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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兵射永,洞其左股,永拔箭復入。부영은 화살이 왼쪽 다리에 맞았으나 이를 뽑고 다시 전투에 뛰어들었다./庚子立冬節(08:14)初候水始氷2日(陰9/23)乙卯

solpee 2020. 11. 8. 04:22

《南北朝 梁紀1 武 天監 3 (甲申, 504)

 

 ⑬. 위인들은 채도공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양을 더욱 급하게 공격하고 짧은 무기로 매일 접전하였다. 조경종은 착현에 머무르고서 전진하지 않고 다만 무기를 번득이며 사냥놀이를 할 뿐이었다. 황상은 다시 영삭장군 마선불을 투입하여 의양을 구원하도록 하였는데, 마산불이 돌아다니며 싸우면서 전진하니 병사의 위세가 날로 날카로워졌다.

 ⑬. 魏人聞蔡道恭卒,攻義陽益急,短兵日接。曹景宗頓鑿峴不進,但耀兵遊獵而已。上復遣寧朔將軍馬仙琕救義陽,復,扶又翻;下箭復、琕復、乃復同。琕,部田翻。仙琕轉戰而前,兵勢甚銳。

 

 원영은 상아산에 보루를 만들고 제장들에게 명령하여 사방의 산에 숨도록 하여서 약함을 보이도록 하였다. 마선불이 이긴 기세를 타고서 곧바로 와서 길게 포위하고 원영의 군영을 엄습하니 원영이 거짓으로 패배하여 그들을 유인하여 평지에 다다르자 병사를 풀어서 그를 공격하였다.

 元英結壘於上雅山,「上雅山」當作「士雅山」。【章:十二行本「上」正作「士」;乙十一行本同;孔本同,惟「雅」作「稚」;張校同;熊校同。】據《水經註》,義陽之東有大木山,卽晉祖逖將家避難所居也。逖字士雅,後人因以之名山。杜佑曰:唐州桐柏縣有大木山,晉祖逖爲豫州刺史,藏家屬於此山。分命諸將伏於四山,示之以弱。仙琕乘勝直抵長圍,掩英營;英僞北以誘之,誘,音酉。至平地,縱兵擊之。

 

 통군인 부영이 갑옷을 들쳐 입고 창을 잡고서 단기로 먼저 들어가니 오직 군주 채삼호가 그를 도와서 진영을 뚫고 가로로 지나갔다. 양의 군사가 부영을 쏘아서 부영의 왼쪽 다리에 관통하였으나 부영은 화살을 뽑고서 다시 들어갔다. 마선불은 대패하였는데, 아들 하나가 전사하였으며, 물러나 달아났다.

 統軍傅永擐甲執槊,單騎先入,將,卽亮翻;下同。擐,音宦。槊,色角翻。唯軍主蔡三虎副之,突陳橫過。梁兵射永,洞其左股,陳,讀曰陣。射,而亦翻。永拔箭復入。仙琕大敗,一子戰死,仙琕退走。

 

 원영이 부영에게 말하였다.

 "공은 다쳤으니 본영으로 돌아가라."

 부영이 말하였다.

 "예전에 한 고조는 다리를 움켜잡고서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았는데, 하관은 비록 미약하나 국가의 한 장수인데 어찌 적으로 하여금 장수를 해쳤다는 명분을 갖도록 하겠습니까?"

 마침내 제군과 더불어 그들을 쫓았으며 밤을 새우고서 돌아왔다. 이때의 나이가 70여 세였으며, 군대 내에서는 그를 장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英謂永曰:「公傷矣,且還營。」永曰:「昔漢高捫足不欲人知,事見十卷漢高祖四年。下官雖微,國家一將,柰何使賊有傷將之名!」將,卽亮翻。遂與諸軍追之,盡夜而返;時年七十餘矣,軍中莫不壯之。

 

