."

 요동성에서는 자주 나와서 전투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마침내 농성하며 굳게 지켰고, 황제는 여러 군영에 명령하여 그곳을 공격하게 하였다.

 ⑨. 諸將之東下也,帝親戒之曰︰「今者弔民伐罪,非爲功名。諸將或不識朕意,欲輕兵掩襲,孤軍獨鬬,立一身之名以邀勳賞,非大軍行法。〈言非大軍征行之法。將,卽亮翻。〉公等進軍,當分三道,有所攻擊,必三道相知,毋得輕軍獨進,以致失亡。又,凡軍事進止,皆須奏聞待報,毋得專擅。」遼東數出戰不利,〈數,所角翻。〉乃嬰城固守,帝命諸軍攻之。

 

 또 제장들에게 칙령을 내려서 고리가 만약 항복하면 즉시 의당 위무하여 받아들일 것이며, 마음대로 군사를 풀어놓을 수 없다고 하였다.요동성이 곧 함락되려 하자 성 안에 잇는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을 받아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제장들은 성지를 받들어서 감히 기회에 따라서 부응하지 않고 먼저 달려와서 아뢰고 보고가 도착하도록 하니, 회보가 도착할 때쯤에는 성안에서 지키고 방어하는 것 또한 갖추어졌고 수시로 나와서 막으며 싸웠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세 번하였는데도 황제는 끝내 깨닫지를 못하였다. 이미 그렇게 하고 나니 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又敕諸將,高麗若降,卽宜撫納,不得縱兵。遼東城將陷,城中人輒言請降;〈降,戶江翻。〉諸將奉旨不敢赴機,先令馳奏,比報至,〈比,必寐翻。〉城中守禦亦備,隨出拒戰。如此再三,帝終不寤。旣而城久不下,

 

 6월 11일에 황제가 요동성 남쪽에 행차하여 그 성지의 형세를 관망하고서 이어서 제장들을 소집하여 그들을 힐책하여 말하였다.

 "공 등은 스스로 관직이 높고 또한 가세를 믿고서 어둡고 나약함을 가지고 나를 기다릴려고 하였소? 도성 안에 있을 떄 공 등이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은 병폐와 실패함을 보일까 두려워하였을 뿐이었소. 내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공 등이 하는 것을 보고 공들의 목을 베려고 할 뿐이오. 공들은 지금 죽는것이 두려워서 힘을 다하지 않으면서, 내가 고들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제장들이 모두 두려워 떨면서 안색이 변하였다. 황제는 이어서 성의 서쪽 몇 리 지점에 머무르면서 육합성에 나아갔다. 고리의 여러 성에서 각기 견고하게 지켜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六月,己未,帝幸遼東城南,觀其城池形勢,因召諸將詰責之曰︰「公等自以官高,又恃家世,欲以暗懦待我邪!〈詰,去吉翻。懦,乃臥翻,又乃亂翻。邪,音耶;下同。〉在都之日,公等皆不願我來,恐見病敗耳。我今來此,正欲觀公等所爲,斬公輩耳!公今畏死,莫肯盡力,謂我不能殺公邪!」諸將咸戰懼失色。帝因留城西數里,御六合城。〈此六合城略如三年行城之制,周回八里,城及女垣高十仞。〉高麗諸城各堅守不下。

 

 우익위대장군 내호아는 강과 회의 수군을 인솔하였는데, 축로가 수백 리였으며 바다에 떠서 먼저 전진하여 패수에 들어가니 평양까지 60리 였는데, 고리와 서로 만나서 나아가서 공격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내호아는 이긴 기세를 타고 그 성으로 나아가려고 하였으나 부총관 주법상이 그것을 중지시키고 여러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진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내호아는 듣지 않고 정예의 갑병 4만을 선발하여 곧장 성 아래까지 도달하였다. 

 右翊衞大將軍來護兒帥江、淮水軍,舳艫數百里,浮海先進,入自浿水,〈班《志》︰浿水西至增地縣入海,皆在樂浪界。帥,讀曰率。舳艫,音逐盧。浿,普大翻。〉去平壤六十里,與高麗相遇,進擊,大破之。護兒欲乘勝趣其城,〈趣,七喻翻。〉副總管周法尚止之,請俟諸軍至俱進。護兒不聽,簡精甲四萬,直造城下。〈造,七到翻。〉

 

