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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태의 효무제 짐살/小雪節 末候閉塞成冬2日(陰10/19)庚辰

solpee 2020. 12. 3. 05:30

《南北朝 梁紀12 武 中大通 6 (甲寅、534)

 

 ⑲. 윤12월, 위 효무제가 규문에서 무례하게 굴었는데, 사촌 누이들 가운데 출가하지 않은 사람 3명을 모두 공주로 책봉하였다. 평원공주 원명월은 남양왕 원보거와 친남매이며 황제를 좇아 관에 들어갔고,  승상 우문태가 원씨의 여러 친왕들로 하여금 원명월을 붙잡아서 죽이게 하였더니, 황제가 기뻐하지 아니하여서 어떤 때는 활을 당기기도 하고 다른 어떤 때는 책상을 치기도 하였는데, 이 일로 말미암아 다시 우문태와 더불어 틈이 생기게 되었다.

 ⑲. 魏孝武帝閨門無禮,從妹不嫁者三人,〈從,才用翻。〉皆封公主。平原公主明月,南陽王寶炬之同產也,從帝入關,丞相泰使元氏諸王取明月殺之;帝不悅,或時彎弓,或時椎案,由是復與泰有隙。〈椎,直追翻。復,扶又翻。〉

 

 15일에 황제(元修:25세)가 술을 마셨는데, 짐독을 만나서 죽었다. 우문태는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옹립할 사람을 논의하였는데, 대부분이 광평왕 원찬을 천거하였다. 원찬은 효무제의 조카이다. 시중인 복양왕 원순이 별실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우문태에게 말하였다.

 癸巳,帝飲酒遇酖而殂。〈年二十五。〉泰與羣臣議所立,多舉廣平王贊。贊,孝武之兄子也。侍中濮陽王順,於別室垂涕渭泰曰:

 

 "고환이 돌아가신 황제를 압박하여 축출하고 어린 군주를 세우고서 권력을 오로지하였으니 명공께서 마땅히 그가 행한 짓과는 상반되게 해주시오. 광평은 나이가 너무 어리니, 어른을 군주로 세워서 그를 받드는 것만 못하오."

 「高歡逼逐先帝,立幼主以專權,明公宜反其所爲。廣平沖幼,不如立長君而奉之。」

 

 우문태는 마침내 태재이며 남양왕 원보거(28세)를 받들어 옹립하였다. 원순은 탁발소의 증손자이다. 초당불사에 효무제의 빈소를 마련하였는데, 간의대부 송구가 통곡하며 피를 토하였고, 미음을 먹지 않은 지가 며칠이 지났지만 우문태는 그가 명유이기 때문에 죄를 줄 수가 없었다.

 泰乃奉太宰南陽王寶炬而立之。〈寶炬,孝文帝之孫,京兆王愉之子。長,知兩翻。〉順,素之曾孫也。〈按魏宗室名順者前後凡三人。道武伐中山,順欲於平城自立,此時猶以拓跋爲姓。又,任城王澄之子順叱高肇門者,指元叉妻諫靈后妝飾,斥徐紇,以抗直著,後聞河陰之難,奔走而死。此元順,則常山王素之孫。二人皆已改姓元氏。〉殯孝武帝於草堂佛寺,諫議大夫宋球慟哭嘔血,漿粒不入口者數日,泰以其名儒,不之罪也。

 

 ⑳. 위 하발승이 형주에 있으면서 표문을 올려 무위장군 독고신을 대도독으로 삼게 하였다. 동위에서 이미 형주를 빼앗으니, 위에서는 독고신을 도독삼형주제군사·상서우복야·동남도행대·대도독·형주자사로 삼고서 그들을 불러서 품어주게 하였다.

 ⑳. 魏賀拔勝之在荊州也,表武衞將軍獨孤信爲大都督。東魏旣取荊州,魏以信爲都督三荊州諸軍事、尚書右僕射、東南道行臺、大都督、荊州刺史以招懷之。

 

 만족의 추장 번오능이 석양군을 공격하여 깨뜨리고서 위에 호응하니, 동위의 서형주 자사 신찬이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자, 행대랑중 이광이 간하였다.

 "석양(하남 서협현)은 사면으로 백성이 없고 오직 하나의 성만 있는 땅이며, 산길이 깊고 험준하여 여런 만족이 안팎으로 있습니다. 지금 군사를 적게 파견한다면 적을 제압할 수가 없고, 많이 파견하면 근본이 허약하게 되니, 만약에 여의치 않으면 크게 위엄과 명성이 꺾일 것이며 인심도 한 번 떠나버리면 주의 성을 보존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蠻酋樊五能攻破淅陽郡以應魏,〈酋,慈尤翻。《考異》曰:《北史》作「樊大能」。今從《魏書》。〉東魏西荊州刺史辛纂欲討之,〈據《隋紀》,辛纂時鎭穰城。則西荊州卽荊州,以穰城在東荊州之西,故云。〉行臺郎中李廣諫曰:「淅陽四面無民,唯一城之地,山路深險,表裏羣蠻。今少遣兵,則不能制賊;〈少,詩沼翻。〉多遣,則根本虛弱;脫不如意,大挫威名,人情一去,州城難保。」

 

 신찬이 말하였다.

