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減膳錄囚,乃陛下之事(음식을 줄이고 죄수들의 정상을 살피는 일은 임금의 일)/立冬節 初候水始氷5日(陰9/26)戊午

solpee 2020. 11. 11. 04:52

《南北朝 梁紀3 武 天監 11 (壬辰, 512)

 

 ③. 봄, 정월, 25일에 위는 거기대장군·상서령인 고조를 사도로 삼고, 청하왕 원역을 사공으로 삼고, 광평왕 원회를 표기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의동삼사를 더하여 주었다. 고조는 비록 삼사에 올랐지만 오히려 자신이 요직을 떠났기 때문에 언사와 얼굴색에서 불평의 모습을 나타내니, 그를 보는 사람마다 그를 비웃었다.

 ③. 春,正月,丙辰,魏以車騎大將軍、尚書令高肇爲司徒,清河王懌爲司空,廣平王懷進號驃騎大將軍,加儀同三司。肇雖登三司,猶自以去要任,怏怏形於言色,〈要任,謂尚書令。怏,於兩翻。〉 見者嗤之。〈嗤,丑之翻。〉

 

 상서우승 고작·국자박사 봉궤는 평소에 직언하는 것을 자기 일로 삼았는데, 고조가 사도가 되기에 이르자, 고작이 영접하여 전송하러 왕래하였으나 봉궤는 끝내 고조에게 가지 않았다. 고작은 둘러보고 봉궤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급히 돌아가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나는 평생 동안 규구를 잃지 않겠다고 생각하였지만, 오늘 행동거지는 아주 봉생만 못하구나!"

 고작은 고윤의 손자이며, 봉궤는 봉의의 집안 손자이다.

 尚書右丞高綽、國子博士封軌,素以方直自業,〈業,事也。以方直爲事,所謂強作之也,作之不已,乃成君子。〉 及肇爲司徒,綽送迎往來,軌竟不詣肇。綽顧不見軌,乃遽歸,歎曰:「吾平生自謂不失規矩,今日舉措,不如封生遠矣。」綽,允之孫;軌,懿之族孫也。〈高允事魏世祖以下四朝。封懿去燕歸魏,以疏慢見黜。〉

 

 청하왕 원역은 재주와 학식이 있어서 촉망을 받고 있었으나, 팽성왕의 화(팽성왕 원협은 황후 고씨 책봉 문제로 고조와 사이가 벌어져서 507년 9월에 고조에게 피살됨)를 거울로 삼고 이어서 모시고 연회에 참석하여 고조에게 말하였다.

 "천자의 형제들은 어찌 몇 사람만 남았습니까? 그들을 잘라버려 거의 없애십시오. 옛날에 왕망은 대머리(예리함이 부족한 왕망을 풍자)였으나, 위양(시경 진풍 위양편에 '내가 외삼촌을 배웅하여 위양에 도착하였다'에 유래 외삼촌 지칭)의 밑천을 빙자하여 마침내 한 황실을 찬탈하였습니다. 이제 그대가 몸을 굽히니(요직에서 물러남) 역시 끝내 반란의 단계를 이룰까 두렵습니다."

 清河王懌有才學聞望,懲彭城之禍,〈謂彭城王勰無罪見殺也。聞,音問。〉 因侍宴,謂肇曰:「天子兄弟詎有幾人,而翦之幾盡!〈謂又殺京兆王愉也。之幾,居依翻。〉 昔王莽頭禿,藉渭陽之資,遂篡漢室。〈事見《漢紀》。〉 今君身曲,亦恐終成亂階。」

 

 마침 크게 가뭄이 들자, 고조가 멋대로 죄수들의 정상을 살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였다. 원역이 위의 주군에게 말하였다.

 "옛날에 계씨가 태산에서  여제를 지내자, 공자께서 그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진실로 임금과 신하의 분별을 가지고 의당 조그마한 것도 막고 조금씩 스며드는 것도 막아서 모독할 수 없게 해야합니다. 음식을 줄이고 죄수들의 정상을 살피는 일은 폐하의 일이니, 지금 사도가 이를 시행한다면 어찌 신하된 자의 의리라 할 것입니까? 밝은 군주가 위에서 이것을 잃고, 간악한 신하가 아래에서 이를 훔친다면, 화란의 기틀은 여기에 있습니다."

 황제는 웃고 대응하지 않았다.

 會大旱,肇擅錄囚徒,欲以收衆心。懌言於魏主曰:「昔季氏旅於泰山,孔子疾之。〈朱元晦曰:旅,祭名也。《禮》,諸侯祭封內山川。季氏祭之,僭也。〉 誠以君臣之分,〈分,扶問翻。〉 宜防微杜漸,不可瀆也。減膳錄囚,乃陛下之事;今司徒行之,豈人臣之義乎!明君失之於上,姦臣竊之於下,禍亂之基,於此在矣。」帝笑而不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