고리는 라곽 안에 있는 빈 사찰 속에 군사를 매복시켜놓고 군사를 내보내어 내호아와 더불어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배하니, 내호아가 그들을 추격하여 성으로 들어가서 군사들에게 마음대로 약탈하게 하자 다시는 대오가 없게 되었다. 복병이 일어나자 내호아는 대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사졸들 가운데 돌아온 사람들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고리군이 추격하여 선박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주법상이 진영을 정돈하고 그들을 기다리자, 고리는 마침내 퇴각하였다. 내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서 해포에 주둔하니 감히 다시는 남아서 여러 부대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高麗伏兵於羅郭內空寺中,出兵與護兒戰而僞敗,護兒逐之入城,縱兵俘掠,無復部伍。伏兵發,護兒大敗,僅而獲免,士卒還者不過數千人。高麗追至船所,周法尚整陳待之,高麗乃退。護兒引兵還屯海浦,不敢復留應接諸軍。〈陳,讀曰陣。復,扶又翻。《考異》曰︰《北史》云︰「護破高麗,斬高元弟建武,因破其郛,營於城外,以待諸軍。」今從《隋書》及《革命記》。〉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출발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출발하고, 우익위장군 설세웅은 옥저도로 출발하고, 좌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로 출발하고,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도로 출발하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출발하고, 탁군 태수인 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로 출발하고, 검교우어위호본랑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출발(출발선은 모두 망도 창주선이다)하는데, 모두 압록수 서쪽에 모이게 하였다.

 左翊衞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右翊衞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隋制︰十二衞各置大將軍一人,來護兒、于仲文並書右翊衞大將軍,何也?考二人《本傳》,于仲文,帝卽位之初爲右翊衞大將軍,征吐渾時,來護兒已爲右翊衞大將軍,《通鑑》蓋追書仲文官也。〉左驍衞大將軍荊元恆出遼東道,〈驍,堅堯翻。恆,戶登翻。〉右翊衞將軍薛世雄出沃沮道,左屯衞將軍辛世雄出玄菟道,〈沮,子余翻。菟,音塗。〉右禦衞將軍張瑾出襄平道,右武候將軍趙孝才出碣石道,涿郡太守檢校左武衞將軍崔弘昇出遂城道,檢校右禦衞虎賁郎將衞文昇出增地道,〈守,式又翻。將,卽亮翻。〉皆會於鴨綠水西。〈班《志》︰玄菟郡西蓋馬縣有馬訾水。《新唐書》︰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綠水。平壤城在鴨綠東南。金人謂鴨綠水爲混同江。杜佑曰︰鴨淥水闊三百步,在平壤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

 

 우문술 등의 군사들은 노화와회원 두 진에서부터 사람과 군마에게 모두 100일 분의 양식을 지급하고, 또한 배갑과 창삭을 지급하고 아울러 옷감과 전투도구와 불과 장막을 지급하였는데, 사람마다 3석 이상이 되니, 무게를 이길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렸다.

 "사졸들 가운데 미속을 버리는 사람이 있으면 목을 벨 것이다."

 군사들이 모두 장막 아래에 땅을 파고 그것을 묻고서야 겨우 떠났더니 중간 지점에 이르자 양식이 이미 다 떨어지려고 하였다.

 述等兵自瀘河、懷遠二鎭,人馬皆給百日糧,又給排甲、槍矟〈矟,色角翻。〉幷衣資、戎具、火幕,人別三石已上,重莫能勝致。〈勝,音升。〉下令軍中︰「士卒有〈【章︰十二行本無上三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遺棄米粟者斬!」軍士皆於幕下掘坑埋之,纔行及中路,糧已將盡。

 

 고리는 대신 을지문덕을 파견하여 그 군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제로는 허실을 보려고 하였다. 우중문이 먼저 밀지를 받들었다.

 "만약 고원과 을지문덕이 오는 것을 만나면 반드시 그들을 생포하라."

 우중문이 곧 그를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상서우승 유사룡이 위무사였는데 그것을 굳게 중지시켰다. 우중문이 드디어 을지문덕이 돌아가겠다는 것을 들어주었는데, 이미 그리하고 나서 그것을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어 을지문덕을 속여서 말하였다.

 "다시 하고자 할 말이 잇으니 다시 오시오."

 을지문덕ㄴ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를 건너 가버렸다.

 高麗遣大臣乙支文德詣其營詐降,〈乙支,東夷複姓。支,力知翻。降,戶江翻;下同。《考異》曰︰《革命記》作「尉支文德」,今從《隋書》及《北史》。〉實欲觀虛實。于仲文先奉密旨︰「若遇高元及文德來者,必擒之。」仲文將執之,尚書右丞劉士龍爲慰撫使,〈使,疏吏翻;下同。〉固止之。仲文遂聽文德還,〈還,從宣翻。〉旣而悔之,遣人紿文德曰︰「更欲有言,可復來。」〈紿,待亥翻。復,扶又翻。〉文德不顧,濟鴨綠水而去。

 

 우중문은 우문술과 더불어 이미 을지문덕을 놓치고 나서 속으로 스스로 불안하엿고, 우문술은 양식이 다 떨어지자 돌아오려고 하였다. 우중문이 정예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공로를 세울 수 있다고 논의하였으나 우문술이 굳게 저지하니, 우중문이 화를 내며 말하였다.

