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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 武帝의 사망 /大雪節中候虎始交2日(陰10/29)庚寅

solpee 2020. 12. 13. 10:48

《南北朝 陳紀1 武帝 永定 3年》 (己卯, 559)

 

 

 

 ㉖. 6월 12일에 진패선(57세)이 몸이 불편하더니 21일에 죽었다. 황상은 전쟁에 임하여서는 승리하였고, 뛰어난 꾀로 독자적으로 운영하였으며, 정사를 하면서 관대하고 간소화에 힘쓰기를 숭상하였고, 군대는 시급한 용무가 아니면 가벼이 징발하지 않았다. 성품은 검소하여서 늘 먹는 음식은 몇 가지 품목에 지나지 않았고, 개인적 연회에서는 瓦器(질그릇)·蚌盤(방반:나전칠기)을 사용하였으며, 殽核(씨를 발라내지 않은 음식)으로 일을 채웠을 뿐이고, 후궁들은 금빛과 비취색의 장식이 없었으며, 여악은 진설되지 않았다.

 ㉖. 丁酉,上不豫,丙午,殂。〈年五十七。〉上臨戎制勝,英謀獨運,而爲政務崇寬簡,非軍旅急務,不輕調發。性儉素,常膳不過數品,私宴用瓦器、蚌盤,〈調,徒釣翻。蚌盤者,髹器以蚌爲飾,今謂之螺鈿。蚌,步項翻。〉殽核充事而已;後宮無金翠之飾,不設女樂。

 

 당시 황제의 아들인 진창은 장안에 있었는데, 안으로는 적통의 계승자가 없었고 밖으로는 강한 적이잇고, 오래된 장수들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밖에 있었으며, 조정에는 중신들이 없었는데, 오직 중령군 두릉만이 숙위병을 관장하며 건강에 있었다. 장황후는 두릉과 중서시랑 채경력을 불러 금중에 들어가서 정책을 논의하고 비밀에 부쳐 발상하지 않고 급히 남환에 있는 임천왕 진천을 불렀다.

 時皇子昌在長安,〈梁元帝承聖元年,徵昌爲領直,江陵之陷,沒于長安。〉內無嫡嗣,外有強敵,宿將皆將兵在外,朝無重臣,〈將,卽亮翻。朝,直遙翻;下同。〉唯中領軍杜稜典宿衞兵在建康。章皇后召稜及中書侍郎蔡景歷入禁中定議,祕不發喪,急召臨川王蒨於南皖。

 

 채경력은 친히 환관들·궁인들과 더불어 은밀히 염구를 장만하였다. 당시에는 날씨가 무더워서 반드시 재궁을 만들어야 하였지만 낫과 도끼질하는 소리가 밖에서 들릴까 두려워하며 마침내 봉납을 가지고 비기를 만들고 문서로 조칙을 내려 옛방식에 의거하여 널리 행하였다.

 景歷親與宦者、宮人密營斂具。〈斂,力贍翻。〉時天暑,須治梓宮,〈治,直之翻。〉恐斤斧之聲聞於外,乃以蠟爲祕器,〈蠟,蜜滓也。《漢官》有東園祕器。聞音問。〉文書詔敕,依舊宣行。

 

 후안도의 군사가 들어와서 적기에 남환에 도착하자 임천왕과 더불어 같이 조정에 돌아왔다. 29일에 왕이 건강에 도착하여 들어가 중서성에 거하니, 후안도는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논의를 확정하고 있었는데, 임천왕을 받들어 제위를 계승하게 하려 하였으나 왕은 겸손하게 감히 맡지 않겠다고 사양하였다. 황후는 진창이 있기 때문에 아직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고, 여러 신하들도 여전히 미루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侯安都軍還,適至南皖,與臨川王俱還朝。甲寅,王至建康,入居中書省,安都與羣臣定議,奉王嗣位,王謙讓不敢當。皇后以昌故,未肯下令,羣臣猶豫不能決。

 

 후안도가 말하였다.

 "지금 사방이 평정되지 않았는데, 어느 겨를에 멀리까지 가겠습니까? 임천왕께서는 천하에 큰 공로를 세웠으니 모름지기 함께 그를 옹립하여야 합니다.  지금의 일에 대해 뒤에 호응하는 사람은 목을 벨 것입니다."

 安都曰︰「今四方未定,何暇及遠!臨川王有大功於天下,〈武帝旣殺王僧辯,使蒨平杜龕、張彪等以定東土,故云有大功。〉須共立之。今日之事,後應者斬!」

 

 즉시 검을 뽑아 전에 올려놓고 황후에게 아뢰어 옥새를 내오도록 하고, 또한 손수 진천의 머리를 풀어주고 밀어서 상례에 나아가 절차를 치르게 하니, 大行(아직 매장하지 않은 황제의 시신)의 영구를 태극 서쪽 계단으로 옮겼다. 황후가 마침내 명령을 내려서 진천으로 대통을 찬승하게 하였다. 이날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7월 1일에 황후를 높여 황태후라고 하였다. 6일에 후진을 태위로 삼고 후안도를 사공으로 삼았다.

 卽按劍上殿,白皇后出璽,又手解蒨髮,推就喪次,〈上,時掌翻。璽,斯氏翻。推,吐雷翻。爲侯安都恃定策之功以殺其身張本。〉遷殯大行于太極西階。皇后乃下令,以蒨纂承大統。是日,卽皇帝位,大赦。秋,七月,丙辰,尊皇后爲皇太后。辛酉,以侯瑱爲太尉,侯安都爲司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