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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기갈기 찢겨죽은 후경/大雪節初候鶡旦不鳴2日(陰10/24)乙酉

solpee 2020. 12. 7. 21:47

《南北朝 梁紀20 元帝 承聖 元年 壬申552)

 

 

 ⑭. 사답인이 유신무를 토벌하고 돌아오다가 부양에 이르러서 후경이 패배하여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1만 명을 인솔하고 북쪽으로 나가서 후경을 기다리려고 하였으나, 조백초가 전당을 점거하고 그를 막았다. 후경이 나아가 가흥에 도착하였으나 조백초가 그를 배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마침네 물러나 오를 점거하였다.

 ⑭. 謝答仁討劉神茂還,至富陽,聞侯景敗走,帥萬人欲北出候之,〈帥,讀曰率。〉趙伯超據錢塘拒之。侯景進至嘉興,〈沈約曰︰嘉興,本名長水,秦改曰由拳。吳孫權黃龍四年,由拳縣生嘉禾,改曰禾興;孫晧避父名,改曰嘉興;今秀州是也,北至吳郡一百五十五里。〉聞伯超叛之,乃退據吳。

 

 4월 12일에 후진이 후경을 뒤쫓아서 송강에서 따라잡았는데, 후경은 아직 배 200척과 무리가 수천 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후진이 나아가서 공격하여 그를 패배시키고 팽준·전천·방세귀·채수락·왕백추를 사로잡았다. 후진이 팽준의 배를 산채로 가르고 그의 창자를 끄집어냈는데 팽준은 오히려 죽지 않고 손으로 직접 그것을 거두어들이자 마침내 그의 목을 베었다.

 己酉,侯瑱追及景於松江,〈松江,在今吳縣,一名笠澤,在吳縣南四十里。〉景猶有船二百艘,衆數千人,〈艘,蘇遭翻。〉瑱進擊,敗之,〈敗,補邁翻。〉擒彭雋、田遷、房世貴、蔡壽樂、王伯醜。〈樂,音洛。〉瑱生剖雋腹,抽其腸,雋猶不死,手自收之,乃斬之。

 

 후경이 심복 수십 명과 더불어 단 한 척의 배로 달아나는데, 두 아들을 강물에 밀어 떨어뜨리고 곧 바다로 들어가려고 하니, 후진이 부장 초승도를 파견하여 그를 뒤쫓도록 하였다. 후경은 양간의 딸을 받아들여 소첩으로 삼았으며, 그의 오빠인 양곤을 고직도독으로 삼고 아주 후하게 대하였었는데, 양곤은 후경을 좇아서 동쪽으로 달아나서 후경이 가까이하고 아꼈던 왕원래·사위아와 더불어 몰래 그를 도모하였다. 사위아는 사답인의 동생이다. 

 景與腹心數十人單舸走,推墮二子於水,〈舸,古我翻。推,吐雷翻。〉將入海,瑱遣副將焦僧度追之。〈將,卽亮翻。〉景納羊侃之女爲小妻,以其兄鵾爲庫直都督,待之甚厚;鵾隨景東走,與景所親王元禮、謝葳蕤密圖之。葳蕤,答仁之弟也。景下海,欲向蒙山,〈景自滬瀆下海。魏收《志》︰東安郡新泰縣有蒙山。景欲浮海趣山東,復入北也。葳,音威。蕤,如佳翻。〉

 

 후경은 바다로 내려가서 몽산으로 향하려고 하고, 18일에 후경이 낮잠을 자는데 양곤이 뱃사람에게 말하였다.

 "이 중에 어느 곳에 몽산이 잇던지 간에 너는 다만 내가 처리하는 것만을 듣도록 하라."

 드디어 곧바로 경구로 향하였다. 호두주에 이르자 후경이 깨어나서 크게 놀랐는데, 기슭 위에 사람에게 물으니, 말하였다.

 "곽원건이 아직 광릉에 있습니다."

