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鍾離委珠 [zhōnglíwěizhū] /霜降節(07:59)初候豺乃祭獸(승냥이 짐승잡아 제사)初日(陰9/7)己亥.

solpee 2020. 10. 23. 05:54

鍾離委珠[zhōnglíwěizhū] 

【뜻】鍾離가 구슬을 버렸다. → 정당하지 못한 돈이나 재물을 받지 않는다.

不受赃,不受来路不正的财物。

【출전】范曄 : <後漢書> ‘鍾離列傳’后汉书·钟离意传》

【고사】

   『이 성어는 後漢의 鍾離意라는 사람의 일화에서 유래한다.

   後漢의 鍾離意는 顯宗(재위 58∼75)이 즉위한 뒤 천자와 신하 사이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벼슬인 尙書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교지(지금의 베트남) 태수로 있던 張恢라는 인물이 거액의 뇌물을 받은 죄로 문책을 받아 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장회의 재산목록을 조사해서 그 재산을 당시 곡식과 재화를 총괄하던 대사농(大司農)에게 납입토록 했다. 또한 현종은 조서를 내려 장회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하사하였는데, 종리의는 그 가운데서 진주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종리의는 임금이 하사한 진주를 땅에 버리면서 굳이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현종이 이상하게 여겨 받지 않으려는 까닭을 묻자, 종리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옛날에 孔子는 盜泉이라고 하는 지명의 물이라는 말을 듣고 목이 말라도 참으며 그 물을 마시지 않았고, 공자의 제자인 曾參은 勝母라고 하는 마을을 지나가게 되자 급히 그 수레를 되돌렸는데, 모두 도천과 승모라는 그 이름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 내리신 이 진주는 장회가 수뢰한 재산이기 때문에 추잡스러워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현종은,

   “그대의 말이 참으로 청렴하도다.”라고 말하며 다른 관청의 창고에서 삼 십 만전을 내어 종리의에게 하사하였다.

   후에 종리의는 승진하여 僕射 벼슬을 거쳐 魯나라 재상이 되었다. 그는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교화를 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크게 부귀영화를 누렸다. 종리의는 죽을 때 유언으로 임금께 글을 올려 말했다.

   “태평한 시대에 급하게 백성을 교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조금씩 완만하게 여유를 가지고 이끌어가야 할 것입니다.”

   현종은 죽은 뒤까지도 나라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종리의에 뜻에 감동하고 또 그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조서를 내려 이 십 만전을 하사했다.』

《后汉书·钟离意传》:“显宗即位,征为尚书。时交阯太守张恢,坐臧千金,征还伏法,以资物簿入大司农,诏班赐群臣。意得珠玑,悉以委地而不拜赐。帝怪而问其故。对曰:‘臣闻孔子忍渴于盗泉之水,曾参回车于胜母之闾,恶其名也。此臧秽之宝,诚不敢拜。’”

钟离意,字子阿,会稽山阴(今浙江绍兴)人。他性格耿直,年轻时在郡中任督邮这种位轻权重的官职,主要负责监察官吏、传达政令等事。汉建武十四年(公元38年),会稽郡突然发生大瘟疫,几天之内,被感染而死亡的百姓人数过万。钟离意此时任会稽县令,冒着被感染的危险,他独自一人四处奔走调查疫情,抚恤灾民,并设法招募医生,研制药物,抗击瘟疫。新药研制出来后,人们都不敢喝,钟离意知道后,以身试药,伸手夺过药就喝了下去。瘟疫终于被控制,百姓的性命得以保全。

后来,钟离意被征召到京都洛阳。一次,朝廷命令他负责押送一批囚犯到河内府,时逢严冬,许多犯人还染了病,行进极为艰难。见此情况,钟离意就命令地方制作衣服给犯人穿,让他们御寒,同时还在道路上除去了犯人的枷锁,与他们约定日期,让他们各自前往河内。犯人们见钟离意如此爱护、信任他们,纷纷按照钟离意的安排前行,最终全部按时到达目的地,途中没有一个人借机逃跑。

汉章帝即位后,钟离意被征拜为尚书。当时,交阯太守张恢贪赃枉法,被召回洛阳处死,他的家庭财产也被全部没收充公。不久,汉章帝下令将这批赃款赃物赐给群臣。没想到,轮到钟离意领这批珠宝的时候,他竟坚决不要。汉章帝感到奇怪,询问原因,钟离意回答说:“我听说,孔子忍受着口渴的痛苦,也不喝盗泉之水,曾参情愿回车绕道,也要避开胜母的家门附近。他们这样做,都是因为厌恶这些地方的坏名声。你赐给我的这些珠宝都是不干净的赃款赃物,我确实不敢接受。” 汉章帝由此看出钟离意确实是一个清廉之人,调升他为尚书仆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