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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煬帝의 제1차 고리 침략 2 /小寒節初候雁北鄕水雷屯梅花風3日(陰11/24)乙卯

solpee 2021. 1. 7. 09:12

紀5  大業 8》 (壬申, 612)

 

 

 ③.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에 집합하니, 황제가 합수 현령 유질을 징소하여 물었다.

 "고리 무리들은 우리의 한 군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지금 짐이 이 무리를 가지고서 그들을 정벌하려고 하니 경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그들을 정벌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가만히 어리석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 폐하께서는 가시지 않기를  원합니다."

 황제가 안색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짐은 지금 군사를 총괄하여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어찌 아직 적을 보지도 않고 먼저 스스로 물러나라는 것이오?"

 ③. 四方兵皆集涿郡,帝徵合水令庾質,〈質出合水,見上四年。〉問曰︰「高麗之衆不能當我一郡,今朕以此衆伐之,卿以爲克不?」〈麗,力知翻。不,讀曰否。〉對曰︰「伐之可克。然臣竊有愚見,不願陛下親行。」帝作色曰︰「朕今總兵至此,豈可未見賊而先自退邪?」〈邪,音耶。〉

 

 대답하였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위엄을 가진 명망에 손상을 입을까 두렵습니다. 만약 거가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맹렬한 장수들과 굳센 사졸들에게 명령하고 방략을 지시하여 주셔서 두 배나 빠른 속도로 밤낮으로 전진ㄹ하여 그들이 생각지도 않은 곳으로 출동한다면 승리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일의 기회는 신속함에 달려 있으니 늦으면 공로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황제는 기뻐하지 않고 말하였다.

 "너는 이미 가는 것을 꺼리고 있으니 스스로 이곳에 머물러 있어도 좋다."

 우상방서감사 경순이 편지를 올려 간절히 간언하였으나, 황제는 크게 화를 내고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령을 하여 그의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하조가 어렵게 구명하여 면할 수 있었다.

 對曰︰「戰而未克,懼損威靈。若車駕留此,命猛將勁卒,〈將,卽亮翻。〉指授方略,倍道兼行,出其不意,克之必矣。事機在速,緩則無功。」帝不悅,曰︰「汝旣憚行,自可留此。」右尚方署監事耿詢上書切諫,〈監事,監作者也,秩九品。監,古銜翻。上,時掌翻。〉帝大怒,命左右斬之,何稠苦救,得免。

 

 정월 2일에 조서를 내렸는데, 좌익 12군은 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菟·夫餘·朝鮮·沃沮·樂浪 등으로 가는 길로 출발하게 하고, 우익 12군은 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蹋頓·肅愼·碣石·東暆·帶方·襄平 등으로 가는 길로 출동하게 하며, 서로 끊임없이 길을 이어 평양에 모두 집합하게 하였는데, 무릇 1백13만3천800명이었고, 2백만명이라고 불렀으며, 군량미를 수송하는 사람은 그에 두 배가 되었다.

  壬午,詔左十二軍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菟、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帝指授諸軍所出之道,多用漢縣舊名。《漢志》︰鏤方、長岑、朝鮮,屬樂浪郡。蓋馬,屬玄菟郡,有蓋馬大山。遼東,漢郡名。溟海,蓋卽漢樂浪郡之海冥縣。建安、南蘇、扶餘,皆高麗國城守之處。沃沮,亦古地名,是時其地已入新羅界。鏤,郎豆翻。菟,音塗。朝,音潮。鮮,音仙。沮,子餘翻。樂,音洛。浪,音郎。〉右十二軍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蹋頓、肅愼、碣石、東暆、帶方、襄平等道,〈《漢志》︰黏蟬、含資、渾彌、提奚、東暆、帶方等縣,屬樂浪郡。候城、襄平,屬遼東郡。臨屯,亦漢武帝所置郡名。蹋頓,卽漢末遼西烏丸蹋頓所居。肅愼,古肅愼氏之國,其地時爲靺鞨所居。碣石,《禹貢》之碣石也。杜佑以爲此碣石在高麗中。佑曰︰碣石山,在漢樂浪郡遂城縣,秦長城起於此山。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遺址猶存。黏,女廉翻。蟬,服虔音提。蹋,徒盍翻。碣,其列翻。暆,應劭曰,音移。〉駱驛引途,〈駱驛,相繼不絕也。〉總集平壤,〈平壤城,高麗國都也,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杜佑曰︰高麗王自東晉以後居平壤城,卽漢樂浪郡王險城。〉凡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人,號二百萬,其餽運者倍之。

