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苟患失之,無所不至[gǒu huàn shī zhī wú suǒ bù zhì]진실로 그것을 잃을까 걱정한다면 이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霜降節初候豺乃祭獸3日(陰9/9)辛丑

solpee 2020. 10. 25. 09:44

《南北朝 齊紀5 明 建武 元年》〈甲戌, 494年

 

 ⑫. 2월, 27일에 위황제가 북방을 순행하였는데, 28일에 황하를 건넜고, 3월 27일에 평성에 도착하였다.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다시 천도에 따른 이익과 손해를 논화도록 하니, 각기 그들의 뜻을 말하였다. 燕州(昌平;북경 서부) 자사 목비가 말하였다.

 ⑫. 2月, 壬寅,魏主北巡;癸卯,濟河;三月,壬申,至平城。《考異》曰︰《魏‧帝紀》作閏月。按魏閏二月,齊曆之三月也。使羣臣更論遷都利害,各言其志。燕州刺史穆羆曰︰魏營洛,以洛爲司州,改平城之司州爲恆州,分恆州東部置燕州,治昌平。

 

 "지금 사방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므로 의당 천도해서는 안 됩니다. 또 정벌하려고 해도 말이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황제가 말하였다.

 "마구간과 목장이 代(하북 蔚縣)에 있는데 어떻게 말이 없게 될 것을 걱정하는가? 지금 代는 恆산의 북쪽과 九州의 밖(울현과 당시 요하였던 영정하 동북지역은 九州의 밖이었다는 것)에 있으므로 제왕의 도읍지가 아니다."

 「今四方未定,未宜遷都。且征伐無馬,將何以克?」帝曰︰「廐牧在代,何患無馬!今代在恆山之北,九州之外,非帝王之都也。」恆,戶登翻。

 

 상서 우과가 말하였다.

 "신은 代는 伊水·洛水의 아름다움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선황 이래로 오랫동안 여기에 거주하였고, 백성들이 여기를 편안하게 여기는데, 하루아침에 남쪽으로 옮긴다면 무리들의 마음이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평양공 탁발비가 말하였다.

 "수도를 옮기는 것은 큰일이니, 마땅히 그것은 점을 쳐서 물어야할 것입니다."

 尚書于果曰︰「臣非以代地爲勝伊、洛之美也。但自先帝以來,久居於此,百姓安之;一旦南遷,衆情不樂。」樂,音洛。平陽公丕曰︰「遷都大事,當訊之卜筮。」

 

 황제가 말하였다.

 "옛날에 周公·召公은 성현이기에 마침내 거주할 곳을 점칠 수 있었다. 지금은 그에 알맞은 사람이 없는데, 점을 쳐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점이란 의심나는 일을 결정하는 것이지만 의심할 것이 없는데 무엇을 하려고 점을 치려고 하는가?" 黃帝가 점을 치니 龜焦였지만, 天老가 '吉하다.'고 말하니, 황제가 그것에 따랐다. 그러므로 지극한 사람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알려고 하면 거북의 등에 물어보는 것이 보다 잘 보는 것이다.

 帝曰︰「昔周、召聖賢,乃能卜宅。《書‧洛誥》曰︰召公旣相宅,周公往營成周。傅來告卜曰︰「我卜河朔黎水,我又卜澗水東、瀍水西,惟洛食。我又卜瀍水東,亦惟洛食。」今無其人,卜之何益!且『卜以決疑,不疑何卜!」《左傳》載鬬廉之言。黃帝卜而龜焦,天老曰『吉』,黃帝從之。杜預曰︰龜焦,兆不成也。字書釋灼龜不兆爲焦。然則至人之知未然,審於龜矣。

 

 제왕이 된 사람은 사해를 집으로 삼으니 혹은 남쪽에 거주하고, 혹은 북쪽에 거주하는데, 어찌 항상 거주하는 곳이 있겠는가? 짐의 먼 조상들은 대대로 북쪽 황야에 살았다. 평문황제가 처음으로 동목근산에 도읍을 세웠다. 소성황제는 다시 성락을 경영하였으며, 도무황제는 평성으로 옮겼다. 짐이 다행히 殘勝(선인을 교화하여 악업을 못하게 하는 것)하는 운수를 만낫는데도, 홀로 천도할 수 없겠는가?"

 王者以四海爲家,或南或北,何常之有!朕之遠祖,世居北荒。平文皇帝始都東木根山。拓拔鬱律諡平文皇帝。晉明帝大寧二年,《通鑑》書「惠帝賀傉徙居東木根山」。昭成皇帝更營盛樂,拓跋什翼犍諡昭成皇帝。《通鑑》晉成帝咸康元年,烈帝翳槐城盛樂。次年,昭成嗣國,咸康七年,築盛樂新城。更,工衡翻。道武皇帝遷于平城。晉安帝隆安二年,道武帝遷都平城。朕幸屬勝殘之運,《論語》,孔子曰︰善人爲邦百年,亦可以勝殘去殺矣。朱元晦曰︰勝殘,謂化善人不爲惡也。屬,之欲翻,會也。勝,音升。而獨【章︰十二行本作「何爲獨」三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不得遷乎!」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을 못하였다. 목비는 목수의 손자이고, 우과는 우열의 아우이다. 28일에 조당에 나가서 어느 부서는 옮기고, 어느 부서는 남게 된다는 것을 결정하였다.

 羣臣不敢復言。復,扶又翻。羆,壽之孫;穆壽事魏太武帝。果,烈之弟也。癸酉,魏主臨朝堂,部分遷留。分,扶問翻。

 

 ⑮. 여름, 4월 14일에 경릉문선왕 소자량이 근심 때문에 죽엇다, 황제는 항상 소자량이 란을 일으킬까 조마조마하엿는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대단히 기뻐하였다.

 ⑮. 夏, 4月, 戊子,竟陵文宣王子良以憂卒。帝常憂之良爲變,聞其卒,甚喜。鬱林但虞子良爲變,而不知鸞、諶之謀已成矣。

 

 사마광이 말씀드렸다.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아직 그것을 얻지 못하면 그것을 얻으려고 걱정하고, 그것을 이미 얻고 나서는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진실로 그것을 잃어버릴까 걱정한다면 이르지 못하는 것이 없다. 왕융이 위급한 것을 틈타서 요행을 얻으려고 뒤를 이어 군주가 될 사람을 바꾸려고 도모하였습니다.

 臣光曰︰孔子稱「鄙夫不可與事君,未得之,患得之;旣得之,患失之。苟患失之,無所不至。」見《論語》。王融乘危徼幸,徼,堅堯翻。謀易嗣君。

 

 소자량은 당시에는 현명한 왕이었고 비록 평소에 충성스럽고 신중하게 스스로의 자리를 지키다가 근심 끝에 죽는 일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자취를 보면 바로 왕융이 급하게 부귀하기를 찾았던 데서 말미암았을 뿐입니다. 경박하고 조급한 인사는 어찌 가까이 할만하겠습니까?

 子良當時賢王,雖素以忠愼自居,不免憂死。迹其所以然,正由融速求富貴而已。輕躁之士,烏可近哉!躁,則到翻。近,其靳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