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構成太子之短:태자의 단점을 얽어서 만들다./冬至節仲候麋角解4日(陰11/15)丙午

solpee 2020. 12. 29. 14:08

《南北朝 陳紀10 長城公 禎明》 (丁未, 587)

 

 

 ⑪. 8월에 수의 주군이 양의 주군을 불러 들어와 조현하도록 하였다. 양의 주군이 그의 신하 무리 200여 명을 이끌고 강릉을 출발하였는데, 18일에 장안에 이르렀다.

 ⑪. 八月,隋主徵梁主入朝。梁主帥其羣臣二百餘人發江陵;〈朝,直遙翻。帥,讀曰率。〉庚申,至長安。

 

 수의 주군은 양의 주군이 밖에 있자 무향공 최홍도를 파견하여 병사를 이끌고 강릉을 지키도록 하였다. 군대가 도주에 이르자, 양의 주군의 숙부이자 태부인 안평왕 소암과 동생이자 형주 자사인 의흥왕 소환 등은 최홍도가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23일에 도관상서 심군공을 파견하여 형주 자사인 의황후 진혜기에게로 가서 항복을 받아달락도 청하였다. 9월 19일에 소암 등이 문관과 무관, 남자와 여자 10만 명을 이끌고 도망하여 왔다.

 隋主以梁主在外,遣武鄕公崔弘度將兵戍江陵。軍至都州,〈隋無都州,《蕭琮傳》作「鄀州」,當從之。《五代志》︰竟陵郡樂鄕縣,西魏置鄀州。又,南郡紫陵縣,其城南面,梁置鄀州。鄀,市灼翻。〉梁主叔父太傅安平王巖、弟荊州刺史義興王瓛等〈瓛,戶官翻。〉恐弘度襲之,乙丑,遣都官尚書沈君公詣荊州刺史宜黃侯慧紀請降。〈降,戶江翻。〉九月,庚寅,慧紀引兵至江陵城下。辛卯,巖等驅文、武、男、女十萬口來奔。

 

 수의 주군이 이 소식을 듣고 양을 없앴는데(555~587까지 3대 33년 간 존속), 상서좌복야 고경을 파견하여 남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고, 양의 중종과 세종에게는 각각 묘지기 10호를 주었고, 양의 주군인 소종을 상주국으로 제수하고, 작위를 내려서 거공이라고 하였다.

 隋主聞之,廢梁國;〈梁敬帝紹泰元年,後梁中宗卽帝位,更三主,三十三年而亡。〉遣尚書左僕射高熲安集遺民;〈射,寅謝翻。熲,居永翻。〉梁中宗、世宗各給守冢十戶;拜梁主琮上柱國,賜爵莒公。

 

《南北朝 陳紀10 長城公 禎明 2》 (戊申, 588)

 

 

 ③. 태자 진윤은 성격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문학을 좋아하나 자못 잘못도 있었는데, 첨사 원헌이 간절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때 심후는 총애를 받지 못하고, 가까이 좌우에 있는 시종이 여러 차례 동궁으로 오갔는데 태자도 역시 자주 사람을 보내어 심후의 거소에 가게 하였으므로, 황제는 그가 원망한다고 의심하여 매우 그를 미워하였다.

 ③. 太子胤,性聰敏,好文學,〈好,呼到翻。〉然頗有過失;詹事袁憲切諫,不聽。時沈后無寵,而近侍左右數於東宮往來,太子亦數使人至后所,帝疑其怨望,甚惡之。〈數,所角翻。惡,烏路翻。〉

 

 장과 공 두 귀비는 낮과 밤으로 후와 태자의 단점을 얽어서 만들고, 공범의 무리도 또 밖에서 그들을 도왔다. 황제가 장귀비의 아들인 시안왕 진심을 세워 뒤를 잇게 하려고 하여 일찍이 조용히 그것을 말하였다. 이부상서 채징이 황제의 뜻을 따라서 칭찬하자, 원헌이 사나운 얼굴빛을 하며 그것을 꺾으며 말하였다.

 張、孔二貴妃日夜構成后及太子之短,孔範之徒又於外助之。帝欲立張貴妃子始安王深爲嗣,嘗從容言之。〈嗣,祥吏翻。從,千容翻。〉吏部尚書蔡徵順旨稱贊,袁憲厲色折之曰︰

 

 "황태자는 국가의 저부이어서 억조나 되는 백성들이 마음을 두 고 있는데, 경이 어떤 사람이건대 가볍게 폐립하는 것을 말하는가?"

 황제가 마침내 채징의 의견을 따라서 회의하도록 하였다. 여름, 5월 17일에 태자 진윤을 폐하여 오흥왕으로 삼고, 양주 자사 시안왕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채징은 채경력의 아들이다. 진심도 역시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며 의지와 절개가 있었는데, 거동이 점잖고 엄숙하여 비록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시종이라 하여도 그가 즐거워하거나 화내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황제는 원헌이 일찍이 전윤에게 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원헌을 상서복야로 삼았다.

 「皇太子國家儲副,億兆宅心,卿是何人,輕言廢立!」帝卒從徵議。〈折,之舌翻。宅心,居心也。卒,子恤翻。〉夏,五月,庚子,廢太子胤爲吳興王,立揚州刺史始安王深爲太子。徵,景歷之子也。〈蔡景歷歷事陳高祖、世祖、高宗。〉深亦聰惠,〈惠,與慧同。〉有志操,〈操,七到翻。〉容止儼然,雖左右近侍未嘗見其喜慍。帝聞袁憲嘗諫胤,卽用憲爲尚書僕射。

 

 황제가 심후에게는 평소에 야박하게 대하였으므로 장귀비가 후궁의 정사를 오로지 하였는데, 심후는 조용히 있으면서 질투하거나 원망하는 바가 없었고, 자신이 사는 곳은 검소하고 간략하며 의복은 비단으로 꾸민 것이 없었고, 오로지 경서와 사서 그리고 석전을 찾아 읽는 것을 일로 삼고 자주 글을 올려 간하며 다투었다.

 황제가 그녀를 페하고 장귀비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때머침 나라가 망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帝遇沈后素薄,張貴妃專後宮之政,后澹然,未嘗有所忌怨,〈澹,徒敢翻。〉身居儉約,衣服無錦繡之飾,唯尋閱經史及釋典爲事,〈釋典,佛經也。〉數上書諫爭。〈數,所角翻。上,時掌翻。爭,側迸翻。〉帝欲廢之而立張貴妃,會國亡,不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