 후경이 크게 기뻐하고 그에게 의지하려고 하였다.

 양곤은 칼을 빼어들고 뱃사람에게 질책하여 경구로 향하도록 하고 이어서 후경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왕을 위하여 힘을 많이 썼으나 이제 여기에 이르렀고 끝내는 이룬 것이 없으니, 머리를 빌어서 부귀를 얻고 싶습니다."

 己卯,景晝寢;鵾語海師︰〈海師,習知海道者也。語,牛倨翻。〉「此中何處有蒙山,汝但聽我處分。」〈處,昌呂翻。分,扶問翻。〉遂直向京口。至胡豆洲,景覺,大驚;問岸上人,云「郭元建猶在廣陵」,景大憙,〈覺,古孝翻。憙,與喜同。〉將依之。鵾拔刀,叱海師向京口,〈《考異》曰︰《典略》云,「舟人李橫文紿景向南徐州」,今從《梁書》。〉因謂景曰︰「吾等爲王効力多矣,〈爲,于僞翻。〉今至於此,終無所成,欲就乞頭以取富貴。」

 

 후경이 아직 대답하지 않았으나 번득이는 칼날을 번갈아 내리쳤다. 후경이 물로 뛰어 들려고 하니 양곤이 칼로 그를 찍었다. 후경이 달아나 배안으로 들어가서 차고 있던 칼을 가지고서 배의 바닥을 헤치자 양곤이 창으로 그를 찔러 죽였다. 상서우복야 삭초세는 다른 배에 있었는데, 사위아가 후경의 명령이라 하여 그를 불러서 붙잡았다.

 景未及答,白刃交下。景欲投水,鵾以刀斫之。景走入船中,以佩刀抉船底,〈抉船底,欲入水。抉,一決翻。〉鵾以矟刺殺之。〈矟,色角翻。刺,七亦翻。〉尚書右僕射索超世在別船,葳蕤以景命召而執之。

 

 남서주자사 서사휘가 삭초세의 머리를 베었고 소금을 후경의 뱃속에 넣고 그 시신을 건강으로 보냈다. 왕승변은 수급을 강릉에 보내고,  그의 손을 잘라 사위아를 시켜서 제에 보내게 하고, 시체를 저자에 드러내니, 사민들이 다투어 그것을 가져다가 먹었는데, 아울러 뼈도 모두 없어졌다. 율양공주 역시 먹는 데에 참여하였다.

 南徐州刺史徐嗣徽斬超世,〈王偉、索超世,景之謀主也。索,蘇各翻。〉以鹽內景腹中,送其尸於建康。僧辯傳首江陵,截其手,使謝葳蕤送於齊;暴景尸於市,士民爭取食之,幷骨皆盡;溧陽公主亦預食焉。〈《考異》曰︰《典略》云,「復烹溧陽公主」,今從《南史》。〉

 

 애초에, 후경의 다섯 아들은 북제에 있었는데, 세종은 그의 맏아들의 얼굴을 벗기고서 그를 삶아버렸고 어린 자식들은 모두 잠실에 넣었다(궁형에 처함). 제의 현조(문선제 고양)가 즉위하였는데, 꿈에 원숭이가 그의 평상에 앉아 있어서 마침내 그들을 다 삶아버렸다. 조백초·사답인이 모두 후진에게 항복하니 후진은 전천 등과 함께 건강으로 송치하였다.

 왕승변이 저자에서 방세귀의 목을 베고, 왕위·여계락·주석진·엄단·조백초·복지명을 강릉으로 보냈다.

 20일에 상동왕이 명령을 내려서 계엄을 해제 하였다.