 마선불은 다시 1만여 명을 인솔하고 앞으로 나아가서 원영을 공격하였으나 원영이 또 그를 격파하고 장군 진수지를 죽였다. 마선불은 위급하다는 것을 알고서 정예의 병사들을 다하여 결전하였는데, 하루에 세 번 교전하였으나 모두 대패하고서 돌아갔다. 채령은은 형세가 막히자 8월 11일에 위에 항복하였다. 삼관의 수장은 그 소식을 듣고서 17일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仙琕復帥萬餘人進擊英,帥,讀曰率。英又破之,殺將軍陳秀之。仙琕知義陽危急,盡銳決戰,一日三交,皆大敗而返。馬仙琕力戰,使曹景宗以大軍繼之,魏必敗退,義陽全矣。蔡靈恩勢窮,八月,乙酉,降於魏。降,戶江翻。三關戍將聞之,辛酉,亦棄城走。乙酉距辛酉三十六日,太遠,或者其辛卯歟!

 

 원영이 사마 육회도로 하여금 露版(노판 또는 露布로 승전을 알리기 위한 깃발 등을 장대에 걸어놓는 것)을 만들도록 하였지만 그것이 정치하지 않은 것을 싫어하여서 부영에게 명령하여 고치도록 하였는데, 부영은 문채를 덧붙이지 않고 바로 군사 조치한 형상을 썼을 뿐이었으나 원영은 깊이 칭찬하며 말하였다.

 "이것을 보고 계산해보니 금성탕지라도 지킬 수 없다."

 英使司馬陸希道爲露版,嫌其不精,命傅永改之;永不增文彩,直爲之陳列軍事處置形要而已,爲,于僞翻。處,昌呂翻。英深賞之,曰:「觀此經算,雖有金城湯池,不能失矣。」史言英伐其功,故深賞傅永能爲之陳列。

 

 애초에, 남안혜왕이 목태의 모략에 간여하였던 까닭에 관작과 봉읍을 나중에 빼앗겼는데, 원영이 의양에서 이기게 되자 마침내 원영을 세워서 중산왕으로 삼았다.

 어사중승 임방이 조경종을 탄핵하는 상주를 올렸으나 황제는 그가 공신이기 때문에 묵혀두고 처리하지 않았다.

 初,南安惠王以預穆泰之謀,追奪爵邑,穆泰事見一百四十卷齊明帝建武三年。及英克義陽,乃復立英爲中山王。

御史中丞任昉奏彈曹景宗,上以其功臣,寢而不治。任,音壬。昉,甫兩翻。彈,徒丹翻。治,直之翻。

 

 ⑭. 위위 정소숙은 황상을 섬기는데 충성스러웠으며 밖에서 듣고 안 것은 터럭만큼도 숨기는 것이 없었다. 매번 황상을 위하여 일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좋은 것이면 공로를 황상에게 밀쳐놓고, 좋지 않은 허물을 자기에게 돌리니, 황상은 이 때문에 그를 가까이 하였다.

 ⑭. 衞尉鄭紹叔忠於事上,外所聞知,纖豪無隱。每爲上言事,爲,于僞翻。善則推功於上,不善則引咎歸己,上以是親之。

 

 남의양에 조서를 내려서 사주를 설치하고 진은 관남으로 옮기며 정소숙을 자사로 삼도록 하였다. 정소숙은 성과 햬자를 건축하고 기계를 수리하며 전지를 넓히고 곡식을 쌓으며 흩어지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불러모으니, 백성들은 이를 편안하게 생각하였다.

 詔於南義陽置司州,移鎭關南,以紹叔爲刺史。南義陽治鹿城關,隋爲黃州木蘭縣,唐併木蘭入黃岡縣。紹叔立城隍,繕器械,廣田積穀,招集流散,百姓安之

 

 위는 영주를 의양에 설치하고 사마열을 자사로 삼았다. 황상은 마선불을 파견하여 죽돈과 미양 두 성을 삼관의 남쪽에 쌓게 하였으나, 사마열이 군사를 파견하여 죽돈을 점령하였다.

 魏置郢州於義陽,以司馬悅爲刺史。魏收《地形志》,郢州領安陽、城陽、汝南郡。上遣馬仙琕築竹敦、麻陽二城於三關南、麻陽卽今黃州麻城縣地。《考異》曰:《司馬悅傳》作「豫州刺史馬仙琕」,按仙琕於時未爲豫州也。司馬悅遣兵攻竹敦,拔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