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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迪의 등장과 제의 장성/大雪節初候鶡旦不鳴4日(陰10/26)丁亥

solpee 2020. 12. 10. 04:29

《南北朝 梁紀22 敬帝 太平 元年 丙子556)

 

 

 ㊳. 애초에, 후경의 난 때 임청의 백성 주속이 군 안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시흥왕 소의가 군을 느에게 양보하고 떠나갔다. 주속의 부장들 모두는 군에 있는 호족들인데다 대부분 교만하고 전횡을 하자 주속이 그들을 제재하니, 제장들이 모두 원망하여 서로 더불어 그를 죽였다.

 ㊳. 初,侯景之亂,臨川民周續起兵郡中,〈臨川,漢豫章郡南城縣之地,後漢分南城北境爲臨汝縣,吳孫亮太平二年,分豫章之東部南城、臨汝二縣置臨川郡,隋、唐爲撫州。〉始興王毅以郡讓之而去。續部將皆郡中豪族,多驕橫,〈將,卽亮翻;下同。橫,戶孟翻。〉續裁制之,諸將皆怨,相與殺之。

 

 주속의 종인인 주적은 군중에서 용맹이 으뜸이었는데 무리들이 추대하여 주군으로 삼았다. 주적은 본래 한미하여 군의 사람들이 복종하지 읺을까 두려워서 같은 군에 사는 주부의 집안이 성망이 높고 드러났으므로 마디를 굽히고 의지를 꺾어 그와 교분을 맺으니, 주부 또한 주적을 섬김이 아주 공손하였다. 주적이 상당을 점거하고 주부는 옛 군을 점거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주적을 형주 자사로 삼았고 임천내사의 직책을 관장하게 하였다.

 續宗人迪,勇冠軍中,〈冠,古玩翻。〉衆推爲主。迪素寒微,恐郡人不服,以郡周敷族望高顯,折節交之,〈折,而設翻。〉敷亦事迪甚謹。迪據上塘,〈「上塘」,下卷作「工塘」,必有一誤。按《陳書‧周迪傳》,「工」字爲是。〉敷據故郡,朝廷以迪爲衡州刺史,領臨川內史。〈以臨川內史帶衡州刺史耳。〉

 

 당시 백성들은 후경의 난을 만나서 모두가 농업을 버리고 여러 무리들이 모여 도적이 되었으나, 오직 주적의 부하들만이 홀로 농사와 잠업에 힘써서 각기 저장창고는 가득 찼으며, 政敎는 엄격하고 명확하여 징수하여 걷는 것은 반드시 도착하였고, 나머지 군 가운데 핍절한 곳에서는 모두가 도와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時民遭侯景之亂,皆棄農業,羣聚爲盜,唯迪所部獨務農桑,各有贏儲,政敎嚴明,〈敎,謂敎令,州郡下令謂之敎。〉徵斂必至,〈斂,力贍翻。〉餘郡乏絕者皆仰以取給。〈仰,牛向翻。〉

 

 주적의 성품은 소박하여 위의를 일삼지 않았고 평상시에도 맨발로 걸어다녔으며, 비록 밖에서 새끼를 꼬거나 대나무를 쪼갤 때에는 곁이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였으며 말에서는 어눌하였어도 마음속에 신의와 성실을 품었으므로 임천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귀부하였다.

 迪性質樸,不事威儀,居常徒跣,雖外列兵衞,內有女伎,挼繩破篾,傍若無人,〈伎,渠綺翻。挼,奴禾翻。蔑,莫結翻,竹筠也。〉訥於言語而襟懷信實,臨川人皆附之。

 

 

 ㊴. 제에서는 서하의 총진수에서부터 장성을 쌓아서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는데, 전후로 쌓은 것이 동서로 무릇 3천여 리나 되었으며, 대략 10리마다 한 개의 수자리를 두고 여해처에는 주와 진을 설치하였는데 무릇 25곳이었다.

 ㊴. 齊自西河總秦戍築長城。〈《考異》曰︰去歲六月已云築長城,而地名、長短不同,不知與此爲一事爲二事。《北齊書》、《北史》皆然。今兩存之。〉東至於海,前後所築東西凡三千餘里,率十里一戍,其要害置州鎭,凡二十五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