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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閨門無禮[shàng guīmén wúlǐ]/寒露節初候鴻雁來賓5日(陰8/26)戊子

solpee 2020. 10. 12. 05:57

南北朝 宋紀10 孝武帝 大明 員年》〈丁酉, 457年

 

 ⑪. 8월 27일에 사공·남서주(강소성 진강시) 자사인 경릉왕 유탄을 옮겨 남연주(강소성 양주시) 자사로 삼고, 태자첨사 유연손을 남서주 자사로 삼았다. 애초에, 고조(유유)가 유조에서 경구(강소성진강시)는 요지이고 건강과 거리가 아주 가까워서 스스로 가까운 친척이 아니면 있지 못하게 하였다.

 ⑪. 甲辰,徙司空、南徐州刺史竟陵王誕爲南兗州刺史,以太子詹事劉延孫爲南徐州刺史。初,高祖遺詔,以京口要地,去建康密邇,自非宗室近親,不得居之。

 

 유연손의 선조는 비록 고조와 같은 곳에 뿌리를 두었지만 고조는 팽성에 있는 지파에 속하였고 유연손은 거현(산동성 거현)에 있는 지파에 속하여 이제까지 昭穆(종묘차례)의 차례에 놓은 일이 없었다. 황상은 이미 유연손에게 명하여 경구를 진수토록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조서를 내려 유연손과 더불어 종족을 합ㅌ치고 여러 왕들로 하여금 모두 장유의 순서를 정하도록 하였다.

 延孫之先雖與高祖同源,而高祖屬彭城,延孫屬莒縣,《南史‧延孫傳》作「呂縣」。呂縣屬彭城郡,而莒縣屬東莞郡。詳而考之,呂縣爲是。彭城、呂二縣並屬彭城郡,延孫與帝室同源同郡,特異縣耳。從來不序昭穆。昭,讀如字。上旣命延孫鎭京口,仍詔與延孫合族,使諸王皆序長幼。長,知兩翻。

 

 황상이 침실이 무례하여 가깝거나 멀거나 높거나 천하거나를 가리지 않았는데 소문에 백성들 사이에 흘러 다녀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유탄은 관대하고 예의가 있었는데 또한 태자였던 유소·승상 유의선을 주살하여 커다란 공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슬며시 그에게 기울어졌다.

 上閨門無禮,不擇親疏、尊卑,流聞民間,無所不至。誕寬而有禮,又誅太子劭、丞相義宣,皆有大功,誕起兵討劭見上卷文帝元嘉三十年;勸止上迎義宣事見上。人心竊向之。

 

 유탄이 재능과 능력이 있는 인사를 많이 모으고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무기를 쌓아 모으니, 황상은 이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그를 꺼려서 유탄을 중앙에 머물게 하려고 하지 아니하여서 경구로 내보내어 진수하게 하였는데, 오히려 그곳이 아주 가까운 곳이라는 것이 싫어서 다시 그를 광릉(강소성 양주시)로 옮겼다. 유연손의 심복의 신하이기 때문에 경구에서 진수하며 그를 막게 한 것이다.

 誕多聚才力之士,蓄精甲利兵,上由是畏而忌之,不欲誕居中,使出鎭京口;猶嫌其逼,更徙之廣陵。南兗州時治廣陵。以延孫腹心之臣,使鎭京口以防之。爲帝討誕張本。

 

 ⑫. 위의 황제가 동쪽을 순행하려고 하였는데, 겨울 10월에 조서를 내려서 태재 상영에게 요서(하북 노룡현 북)의 황산(하북 요서군 비여현 동남)에 행궁을 짓도록 하였다.

 ⑫. 魏主將東巡,冬,十月,詔太宰常英起行宮於遼西黃山。魏收《地形志》,遼西郡肥如縣有黃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