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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戚之端,自斯而啓,年之不之,不亦宜乎!/庚子立冬節初候水始氷2日(陰9/23)乙卯

solpee 2020. 11. 8. 05:01

《南北朝 梁紀2 武 天監 4 (乙酉, 505)

 

 ⑩. 관군장군 공릉 등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심항을 지키고, 노방달은 남안을 지키며, 임승포 등은 석동을 지키면서 위를 막았다. 형만은 통군인 왕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공격하였는데 이르는 곳마다 모두 승리하여 마침내 검각에 들어갔다.

 ⑩. 冠軍將軍孔陵等將兵二萬戍深杭,冠,古玩翻。將,卽亮翻。《考異》曰:《梁‧鄧元起傳》,「魏將王景胤、孔陵寇東、西晉壽,並遣告急。」按《魏‧邢巒傳》曰,「蕭衍晉壽太守王景胤據石亭」;又曰,「蕭衍遣其將軍孔陵等據深杭」。然則景胤、陵皆梁將也,《元起傳》誤。魯方達戍南安,《五代志》:始州普安縣,舊曰南安。始州,唐之劍州。任僧褒等戍石同,以拒魏。任,音壬。邢巒遣統軍王足將兵擊之,所至皆捷,遂入劍閣。

 

 공릉 등이 물러나 재동을 지켰으나 왕족이 또 진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양주에 속한 14개 군(22개 군 중의 14개군)의 땅은 동서로 700리이고 남북으로 천리인데 모두 위로 돌아갔다.

 陵等退保梓潼,足又進擊,破之。梁州十四郡地,東西七百里,南北千里,皆入于魏。蕭子顯《齊志》,梁州注籍者二十二郡,荒郡不預焉;今魏取十四郡。

 

 애초에, 익주 자사 등원기가 어머니가 노쇠한 것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조서를 내려서 징소하여 우위장군으로 삼고, 서창후 소연조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소연조는 소의의 아들이다. 하후도천이 배반하였을 때에 윤천보가 말을 달려 등원기에게 알렸다. 위가 진수를 노략질하자 왕경융 등이 모두 사람을 보내어 위급함을 알렸더니, 무리가 등원기에게 급히 구원할 것을 권하자, 등원기가 말하였다.

 初,益州刺史【章:十二行本「史」下有「當陽侯」三字;乙十一行本同;張校同;退齋校同。】鄧元起以母老乞歸,詔徵爲右衞將軍,以西昌侯淵藻代之。淵藻,懿之子也。懿死於東昏之手。夏侯道遷之叛也,尹天寶馳使報元起。使,疏吏翻。及魏寇晉壽,王景胤等並遣告急,衆勸元起急救之,元起曰:

 

 "조정은 1만 리나 떨어져 잇으니 군대는 불쑥 도착하지 않을 것이며, 만약 구적이 침입하여 심해지면 바야흐로 반드시 쳐서 토벌해야만 하는데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내가 아니면 누가 하라고 어찌하여 경솔하게 그를 구원하라 하는가!"

 「朝廷萬里,軍不猝至,若寇賊侵淫,侵淫,以癰疽爲喻,侵毒好肉爲淫肉。方須撲討,董督之任,非我而誰,何事怱怱救之!」史言鄧元起乞歸非由衷之請。撲,普木翻。

 

 조서를 내려서 등원기를 임시로 도독정토제군사로 하였으며 한중을 구원하게 하엿으나 진수는 이미 함락되었다. 소연조가 곧 도착하려고 하자 등원기의 군영에서는 돌아가려고 행장을 수습하였는데 저장된 양식과 기계를 남김없이 거두었다. 소연조가 성 안에 들어와서 그를 원망하였고, 또 그의 좋은 말을 요구하자, 등원기가 말하였다.

 詔假元起都督征討諸軍事,救漢中,而晉壽已陷。蕭淵藻將至,元起營還裝,糧儲器械,取之無遺。淵藻入城,恨之;又求其良馬,元起曰:

 

 "나이 어린 낭자가 말을 어디에 쓰려고!"

 소연조는 성이 나서 술 취한 틈을 타서 그를 죽였다. 등원기의 부하들이 성을 둘러싸고 곡을 하며 또 연고를 물으니, 소연조가 말하였다.

 "천자의 조칙이 있었다."

 무리가 마침내 흩어졌다. 드디어 모반한 것으로 무고하자 황상이 의심하였다. 등원기의 옛 관리였던 광한 사람 나연이 궁궐에 가서 그 사실을 하소연하니, 황상이 말하였다.

 "과연 내가 헤아린 대로다."

 「年少郎子,何用馬爲!」淵藻恚,因醉,殺之。元起養寇自資,而卒不免於死,雖淵藻以私忿殺之,亦不爲無罪也。少,詩照翻。恚,於避翻。元起麾下圍城,哭,且問故,淵藻曰:「天子有詔。」衆乃散。遂誣以反,上疑焉。元起故吏廣漢羅研詣闕訟之,上曰:「果如我所量也。」

 

 사신을 보내어 소연조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등원기는 너를 위하여 복수하였는데, 너는 원수를 위하여 원수를 갚으니, 충효의 도리가 어떤 것이냐?"

 마침내 소연조의 호칭을 깍아내려서 관군장군으로 삼고 등원기에게 정서장군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를 충후라고 하였다.

 使讓淵藻曰:「元起爲汝報讎,謂協力誅東昏,報其父讎也。量,音良。爲,于僞翻;下同。汝爲讎報讎,忠孝之道如何!」乃貶淵藻號爲冠軍將軍,冠,古玩翻。《考異》曰:《梁書‧元起傳》:「藻以粮儲無遺,甚怨望之,因表元起逗留不憂軍事,收付州獄,自縊死。」按若止以逗留表元起,安敢擅收前刺史付獄殺之!必誣以反也。今從《南史》。又《梁書》,藻本以冠軍爲益州刺史,與《南史》異。贈元起征西將軍,諡曰忠侯。

 

 이연수가 평론하였다.

 "등원기는 근면하여 마침내 위아래가 화목하였고, 공적은 오직 영토를 새로 얻은 것이나(익주 양주의 개척), 수고하고 일을 도모하려하지 않았으니(상을 받지 않았다) 화란의 기회가 먼저 함정에 빠뜨렸다. 관군장군으로 폄하한 것은 형벌로는 이미 가벼운 것이니 양의 정치와 형벌은 이에 실종되었다.

 친척을 사사로이 하는 단서는 이것으로부터 열렸으니, 수명이 길지 않은 것 역시 마땅하지 않은가?

李延壽論曰:元起勤乃胥附,毛萇曰:幸下親上曰胥附。功惟闢土,謂開梁、益之土也。勞之不圖,禍機先陷。冠軍之貶,於罰已輕,梁之政刑,於斯爲失私戚之端,自斯而啓,年之不之,不亦宜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