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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儉 / 霜降節初候豺乃祭獸2日(陰9/8)庚子.

solpee 2020. 10. 24. 09:42

《南北朝 齊紀2 武 永明 3年》〈乙丑, 485年

 

 ⑩. 애초에 송 태종이 총명관을 설치하여 학사들을 모아놓고 또한 이를 '東觀'이라고 하였다. 황상은 국학이 이미 세워졌기 때문에 5월 29일에 총명관을 줄이게 하였다. 당시 왕검이 영국자좨주인데, 조서를 내려 왕검의 집에 학사관을 열도록 하고 총명관에 있던 4부의 책들을 가져다가 그곳을 채우도록 하였다.

 ⑩. 初,宋太宗置總明觀以集學士,亦謂之東觀。上以國學旣立,五月,乙未,省總明觀。時王儉領國子祭酒,詔於儉宅學士館,以總明四部書充之。〈分經、史、子、集爲甲、乙、丙、丁四部。又據《宋紀》︰明帝泰始六年立總明觀,徵學士以充之;舉士二十人,分爲儒、道、文、史、陰陽五部學,言陰陽者遂無其人。然則四部書者,其儒、道、文、史之書歟!觀,古玩翻。〉又詔儉以家爲府。

 

 송 세조가 문장을 좋아하면서부터 사대부는 모두 문장을 가지고 서로 높이고 경전만을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왕검이 어려서 예학과 춘추를 좋아하였으며 언론의 순서는 반드시 유학을 따랐으니, 이로 말미암아 의관이 가지런하게 되어 더욱 유가의 가르침을 숭상하였다.

 自宋世祖好文章,士大夫以文章相尚,無以專《經》爲業者。儉少好《禮》學及《春秋》,言論造次必於儒者,〈好,呼到翻。造,七到翻。〉由是衣冠翕然,更尚儒術。

 

 왕검은 조의와 국전을 순서대로 가려 쓰며 晉·宋 이래의 옛 일들을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러므로 조정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판단이나 결정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였다. 매번 넓은 의견은 증거를 인용하니 八坐·丞官·郞官이 다른 의견을 낼 수 없었다. 영사들 가운데 일을 자문하는 사람이 항상 수십 명이었으며 빈객들이 자리를 메웠지만 왕검은 맞이하고 접대하면서 가리고 나누어 옆에 서서 기다리는 것이 없도록 하였고, 말하면서도 글을 썼지만 모두 말과 글에서는 빛이 났다.

 儉撰次朝儀、國典,自晉、宋以來故事,無不諳憶,〈憶,記也。朝,直遙翻;下同。諳,烏含翻。〉故當朝理事,斷決如流。每博議引證,八坐、丞、郎無能異者。〈八坐、丞、郎,自八坐至左右丞、諸曹郎也。斷,丁亂翻。坐,徂臥翻。〉令史諮事常數十人,賓客滿席,儉應接辨析,傍無留滯,發言下筆,皆有音彩

 

 10일에 한 번씩 학교로 돌아가서 제생들의 시험을 감독하는데, 건을 쓰고 시험지를 들고 잇는 사람은 뜰에 있었으며, 검위·영사들이 으례를 차리는 모습이 매우 훌륭하엿다. 해산괄을 만들어 잠을 비스듬히 꽂았는데, 조정과 재야에서 이를 흠모하여 서로 흉내를 내었다. 왕검이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十日一還學監試諸生,巾卷在庭,〈監,工銜翻。卷,巨員翻,冠武也。鄭註《禮記》云︰武冠,卷也,音起權翻。〉劍衞、令史,儀容甚盛。作解散髻,〈據《南史‧儉傳》作「解散幘」。蕭子顯《齊書》作「解散髻,斜插幘簪」。〉斜插簪;朝野慕之,相與倣效。儉常謂人曰︰

 

 "강좌에서 풍류가 있는 재상은 오로지 사안이 있을 뿐이다."

 속으로 자신과 비교한 것이다. 황상이 깊이 이에 의지하니, 사류를 뽑아 쓰고자 하여 주서를 올리면 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江左風流宰相,唯有謝安。」意以自比也。上深委仗之,士流選用,奏無不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