 "장군께서 1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도 작은 적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무슨 얼굴로 황제를 알현할 수 있겠소! 또한 나 우중문이 이번의 출행에서 진실로 아무런 공로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았는데 왜 그러하오? 옛날에 훌륭한 장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중의 일이 한 사람에게서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사람들이 각기 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당시 황제는 우중문이 가지고 있는 계획을 가지고 여러 부대로 하여금 통제를 받도록 하였던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仲文與述等旣失文德,內不自安,述以糧盡,欲還。仲文議以精銳追文德,可以有功,述固止,仲文怒曰︰「將軍仗十萬之衆,不能破小賊,何顏以見帝!且仲文此行,固知無功,何則?古之良將能成功者,軍中之事,決在一人,〈將,卽亮翻;下同。〉今人各有心,何以勝敵!」時帝以仲文有計畫,令諸軍諮稟節度,故有此言。

 

 이 일로 맒;암아 우문술 등은 마지못해 하며 그를 좇으며 제장들과 더불어 강은 건너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문덕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 그들을 피곤하게 하려고 매번 싸우면서 번번이 도주하였다. 우문술은 하루 중에 일곱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므로 이미 신속히 승리할 것을 믿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압박을 받아서 이에 드디어 전진하여 동쪽으로 살수를 건너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졌는데, 산을 이용하여 진지를 만들었다.

 由是述等不得已而從之,與諸將渡水追文德。文德見述軍士有飢色,故欲疲之,每戰輒走。述一日之中,七戰皆捷,旣恃驟勝,又逼羣議,於是遂進,東濟薩水,〈薩,桑葛翻。〉去平壤城三十里,因山爲營。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한다 하고 우문술에게 요청하였다.

 "만약 군사를 되돌려 가신다면 마땅히 고원을 받들고 행재소에 가서 조현하게 하겠습니다."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곤하고 지쳐서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고, 또한 평양성은 험준하고 견고하여 창졸간에 점령하기가 어렵다고 헤아리고서 드디어 그 거짓말로 인하여 돌아왔다. 우문술 등이 방진을 이루며 행군하는데 고리군이 사면에서 노략질하며 공격하니, 우문술 등은 싸우다가 가다가 하면서 갔다.

 文德復遣使詐降,〈復,扶又翻。〉 請於述曰:「若旋師者,當奉高元朝行在所。」〈朝,直遙翻。〉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復,扶又翻。〉又平壤城險固,度難猝拔,〈度,徒洛翻。〉遂因其詐而還。〈使來護兒之師不敗而先退,則營於平壤城外,與宇文述諸軍猶聲援相接,不致有薩水之狼狽也。還,從宣翻,又如字;下同。《考異》曰︰《革命記》云︰「許公卽至平壤,城頭卽樹降幡,約至五日,檢錄簿籍圖書,開門待命。期過五日,無一言,許公頻催,竟無報答。又十數日,乃云︰『船糧敗卻迴,公今更欲何待!』然始抗旌拒守,分兵以捉險要。許公知被欺,卽卷甲歸,每日常設方陳而行,四面俱時受敵,傷殺旣衆,糧食又盡,過遼水者什無二三。」按煬帝驕暴,高麗若明言不降,述等必不敢還。今從《隋書》。〉述等爲方陳而行,高麗四面鈔擊,〈陳,讀曰陣。鈔,楚交翻。麗,力知翻。〉述等且戰且行。

 

 가을, 7월, 24일에 살수에 도착 하였는데, 군사들이 절반 정도 건널 즈음에 고리는 뒤에서 그 후군을 공격하여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영이 궤멸되어 제지할 수 없엇고, 장수들과 사졸들이 도망하여 돌아오는데 하루 낮 하룻밤 동안에 압록수에 도착하니, 간 것이 4백5십리였다. 장군인 천수 사람 왕인공이 후방을 맡아서 고리의 공격하여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오직 위문승의 한 군영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秋,七月,壬寅,至薩水,軍半濟,高麗自後擊其後軍,右屯衞將軍辛世雄戰死。於是諸軍俱潰,不可禁止,將士奔還,一日一夜至鴨綠水,行四百五十里。將軍天水王仁恭爲殿,〈殿,丁練翻。〉擊高麗,卻之。來襲兒聞述等敗,亦引還。唯衞文昇一軍獨全。〈還,從宣翻,又如字。〉