 初,景之五子在北齊,世宗剝其長子面而烹之,幼者皆下蠶室。〈長,知兩翻。下,遐嫁翻。〉齊顯祖卽位,夢獼猴坐其御牀,乃盡烹之。趙伯超、謝答仁皆降於侯瑱,瑱幷田遷等送建康。王僧辯斬房世貴於市,送王偉、呂季略、周石珍、嚴亶、趙伯超、伏知命於江陵。

丁巳,湘東王下令解嚴。

 

 

 ⑲. 5월 3일에 사공인 남평왕 소각 등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나아가길 권하였으나 상동왕은 오히려 받아들이지 않고 시중인 풍성후 소태를 파견하여 산릉을 배알하고 다시 종묘와 사직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⑲. 五月,庚午,司空南平王恪等復勸進,復,扶又翻。湘東王猶不受,遣侍中豐城侯泰謁山陵,沈約《志》︰豫章豐城縣,吳立,曰富城,晉武帝更名。《考異》曰︰《梁書》在四月,官爲司空。《太清紀》在此月,官太宰。今從《梁書》。脩復廟社。

 

 11일에 후경의 수급이 강릉에 도착하자 저자에 3일간 효수하였다가 태우고 나서 칠을 하여 무기창고에 넣어 두었다. 13일에 남평왕 소각을 양주 자사로 삼았다. 17일에 왕승변을 사도·진위장군으로 삼고 장녕공에 책봉하였다. 진패선을 정로장군·개부의동삼사로 삼고 장성현후에 책봉하였다.

 戊寅,侯景首至江陵,梟之於市三日,梟,堅堯翻。煑而漆之,以付武庫。庚辰,以南平王恪爲揚州刺史。甲申,以王僧辯爲司徒、鎭衞將軍,封長寧公。鎭衞將軍,梁定二百四十號,其班穹矣。僧辯元功,必封長寧郡公。長寧郡,晉安帝置,屬荊州。陳霸先爲征虜將軍、開府儀同三司,封長城縣侯。賞平侯景之功也。霸先,長城縣人也。杜佑曰︰湖州長城縣,吳王闔閭遣弟夫槩築城,狹而長,晉武帝太康三年置。

 

 18일에 후경이 임명하였던 상서복야 왕위·좌민상서 여개략·소부 주석진·사인 엄단을 저자에서 주살하였다.  조백초·복지명이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사답인은 태종에게 예의를 잃지 않아서 특별히 용서하였다. 왕위는 감옥 안에서 500자로 된 시를 올렸는데 상동왕이 그의 재능을 아껴서 그를 용서해주고 싶었지만 그를 질시하는 어떤 사람이 왕에게 말하였다.

 乙酉,誅侯景所署尚書僕射王偉、左民尚書呂季略、少府周石珍、舍人嚴亶於市。趙伯超、伏知命餓死於獄。以謝答仁不失禮於太宗,特宥之。王偉於獄中上五百言詩,五百言詩,今之五十韻詩也。上,時掌翻。湘東王愛其才,欲宥之;有嫉之者,言於王曰︰

 

 "예전에 왕위가 만들었던 격문은 아주 좋았습니다."

 왕이 그것을 구하여 살피니, 격문에서 말하였다.

 "항우는 겹눈동자였으나 오히려 오강에서 패배한 일이 있었는데, 상동은 눈이 하나(529년 가을에 소역은 에꾸가 된다.)인데 어찌 赤縣(황토가 많은 중국을 지칭함)이 귀부하겠는가!"

 왕은 크게 화를 내고 그의 혀를 기둥에 못질하고 배를 가르고 살을 저며서 죽였다.

 「前日偉作檄文甚佳。」王求而視之,檄云︰「項羽重瞳,尚有烏江之敗;重,直龍翻。湘東一目,寧爲赤縣所歸!」王大怒,釘其舌於柱,釘,丁定翻。剜腹、臠肉而殺之。剜,烏丸翻。王偉,侯景之所取計者也;自圍臺城以至於移梁祚,屠蕭氏以及其臣民,皆偉之謀。帝忘其父子兄弟之讎,乃愛其才而欲宥之,發怒於檄文而後誅之,失刑甚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