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銷禍於未萌,制勝於無形(재앙이 싹 트기 전에 없애고, 형성되기 전에 승세를 잡는 것)/立冬節 中候地始凍初日(陰9/27)己未

solpee 2020. 11. 12. 03:25

《南北朝 梁紀6 武 普通 5 (甲辰, 524秊)

 

 ②. 3월에 위에서는 임회왕 원욱을 도독북토제군사로 하여 파릉한발릉을 토벌하게 하였다.

 ②. 三月,魏以臨淮王彧都督北討諸軍事,討破六韓拔陵。〈拔陵反見上卷上年。〉

 

 여름, 4월에 고평진의 백성인 혁련은 등이 반란을 일으켜 칙륵의 추장 호침을 추대하여 고평왕으로 삼고, 고평진을 공굑하여 파륙한발릉에게 호응하였다. 위의 장수 노조천이 그를 공격하여 격파하자, 호침이 북쪽으로 도주하였다.

 夏,四月,高平〈宁夏固原县〉鎮民赫連恩等反,推敕勒酋長胡琛為高平王,〈酋,慈秋翻。長,知兩翻。〉攻高平鎮以應拔陵。魏將盧祖遷擊破之,琛北走。〈將,即亮翻。〉

 

 위가고가 회삭진을 공격하여 해를 넘겼는데도 외부에서 구원병이 이르지 않자, 양균이 하발승으로 하여금 임회왕 원욱에게 가서 위급함을 보고하게 하였다. 하발승이 감히 죽기를 각오한 젊은이 10여 기를 모집하여 밥에 틈을 엿보다가 포위를 무너뜨리고 나오자 도적의 기병이 그들을 추겨하여 따라 잡으니 하발승이 말하였다.

 "나는 하발파호이다."

 衛可孤攻懷朔鎮〈内蒙古固阳县〉經年,外援不至,楊鈞使賀拔勝詣臨淮王彧告急。勝募敢死少年十餘騎,夜伺隙潰圍出,賊騎追及之,勝曰:「我賀拔破胡也。」〈少,詩照翻。騎,奇寄翻。伺,相吏翻。賀拔勝,字破胡。〉

 

 도적이 감히 압박하지 못하였다., 하발승이 운중에서 원욱을 만나자, 그에게 유세하였다.

 "회삭이 포위를 당해 아침저녁으로 함락되게 되어 있는데, 대왕께서는 지금 군사를 주둔시키고는 전진시키지 않고 있으니, 회삭이 만약 함락되면 무천 역시 위험하고 도적의 날카로운 기새는 100배나 될 것이어서, 비록 장량과 진평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왕의 계획대로될 수는 없을 것이오!"

 원욱이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허락하였다.

 賊不敢逼。勝見彧於雲中〈盛乐•内蒙古和林格尔县〉,〈考異曰:勝傳云:「至朔州見彧。」按後魏地理志,雲中,舊名朔州;及改懷朔鎮為朔州,不容更以雲中為朔州;今但云雲中。按魏氏初都平城,北邊列置諸鎮,孝昌以後改鎮為州,尋即荒廢,其地漫不可考。杜佑以為魏都平城,於郡北三百餘里置懷朔鎮;又云:遷洛之後,於郡北三百餘里置朔州;又云:後魏初,雲中在郡北三百餘里,定襄故城北。夫其曰皆在郡北三百餘里,將是一處邪,將是三處邪?宋白曰:朔州馬邑郡,東北至故雲中二百六十里,後魏為畿內之地,亦曾為懷朔鎮;孝文遷洛之後,於州北三百八十里定襄故城置朔州。又曰:後魏初,雲中定襄故城是。則是朔州與後魏初雲中共一處。通鑑此後書改懷朔鎮為朔州,更命朔州為雲州,此即魏志所謂雲中舊名朔州之證也。是則懷朔鎮與雲中是兩處矣。是後,李崇自崔暹白道之敗,引還雲中,後又自雲中引還平城,其退師道里先後可見,而唐之雲中郡乃魏之平城。詳而考之,歷代建置州郡,其名淆雜,難指一處為定也。〉說之曰:「懷朔被圍,旦夕淪陷,大王今頓兵不進;懷朔若陷,則武川〈内蒙古武川县〉亦危,賊之銳氣百倍,雖有良、平,不能為大王計矣。」彧許為出師。

 

 하발승의 돌아와서는 다시 포위망을 뚫고 들어갔다. 양균은 다시 하발승을 파견하여 나가서 무천을 엿보게 하였는데, 무천은 이미 함락되었다. 하발승은 말을 달려 돌아왔지만 회삭 또한 궤멸되어 하발승의 부자는 함께 위가고에게 포로가 되었다.

 勝還,復突圍而入。鈞復遣勝出覘武川,〈說,式芮翻。許為。于偽翻。復,扶又翻;下聊復同。覘,丑廉翻,又丑艷翻。〉武川已陷。勝馳還,懷朔亦潰,勝父子俱為可孤所虜。

 

 5월에, 임회왕 원욱이 파륙한발릉과 오원에서 싸웠는데, 군사들이 패배하자 원욱은 연좌되어 관직과 작위를 삭탈 당하였다. 안북장군인 농서 사람 이숙인도 또한 백도에서 패배하였으므로 도적의 기세가 날로 강성해졌다.