 

 남쪽에 있는 桑乾水에서 토지신에게 의제를 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에게 유제(天神)를 지냈으며, 계성 북쪽에서 마조(말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황제가 친히 지휘를 하였는데, 매 군마다 대장과 아장이 각각 1명이었고, 기병은 40대로 하였으며, 隊는 100명으로 하여 10隊를 團으로 하였으며, 보병 80개의 부대는 4개의 단으로 나누었으며, 단에는 각기 偏長 1명씩을 두었으며,  그 개주·영불·기번은 매 단마다 색깔을 달리하였다. 수항사자 1명은 조서를 받들어 위무하게 하고, 대장의 통제를 받지 않게 하였다. 그들의 치중과 산병 또한 네 개의 단으로 하였으며, 보병으로 하여금 그들을 끼고 행군하게 하였으며, 전진하고 머무르며 군영을 세우는 일은 모두 순서와 규정이 있었다.

 宜社於南桑乾水上,類上帝於臨朔宮南,〈《記‧王制》︰天子將出,類乎上帝,宜乎社。鄭氏《註》︰類、宜,皆祭名。孔穎達曰︰天道遠,以事類而祭告之也。社主殺戮,故求便宜。社主陰,萬物於此斷殺,故曰宜。桑乾河,巡薊城南。《水經》︰濕水出鴈門陰館縣,東北過代郡桑乾縣,謂之桑乾水,東過廣陽薊縣北。今在薊城南,城邑有變遷也。乾,音干。〉祭馬祖於薊城北。〈《周禮》祭馬祖,鄭氏《註》曰︰馬祖,天駟也。〉帝親授節度︰每軍大將、亞將各一人;騎兵四十隊,隊百人,十隊爲團;步卒八十隊,分爲四團,團各有偏將一人;其鎧冑、纓拂、旗旛,每團異色;〈將,卽亮翻。騎,奇寄翻。鎧,可亥翻。〉受降使者一人,承詔慰撫,不受大將節制;其輜重散兵等亦爲四團,〈降,戶將翻。使,疏吏翻。重,直用翻。散,悉但翻。〉使步卒挾之而行;進止立營,皆有次敍儀法。·

 

 정월 3일에 제1군이 출발하였는데, 매일 1군씩을 보내는데 서로 간의 거리는 40리였으며, 군영을 연결하며 조금씩 전진하엿고, 40일을 끝내자 출발하는 것이 마침내 다하였으며, 선두와 후미가 서로 이어져서 북소리와 호각소리가 서로 들렸으며 정기가 뻗은 것이 960리였다. 어영 한에는 12위·삼대·5성·9시를 합쳤으며, 내·외·전·후·좌·우 6군으로 나누어 예속시켰으며, 차례로 출발하니, 또한 80리에 걸쳐 있었다. 근고 이래로 군사를 출동하는 방대한 규모로는 아직 있어본 적이 없었다.(*작은 나라라면서 진을 토벌할 때는 30만이었는데 300만 가까이 동원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고리의 힘을 陳의 10배나 무시무시하게 보았다는 증거야!)

 癸未,第一軍發;日遣一軍,相去四十里,連營漸進,終四十日,發乃盡,首尾相繼,鼓角相聞,旌旗亙九百六十里。御營內合十二衞、三臺、五省、九等,發隸內、外、前、後、左、右六軍,次後發,又亙八十里。近古出師之盛,未之有也。

 

 ⑦. 3월 14일 황상은 비로소 군사들이 있는 곳에 가서 전진하여 요수(지금의 난하일듯)에 도착하였다. 많은 부대들이 총집합하여 강가게 가서 크게 벌려 놓았는데, 고리군이 강에서 저지하고 방어하며 지키니 수의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좌둔위 대장군 백철장이 사람들이에게 말하였다.

 "장부의 목숨은 스스로 있을 곳이 잇는데, 어찌 쑥으로 콧대에 뜸을 뜨고 참외 꼭지에 코를 뿜으며 열병을 치료하여도 차도가 없다 하여 아이새끼들의 손아귀에서 누워 죽을 수가 있겠는가?"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겠다고 요청하고 그의 세 아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나라의 은전을 입었는데 지금이 죽는 날이다. 내가 아름답게 죽을 수 있다면 너희들은 부귀를 누리게 될 것이다."