 

 애초에, 백제왕 부여장이 사신을 파견하여 고리를 토벌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황제가 그로 하여금 고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더니, 부여장이 안으로 고리와 몰래 내통하고 있었다. 수군이 장차 출동하려고 하자 부여장은 그의 신하 국지모로 하여금 와서 군사를 출동할 시기를 알려달라고 요청하였고, 황제가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더하여 내리게 하고, 상서기부랑 석률을 파견하여 백제에 가도록 하고, 날짜를 기약하고 만나자고 알렸다. 수군이 요하를 건네게 되자 백제도 경계에서 또한 군사를 엄하게 단속하며 겉으로 수를 원조한다고 말하였지만 실제로는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初,九軍度遼,凡三十萬五千,及還至遼東城,唯二千七百人,資儲器械巨萬計,〈巨萬,萬萬也。〉失亡蕩盡。帝大怒,鎖繫述等。癸卯,引還。〈《考異》曰︰《雜記》︰「七月,帝自涿郡還東都。十一月,宇文述等糧盡遁歸,高麗出兵邀截,亡失蕩盡。帝怒,敕所司鎖將隨行。無幾,斬劉士龍等於軍市,特赦述。」今從《隋書》。〉

初,百濟王漳遣使請討高麗,帝使之覘高麗動靜,〈麗,力知翻。使,疏吏翻。覘,丑廉翻;又丑豔翻。〉璋內與高麗潛通。隋軍將出,璋使其臣國智牟來請師期,帝大悅,厚加賞賜,遣尚書起部郎席律詣百濟,〈《隋志》︰起部郎,屬工部尚書。《姓苑》︰席姓,其先姓籍,避項羽諱,改姓席氏。〉告以期會。〈告以起師之期及會師之日也。〉及隋軍渡遼,百濟亦嚴兵境上,聲言助隋,實持兩端。

 

 이번 원정에서는 오직 요수 서쪽에서 고리의 무려나를 점령하고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 뿐이다. 8월에 칙령을 내려서 여양·낙양·낙구·태원 등 창고의 양곡을 운반하게 하고, 망해돈을 향하고 민부상서 번자개로 하여금 탁군에 남아서 지키게 하였다. 9월 13일에 거가가 동도에 도착하였다.

 是行也,唯於遼水西拔高麗武厲邏,〈高麗置邏於遼水之西以警察度遼者。邏,郎佐翻。〉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八月,敕運黎陽、洛陽、洛口、太原等倉穀〈開皇三年,於衞州置黎陽倉,其汾、晉之粟,漕運以給京師,汾晉以北諸州,輸之太原倉。〉向望海頓,〈望海頓,當在遼西界。〉使民部尚書〈【章︰十二行本「書」下有「廬江」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樊子蓋留守涿郡。九月,庚寅,車駕至東都。〈《考異》曰︰《雜記》︰「十月,車駕幸涿郡,徵召兵馬,將遂度遼之功」,蓋誤。今不取。〉

 

 ⑫. 겨울, 10월, 우문술은 평소에 황제에게 총애를 입으며, 또한 그의 아들 우문사급은 황제의 딸 남양공주를 모시고 살았으므로 황제는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8일에 우중문 등과 더불어 모두 제명시켜서 백성으로 만들고, 유사룡의 목을 베어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하였다.

 ⑫. 宇文述素有寵於帝,且其子士及尚帝女南陽公主,故帝不忍誅。甲申,與于仲文等皆除名爲民,斬劉士龍以謝天下。〈以士龍縱乙支文德也。〉

 

 살수에서 패배하자 고리는 추격하여 설세웅을 백석산에서 포위하니 설세웅은 분발하여 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홀로 관직만 면제될 수 있었다. 위문승을 금자광록대부로 삼았다. 제장들이 모두 우중문에게 죄를 씌우니, 황제는 이미 제장들을 석방하였지만 홀로 우중문만 가두었다. 우중문이 근심하며 화를 내다가 병이 발생하고 어려운 것이 심해지자 마침내 그를 내보내었는데, 집에서 죽었다.

 薩水之敗,高麗追圍薛世雄於白石山,世雄奮擊,破之,由事獨得免官。以衞文昇爲金紫光祿大夫。諸將皆委罪於于仲文,帝旣釋諸將,獨繫仲文。仲文憂恚,發病困篤,乃出之,卒于家。〈恚,於避翻。卒,子恤翻。《考異》曰︰《略記》︰「于仲文以下斬於市。」今從《隋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