 五月,臨淮王彧與破六韓拔陵戰於五原〈内蒙古包头市〉,〈五原,即漢五原郡地。魏收志,朔州治五原。杜佑曰:魏置朔州於懷朔鎮,在唐朔州馬邑郡北三百餘里;今榆林九原即漢之五原郡地。蓋漢之五原,壤地甚廣,唐之豐、勝、朔三州,皆漢之五原郡地。魏收志,朔州附化郡有五原縣;彧與拔陵當戰于此。〉兵敗,彧坐削除官爵。安北將軍隴西〈甘肃省陇西县〉李叔仁又敗於白道〈内蒙古呼和浩特市北〉,〈武川鎮北有白道谷,谷口有白道城,自城北出有高阪,謂之白道嶺。〉賊勢日盛。

 

 위황이 승상·령·복·상서·시중·황문을 현양전으로 불러들여 그들에게 물었다.

 "지금 도적이 恒州·朔州를 걸쳐 있고 金陵에 가까이 압박하고 있으니, 계책은 장차 어떻게 내겠소?"

 이부상서 원수의가 중신들을 파견하여 군사를 독려하여 항주·삭주를 진수하여 도적을 막게 할 것을 요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魏主引丞相、令、僕、尚書、侍中、黃門於顯陽殿,問之曰:「今寇連恆〈府设平城【山西省大同市】〉、朔〈府设盛乐【内蒙古和林格尔县】〉,逼近金陵〈内蒙古和林格尔县西北〉,〈魏未遷洛以前,諸帝皆葬雲中之金陵。恆,戶登翻。近,其靳翻。〉計將安出?」吏部尚書元脩義請遣重臣督軍鎮恆、朔以捍寇,帝曰:

 

 "지난해에 옥구려아나괴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숭을 파견하여 북쪽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이숭이 표문을 올려 鎭을 고쳐서 州로 삼아주기를 요구하였지만 짐은 옛날의 제도를 가지고서 변혁하기가 어렵다고 하여 그 요청을 좇지 않았소. 얼마 안 되어 이숭의 이 표문은 진호들이 바라지 않던 마음을 열게 하여 금일의 우환이 있게 하였는데, 다만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키기가 어려우니 다시 대략을 논의할 뿐이오. 그러나 이숭은 귀척인데다가 신망이 두텁고 재간과 식견도 영민하니, 이숭을 파견하여 출정시키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去歲阿那瓌叛亂,遣李崇北征,崇上表求改鎮為州,朕以舊章難革,不從其請。尋崇此表,開鎮戶非冀之心,致有今日之患;但既往難追,聊復略論耳。然崇貴戚重望,〈李崇,文成皇后兄誕之子,歷方面,有時望。〉器識英敏,意欲遣崇行,何如?」

 

 복야 소보인 등이 모두 말하였다.

 "이와 같이 한다면 실제로 여러 신하들의 바람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이숭이 말하였다.

 "신은 6鎭이 멀고 치우쳐 있는 벽지인데다 오랑캐들과 아주 가까이 있어서 저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려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그들을 유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겠습니까? 신의 죄는 죽음에 처해져야 마땅하나 폐하께서 그 죄를 용서해주셨는데, 지금 다시 신을 파견하여 북쪽으로 가게 해주신다면 바로 은혜를 갚고 허물을 고치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다만 신의 나이가 70세이며 그 위에 피로와 병까지 겹쳐서 군려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사오니, 바라건대 현명한 재목을 다시 선택해 주십시오."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원수의는 탁발천사의 아들이다.

 僕射蕭寶寅等皆曰:「如此,實合群望。」崇曰:「臣以六鎮遐僻,密邇寇戎,〈杜佑曰:六鎮並在今馬邑、雲中、單于界。〉欲以慰悅彼心,豈敢導之為亂!臣罪當就死,陛下赦之;今更遣臣北行,正是報恩改過之秋。但臣年七十,加之疲病,不堪軍旅,願更擇賢材。」帝不許。脩義,天賜之子也。〈天賜見一百三十三卷宋明帝泰始七年。〉

 

 사마광이 말하였다.

 "이숭의 표문은 마침내 재앙이 아직 싹 트기 전에 그것을 없애려는 것이었으며, 형성되기도 전에 승세를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위 숙종은 이미 채택할 수 없었는데 난이 발생하기에 이르러서도 일찍이 부끄러워하거나 사과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가 마침내 다시 이숭의 죄라고 생각하였으니, 저 밝지 못한 군주가 어찌 더불어 모의할 만하겠습니까?

 臣光曰:李崇之表,乃所以銷禍於未萌,制勝於無形。魏肅宗既不能用,及亂生之後,曾無愧謝之言,乃更以為崇罪,彼不明之君,烏可與謀哉!

 

《시》에서 이르기를, '말을 들으면 옳고 말을 외우면 술취한 듯한데, 그 좋은 것을 채용하지 않고 도리어 나로 하여금 패역하게 하였도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이러한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詩云:「聽言則對,誦言如醉,匪用其良,覆俾我悖,」〈詩桑柔之辭也。註云:見道聽之言則應答之,見誦詩、書之言則冥臥如醉,不能用善,反使我為悖逆之行。〉其是之謂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