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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際可尋:생각의 끝을 알 수 없었다./小雪節 末候閉塞成冬3日(陰10/20)辛巳

solpee 2020. 12. 4. 11:00

《南北朝 梁紀14 武 大同 4 戊午、538)

 

 ⑬. 동위의 태사 고환이 진야에서부터 7천 기병을 거느리고 맹진에 도착하여 아직 건너지 않았을 때, 위의 군사가 이미 숨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드디어 황하를 건너 별장을 파견하여 위의 군사를 추격하여 崤까지 이르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자, 돌아왔다. 고환이 금용을 고역하자, 장손자언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는데, 성 안의 가옥을 불태워 모두 없어졌으며 고환이 금용을 헐어버리고 돌아왔다.

 ⑬. 東魏太師歡自晉陽將七千騎至孟津河南省孟津县东黄河渡口,未濟,聞魏師已遁,遂濟河,遣別將追魏師至崤,魏收志:太和十一年,置崤縣,屬恆農郡,因三崤山以名縣;隋并崤縣入河南熊耳縣。程大昌曰:三崤山,一名嶔崟山。元和志曰:自東崤至西崤三十五里。東崤長阪數里,峻阜絕澗,車不得方軌。西崤全是石阪十二里,險不異東崤。此二崤皆在秦關之東,漢關之西。不及而還。還,從宣翻,又如字;下同。歡攻金墉,長孫子彥棄城走,焚城中室屋俱盡,歡毀金墉而還。

 

 동위가 업으로 천도하면서, 주객낭중 배양지는 낙양에 머물러있었는데, 독고신이 패배하자, 배양지의 동생 배추지가 승상 우문태를 따라 관에 들어가서 대행대 창조낭중이 되었다. 고환이 배양지의 형제 다섯 명을 감옥에 가두니, 배양지가 말하였다.

 東魏之遷鄴也,見一百五十六卷中大通六年。主客郎中裴讓之留洛陽;獨孤信之敗也,謂邙山之敗,信先棄軍西還。讓之弟諏之隨丞相泰入關函谷关,為大行臺倉曹郎中。歡囚讓之兄弟五人,讓之曰:

 

 "옛날 제갈량 형제는 吳·蜀을 섬기면서 각기 그의 마음을 다하였는데, 하물며 저 배양지의 늙은 어머니가 이곳에 사시는데 불충하고 불효한 일은 반드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명공께서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살을 대우하시면 그 역시 마음으로 귀부할 것인데, 만약 시기하게 된다면 패업은 멀어집니다."

 고환이 그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9월에 위의 주군이 장안으로 들어가니, 승상 우문태가 귀환하여 화주에 주둔하였다.

 「昔諸葛亮兄弟,事吳、蜀各盡其心,謂亮事蜀,瑾事吳也。況讓之老母在此,不忠不孝,必不為也。明公推誠待物,物亦歸心;若用猜忌,去霸業遠矣。」歡皆釋之。

九月,魏主元宝炬入長安,丞相泰還屯華州。華,戶化翻。

 

 ⑭. 동위의 대도독 하발인이 형마납·노중례 등을 공격하여 그들을 평정하였다.

 노경유는 본래 유생인데, 태사 고환이 그를 석방시켜 불러다 집에 학관을 세우고 여러 아들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⑭. 東魏大都督賀拔仁擊邢磨納在河间郡,河北省河间市南、盧仲禮在范阳郡,河北省涿州市等,平之。磨納等起兵見上卷上年。

盧景裕本儒生,太師歡釋之,召館於家,使教諸子。

 

 노경유의 강론은 자세하면서도 세밀하니, 힐난하는 사람들은 혹 성내어 꾸짖기도 하고, 큰 소리로 핏대를 올려 말이 불손하기에 이르기도 하였지만, 노경유의 정신과 안색은 근엄하였고 풍채와 어조는 한결같았으며, 조용히 가고 오는 말을 주고 받았으므로 그 생각의 끝을 찾아볼 수 없었다.

 景裕講論精微,難者或相詆訶,大聲厲色,言至不遜,而景裕神采儼然,風調如一,從容往復,難,乃旦翻。詆,丁禮翻。訶,虎何翻。調,徒釣翻。從,千容翻。無際可尋。

 

 성정은 고요하였고, 관직에는 여러 차례 나아가고 물러남이 있었으나 득의하거나 싦낭하는 기색이 없었는데, 헤진 옷과 거친 밥인데도 기뻐하는 모습으로 스스로 편안하였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고 엄숙하여 마치 손님을 대하고 있는 듯 하였다.

 性清靜,歷官屢有進退,無得失之色;弊衣粗食,恬然自安,終日端嚴,如對賓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