 ⑦. 癸巳,上始御師,進至遼水。衆軍總會,臨水爲大陳,〈陳,讀曰陣。〉高麗兵阻水拒守,隋兵不得濟。左屯衞大將軍麥鐵杖謂人曰︰「丈夫性命自有所在,豈能然艾灸頞,瓜蔕歕鼻,治黃不差,而臥死兒女手中乎!」〈黃,熱病也。熱則頭痛,故燃艾以灸頞。熱則上壅,瓜蔕味苦寒,故噴鼻以通關鬲。差,愈也。然,與燃同。灸,居又翻。頞,烏葛翻;鼻頞。《說文》曰︰頞,鼻莖。蔕,音帝。歕,蒲悶翻。差,楚懈翻。治,直之翻。〉乃自請爲前鋒,謂其三子曰︰「吾荷國恩,〈荷,下可翻。〉今爲死日!我得良殺,汝當富貴。」

 

 황제는 공부상서인 우문개에게 명령하여 요수의 서쪽 기슭 세 길에 부교를 설치하게 하였는데, 이미 완공되자 부교를 끌고 동쪽기슭으로 가게 하였으나 다리가 짧아서 1여 장 정도가 미치지 못하였다. 고리군이 대규모 도착하자 수군 가운데날쌔고 용맹한 사람들은 다투어 강물에 뛰어들어 맞붙어 싸웠으며, 고리군들이 높은 곳에서 그들을 공격하였으므로 수군들은 언덕을 오를 수 없었고 죽은 사람들이 아주많았다.

 帝命工部尚書宇文愷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旣成,引橋趣東岸,〈趣,七喻翻。〉橋短不及岸丈餘。高麗兵大至,隋兵驍勇爭赴水接戰,〈驍,堅堯翻。〉高麗兵乘高擊之,隋兵不得登岸,死者甚衆。

 

 맥철장이 기슭으로 올라가서 호분낭장 전사웅과 맹차 등과 더불어 모두 싸우다 죽었다. 마침내 군사들을 거두어 다리를 끌어다가 다시 서쪽 기슭으로 갔다. 조서를 내려 맥철장을 숙공으로 추증하고, 그의 아들 맥맹재로 하여금 그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고, 둘째아들인 맥중재와 맥계재도 나란히 정의대부로 재수하였다.

 麥鐵杖躍登岸,與虎賁郎將錢士雄、孟叉等皆戰死。〈《考異》曰︰《雜記》作「錢英、孟金釵」。今從《隋‧帝紀》。〉乃斂兵,引橋復就西岸。詔贈鐵杖宿公,〈宿,古國名。〉使其子孟才襲爵,次子仲才、季才並拜正議大夫。

 

 다시 소부간 하주에게 명령하여 부교를 잇도록 하여 이틀에 되어 완성하자 각 부대는 서로 순차적으로 계속 전진하게 하여 동쪽기슭에서 크게 싸우니 고리군이 대패하여 죽은 사람이 1만을 헤아렸다. 각 부대에서는 이긴 기세를 타고 전진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는데 바로 한의 양평성(능원 또는 건창)이다.

 更命少府監何稠接橋,〈更,工銜翻。少,始照翻。〉二日而成,諸軍相次繼進,大戰于東岸,高麗兵大敗,死者萬計,諸軍乘勝進圍遼東城,卽漢之襄平城也。

 

 거가가 요수를 건너 갈살나 가한과 고창왕 백아를 접견하고 싸우는 것을 관망하는 곳으로 이끌어다가 그들을 두렵고 떨게 하고, 이어서 조서를 내려서 천하를 사면하게 하였다. 형부상서 위문승과 상서우승 유사룡에게 명령하여 요좌의 백서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의 부세를 면제하고 군현을 설치하고서 관할하게 하였다.

 車駕渡遼,〈《考異》曰︰《隋‧帝紀》︰「癸巳,上御師;甲子,臨遼水橋;戊戌,麥鐵杖死;甲午,車駕渡遼;乙未,大頓;丙申,大赦。」按《長曆》,是月庚辰朔,不容有甲子。又戊戌之下,不容有甲午、乙未、丙申。此必誤也。今並除之。〉引曷薩那可汗及高昌王伯雅觀戰處以懾憚之,〈懾,之涉翻。〉因下詔赦天子。命刑部尚書衞文昇、尚書右丞劉士龍撫遼左之民,給復十年,〈復,方目翻。〉建置郡縣,以相統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