 "어찌 도적을 내버려두고 토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이광이 말하였다.

 "지금 걱정되는 것은 뱃속에 있는데 어느 겨를에 가려움 병을 치료하겠소? 듣건대 대군이 멀지 않아 응당 도착할 것이라니 공은 다만 소속된 성을 단속하고 챙겨서 보루를 완성하고 백성을 위무하면서 그들을 기다림다면 비록 석양을 상실한다고 하여도 아까워할 거리는 안 됩니다."

 신찬이 좇지 않고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공격하였다가 군사들이 패배하자 제장들이 이어서 도망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纂曰:「豈可縱賊不討!」廣曰:「今所憂在心腹,何暇治疥癬!〈治,直之翻。〉聞臺軍不久應至,〈臺軍,謂東魏所遣軍也。〉公但約勒屬城,使完壘撫民以待之,雖失淅陽,不足惜也。」纂不從,遣兵攻之,兵敗,諸將因亡不返。

 

 성안 백성들이 은밀히 독고신을 불렀다. 독고신이 무도에 도착하자 동위에서는 항농 태수 전팔능이 여러 만족을 인솔하고 석양에서 독고신을 막고, 또한 도독 장재민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3천을 가지고 독고신의 후방으로 출동하게 하였다. 독고신이 그의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城民密召獨孤信。信至武陶,〈「武陶」,疑當作「武關」。〉東魏遣恆農太守田八能〈恆農,卽弘農,後魏避顯祖諱,改弘曰恆,音常。〉帥羣蠻拒信於淅陽,〈帥,讀曰率。〉又遣都督張齊民以步騎三千出信之後。信謂其衆曰:

 

 "지금 사졸들이 1천 명도 채 되지 않은데다 앞두에서 적을 맞고 있으니 만약 돌아가서 장재민을 공격한다면 토착민들이 반드시 내가 패퇴하여 도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반드시 다투어 와서 우리를 요격할 것인데, 나아가 전팔능을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여 장제민 스스로가 궤멸되게 하는 것만 못하다."

 「今士卒不滿千人,首尾受敵,〈謂田八能拒其前,張齊民出其後也。〉若還擊齊民,則土民必謂我退走,〈土民,謂淅陽之民。〉必爭來邀我;不如進擊八能,破之,齊民自潰矣。」

 

 드디어 전팔능을 쳐서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고 양성을 습격하였는데, 신찬이 군사를 챙겨서 싸우러 나가 싸우고 대패하고 회군하여 성으로 향하엿다. 문이 아직 닫히지 않앗는데, 독고신이 도독 무천 사람 양충으로 하여금 선봉에 서도록 하자, 양충은 문지기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대군이 이미 도착하였고, 성 안의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으니, 너희들이 목숨을 구하려면 어찌 피하여 도주하지 않느냐?"

 문지기들이 모두 흩어졌다.

 遂擊破八能,乘勝襲穰城;辛纂勒兵出戰,大敗,還趣城。門未及闔,〈戰敗奔還,門者惶遽未及下關也。趣,七喻翻。〉信令都督武川楊忠爲前驅,〈楊忠,隋文帝之父也。隋氏自以爲出於華陰楊震,而忠則出居武川。隋氏序其世曰:「本弘農華陰之楊,漢太尉震十四世至文帝。震八世孫北平太守鉉,鉉子元壽,魏初爲武川鎭司馬,因家於神武樹頹縣。元壽生惠嘏,嘏生烈,烈生禎,禎生忠。」〉忠叱門者曰:「大軍已至,城中有應,爾等求生,何不避走!」門者皆散。

 

 양충이 무리를 인솔하고 성에 들어가 신찬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니 성안의 백성들이 떨면서 복종하였다. 독고신이 군사를 나누어 세 형주를 평정하였다. 거주한 지 반 년 동안에 동위의 고오조·후경이 군사를 이끌고 성 아래에 도착하니, 독고신은 군사의 수가 적어서 대적하지 못하고 양충과 더불어 도망하여 왔다.

 忠帥衆入城,斬纂以徇,城中懾服。〈懾,之涉翻。〉信分兵定三荊。居半歲,東魏高敖曹、侯景將兵奄至城下,信兵少不敵,與楊忠皆來奔。〈爲賀拔勝與信、忠還魏張本。將,卽亮翻。少,詩沼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