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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의 기지/ 冬至節初候蚯蚓結3日(陰11/9)庚子

solpee 2020. 12. 23. 15:24

《南北朝 陳紀4 宣堤 太建 3年》 (辛卯、 571)

 

 

 ⑭. 주의 진공인우문호는 죙외부의 참군인  곽영으로 하여금 요양성 남쪽과 정양성 서쪽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제의 단소는 군사를 이끌고 주의 여러 군사를 습격하여 그들을 격파하였다. 6월에 단소가 정양성을 포위하였으나 주의 분주 자사인 양부가 굳게 지키서 점령하지 못하엿다. 단소가 급히 이를 공격하여 그 외성을 도륙하였다.

 ⑭. 周晉公護使中外府參軍郭榮城於姚襄城南、定陽城西,〈姚襄城者,襄爲桓溫所敗,奔平陽所築,後人因以爲名。杜佑曰︰今汾州吉昌縣西,則姚襄所築城,西臨黃河,控帶龍門之險,春秋時晉之北屈也。「郭榮」之下有「築」字,文意乃明。〉齊段韶引兵襲周師,破之。六月,韶圍定陽城,〈《考異》曰︰《韶傳》︰「七月,屠其外城。」《周書》、《北齊‧帝紀》,皆云「六月陷汾州」,今從之。〉周汾州刺史楊敷固守不下。〈周汾州治定陽城,隋改爲吉昌縣。汾州,唐改爲慈州。〉韶急攻之,屠其外城。

 

 당시에 단소는 와병 중이어서 난릉왕 고장공에게 말하였다.

 "이 성은 삼면이 중첩한 계곡으로 둘러싸여 모두 도주할 길이 없는데, 오직 동남쪽 한 길 뿐이라고 생각되니 적이 반드시 이곳으로 나올 것이오. 의당 정예의 군사를 선발하여 오로지 그곳을 지키면 이는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時韶臥病,謂蘭陵王長恭曰︰「此城三面重澗,〈重,直龍翻。〉皆無走路;唯慮東南一道耳,賊必從此出。宜簡精兵專守之,此必成擒。」

 

 고장공이 마침내 장사 1천여 명으로 하여금 동남쪽 계곡 입구에 잠복하게 하였다. 성 안에선ㄴ 양식이 다 떨어져서 제공 우문헌은 군사를 총괄해가지고 그들을 구원하면서 단소를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양부가 남은 군사들을 인솔하고 포위를 뚫고 밤중에 도주하는데 복병이 그들을 쳐서 사로잡으니 그의 무리를 거의 모두 포로로 잡았다. 29일에 제가 주의 분주와 요양성을 빼앗으니, 오직 곽영이 축성한 성만이 홀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양부는 양음의 친척 조카이다.

 長恭乃令壯士千餘人伏於東南澗口。城中糧盡,齊公憲總兵救之,憚韶,不敢進。敷帥見兵突圍夜走,〈帥,讀曰率。見,賢遍翻。〉伏兵擊擒之,盡俘其衆。〈《考異》曰︰《周書‧齊王憲傳》︰「屢破齊師。」《北齊書‧斛律光》、《段韶傳》︰「屢破周師。」要之,周失汾州,齊師勝耳。〉乙巳,齊取周汾州及姚襄城,唯郭榮所築城獨存。敷,愔之族子也。〈楊愔以死殉齊,而敷爲周死於城郭,各盡忠於其所事也。愔,於今翻。〉

 

 양부의 아들 양소는 어려서 재주와 예능이 많았고 큰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조그마한 것들에 구애됨이 없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절개를 지키다가 재에 함락되어서 시호를 추증 받지 못하니, 표문을 올려 이치를 펼쳤다. 주의 주군이 허락하지 않자 두세 차례 더 올리니, 황제가 크게 화가 나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그를 목 베게 하였다. 양소가 큰소리로 말하였다.

 敷子素,少多才藝,〈少,詩照翻。〉有大志,不拘小節,以其父守節陷齊,未蒙贈諡,上表申理。周主不許,至於再三,帝大怒,命左右斬之。素大言曰︰

 

 "신은 무도하여 천자를 섬기며 그 분수를 다하다가 죽습니다."

 황제는 그의 말을 장하게 여겨서 양부에게 대장군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장이라 하며, 양소를 의동삼사로 삼고 점차 예우를 보였다. 황제가 양소에게 조서를 쓰도록 명령하면 붓을 잡고서 즉시 완성하였는데, 문장과 뜻이 나란히 아름다워서 황제가 말하였다.

 "이를 힘쓰면 부귀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마라."

 양소가 말하였다.

 "단지 아마도 부귀하게 되는 것을 가지고 신을 압박하지만 신은 부귀를 도모하는 데는 무심합니다.

 「臣事無道天子,死其分也!」〈分,扶問翻。〉帝壯其言,贈敷大將軍,諡曰忠壯,〈《諡法》︰武而不遂曰壯。〉以素爲儀同三司,漸見禮遇。帝命素爲詔書,下筆立成,詞義兼美,帝曰︰「勉之,勿憂不富貴。」素曰︰「但恐富貴來逼臣,臣無心圖富貴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