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樂遜上言四事: 약손의 4상서/大雪節中候虎始交2日(陰10/29)庚寅

solpee 2020. 12. 13. 05:59

《南北朝 陳紀1 武帝 永定 3年》 (己卯, 559)

 

 

 ㉒. 6월 3일에 周에서는 장맛비 때문에 여러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봉사를 올려 극간하게 하였다. 좌광록대부인 猗氏(의지)사람 약손이 말씀을 올린 네 가지가 있었다.

 ㉒. 六月,戊子,周以霖雨,詔羣臣上封事極諫。左光祿大夫猗氏樂遜上言四事︰〈猗氏縣,漢以來屬河東郡。古郇瑕氏之地,後以猗頓居之,以盬鹽致富,遂改爲猗氏。上,時掌翻。〉

 

 그 첫째,

 "최근에 군수와 현령들이 교대하는 기간이 이미 촉박한데도 그 성과가 나타나기를 책임지우고자 하여 오로지 위협과 사나운 정치에만 힘쓰니, 지금 관동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있어 만약 정사를 넉넉하게 베풀지 못하면 경계 밖까지 들리게 될 것인데, 어떻게 저 수고한 백성들을 낙토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其一,以爲「比來守令代期旣促,〈比,毗至翻。守,式又翻。〉責其成效,專務威猛;今關東之民淪陷塗炭,若不布政優優,〈《詩‧商頌》之辭。毛萇曰︰優優,和也。〉聞諸境外,〈聞,音問。〉何以使彼勞民,歸就樂土!」〈樂,音洛。〉

 

 그 두 번째.

 "근래에 위의 도읍인 낙양은 한때에는 번성하여 귀하고 권세있는 집안들이 다투어 사치하고 화려하게 되니, 끝내는 재앙과 난리가 번갈아 일어나게 하여서 천하는 손상을 입고 무너지게 되었는데, 요사이 조정에 있는 귀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릇과 의복은 점차 화려해져서 백공들이 기이하고 교묘하게 만드는데 힘을 다하고 있으니, 신은 진실로 물건이 점차 호화롭게 변하여 정치와 풍속을 해칠까 두렵습니다."

 其二,以爲「頃者魏都洛陽,一時殷盛,貴勢之家,競爲侈靡,終使禍亂交興,天下喪敗;〈喪,息浪翻。〉比來朝貴器服稍華,〈朝,直遙翻。〉百工造作務盡奇巧,臣誠恐物逐好移,有損政俗。」〈好,呼到翻。〉

 

 그 세 번째,

 "관리를 선발하는 부서에서는 인재를 보충하고 의제(황제가 결정하기 좋도록 안을 올리는 것)하면서 의당 무리들과 더불어 그것을 함께 하여야 하는데, 지금 주와 군에서도 선발하여 두는 데도 오히려 향려들을 모아놓는데, 하물며 천하 사람들 가운데서 전형하면서 물망에 오른 사람을 뽑지 아니하여 이미 기밀에 관한 일이 아니니 어찌 충분히 비밀리에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선발하여 설치하는 날은 의당 무리들로 하여금 마음을 분명하게 알게 하고 그런 다음에 주문을 올리게 하여야 합니다."

 其三,以爲「選曹補擬,宜與衆共之;今州郡選置,猶集鄕閭,況天下銓衡,不取物望,旣非機事,何足可密!〈以此觀之,選曹補擬,皆密奏於上,蓋自晉山濤啓事始也。〉其選置之日,宜令衆心明白,然後呈奏。」

 

 그 네 번째,

 "고양이 산동을 점거하고 있으니 창졸간에 제압하기가 어려운 것은, 비유하건데 오히려 바둑에서 패가 서로 대치하며 앞뒤를 다투다가 만약 한 개의 바둑알이라도 적당한 곳에 두지 못하면 혹 저쪽 펀에게 이익을 주게 하는 것과 같아서 진실로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운영하여야 하니, 먼저 봉역을 보존하고, 마땅히 변방의 귀퉁이에서 이익을 욕심내어 가볍게 거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其四,以爲「高洋據有山東,未易猝制,譬猶棋劫相持,爭行先後,〈弈棋有劫,彼此爭行以相持,以先後著決一枰之勝負。易,以豉翻。〉若一行不當,〈當,丁浪翻。〉或成彼利,誠應捨小營大,先保封域,不宜貪利邊陲,輕爲舉動。」

 

 

 ㉓. 주의 처사인 위형은 위효관의 형이며, 뜻은 고상하고 생활은 간소하여 위·주 시기에 열 번이나 징소하여도 굽히지 않았다. 주의 태조는 아주 그를 존중하여 그의 의지를 빼앗지 않고, 세종은 예의로 공경함이 더욱 두터워 '逍遙公'이라고 불렀다. 진공 우문호는 그를 모셔서 집에 가서 정사에 관해서 문의 하였는데, 우문호가 거처하는 집을 호화롭게 장식하였으므로 위형이 집을 우러러보면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㉓. 周處士韋敻,〈處,昌呂翻。敻,休正翻。〉孝寬之兄也,志尚夷簡,魏、周之際,十徵不屈。周太祖甚重之,不奪其志,世宗禮敬尤厚,號曰「逍遙公」。晉公護延之至第,訪以政事;護盛脩第舍,敻仰視堂,歎曰︰

 

 "술을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집을 높게 짓고 담장에 조각을 하였는데 이 중에서 하나라도 아직 혹 망하지 않은 것이 없었도다."

 우문호가 기뻐하지 않았다.

 「酣酒嗜音,峻宇彫牆,有一于此,未或不亡。」〈《夏書‧書五子之歌》之辭。〉護不悅。

 

 표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 구준은 구찬의 손자이며, 어릴 때 학문을 하고 행실이 훌륭하였다. 그 집안사람들은 항상 물건을 팔았는데, 견 다섯 필씩을 더 많이 얻어 왔고, 구준이 뒤늦게야 그것을 알고 말하였다.

 "재물을 얻고 덕행을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다."

 주인을 찾아서 그것을 돌려주었다. 종족을 돈독하고 화목하게 하며 더불어 같이 풍요롭게 하며 절약하고, 자손들을 가르치고 훈계할 때는 반드시 예의를 먼저 하였다.

 驃騎將軍、開府儀同三司寇儁,〈寇儁所居官,後周之九命也。〉讚之孫也。〈寇讚自秦歸魏,見一百一十八卷晉安帝義熙十四年。〉少有學行。家人常賣物,多得絹五匹,儁於後知之,曰︰「得財失行,〈少,詩照翻。行,下孟翻。〉吾所不取。」訪主還之。敦睦宗族,與同豐約,敎訓子孫,必先禮義。〈先,悉薦翻。〉

 

 대통 연간에서부터 늙고 병든 것을 핑계로 조정에 들어가 알현하지 않자 세종은 빈 마음으로 그를 보고자 하였으므로 구준은 하는 수 없이 들어가서 알현하였고, 왕은 그를 끌어당겨 같은 자리에 앉히고 위왕조의 옛일에 대하여 문의하였으며, 어여를 타게 하였는데 왕 앞에 그를 태우고 나가게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오직 선을 쌓은 사람들에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自大統中,稱老疾,不朝謁;〈朝,直遙翻;下同。〉世宗虛心欲見之,儁不得已入見。〈入見,賢遍翻。〉王引之同席而坐,問以魏朝舊事;載以御輿,令於王前乘之以出,顧謂左右曰︰「如此之事,唯積善者可以致之。」〈史言周王禮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