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辭達而已矣[cídá'éryǐyǐ]/ 秋分節中候蟄蟲壞戶1日(陰8/11)癸酉

solpee 2020. 9. 27. 08:39

南北朝 宋紀5 文帝 元嘉 15年》〈戊寅, 438年

 

 ③. 애초에 연왕 풍홍이 요동(遼東: 遼河가 지금의 永定河였으니 요동은 난하와 영정하 사이 지역이다)에 도착하자, 고리왕 고련이 사신을 파견하여 그를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용성왕 풍군이 여기에 와서 들판에서 묵게 되었으니 병사들과 말들이 노고가 많겠다."

 ③. 初,燕王弘至遼東,高麗王璉遣使勞之曰:麗,力知翻。璉,力展翻。使,疏吏翻。勞,力到翻。「龍城王馮君,爰適野次,士馬勞乎?」

 

 풍홍이 부끄럽고 화가 나서 칭제하여 그를 꾸짖었더니 고리는 평곽(제남 북방)에서 거처하도록 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북풍(석가장 동남쪽)으로 옮겼다. 풍홍은 원래부터 고리를 업신여겨서 정치를 하고 형벌을 주며 그리고 포상하는 일에서 여전히 그 나라에 있을 때와 같이 하니, 고리에서는 그 시중드는 사람들을 빼앗고, 그 태자 풍왕인을 잡아서 인질로 삼았다.

 弘慙怒,稱制讓之;高麗處之平郭,處,昌呂翻。尋徙北豐。弘素侮高麗,政刑賞罰,猶如其國;高麗乃奪其侍人,取其太子王仁爲質。質,音致。

 

 풍홍이 고리를 원망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서 자신을 맞이하여 주기를 요청하니, 송황이 사자 왕백구 등을 파견하여 그를 맞이 하도록 하고, 아울러 고리에서도 물품을 지급하여 보내주도록 하였다. 고리왕은 풍홍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가게 하지 않으려고, 장군 손수·고구 등을 파견하여 북풍에서 풍홍과 아울러 그 자손 10여 명을 죽이고, 풍홍에게 시호를 내려 소성황제라고 하였다.(고리왕이 황제시호까지 내릴 수 있었다)

 弘怨高麗,遣使上表求迎,上遣使者王白駒等迎之,幷令高麗資遣。高麗王不欲使弘南來,遣將孫漱、高仇等殺弘于北豐,幷其子孫十餘人,果如楊㟭之言。將,卽亮翻;下同。諡弘曰昭成皇帝。

 

 왕백구 등이 통솔하고 있는 7천여 명을 거느리고 손수·고구를 엄습하여 고구를 죽이고, 손수는 산체로 붙잡았다. 고리왕은 왕백구 등이 멋대로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그를 붙잡아서 호송하였다. 황상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여서 그 뜻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왕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고 이미 그리하였다가 그를 용서하였다.(송이 고리를 두려워하였다는 뜻이다)

 白駒等帥所領七千餘人掩討漱、仇、殺仇,生擒漱。高麗王以白駒等專殺,遣使執送之。上以遠國,不欲違其意,下白駒等獄,下,遐稼翻。已而原之。

 

 ⑨. 예장 사람 뇌차종이 학문을 좋아하여 여산에 숨어서 살았다. 일찍이 징소하여 산기시랑으로 삼았으나 가지 않았다. 이 해에 처사로 징소하여 건강에 도착하여 계룡산에서 학관을 열고, 학도들을 모아 가르치도록 하였다.

 ⑨. 豫章雷次宗好學,好,呼到翻;下同。隱居廬山。廬山在尋陽,今在南康城北十五里,尋陽之南,正面廬山。嘗徵爲散騎侍郎,不就。是歲,以處士徵至建康,爲開館於雞籠山,雞籠山在臺城北郊。散,悉亶翻。騎,奇寄翻。處,昌呂翻。爲,于僞翻。使聚徒敎授。

 

 황제는 평소에 예술과 문학을 좋아하여  단양윤인 여강 사람 하상지로 하여금 현학을 세우도록 하고, 태자솔경령 하승천에게는 사학을 세우도록 하고, 사도부의 참군 사원에게 문학을 세우도록 하니, 뇌차종의 유학과 함께 四學이 되었다.

 帝雅好藝文,使丹楊尹廬江何尚之立玄學,太子率更令何承天立史學,《晉志》,太子率更令主宮殿門戶及賞罰事,職如光祿勳、衞尉。更,工銜翻。司徒參軍謝元立文學,幷次宗儒學爲四學。

 

 사원은 사령운의 6촌동생이다. 황제는 자주 뇌차종의 학관에 행차하여, 건구(단의 조복 다음 복장이다.) 차림으로 시강하도록 뇌차종에게 명령하고, 물품의 공급도 대단히 후하게 하였다. 또 급사중을 재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오랜 후에 여산으로 돌아갔다.

 元,靈運之從祖弟也。帝數幸次宗學館,令次宗以巾褠侍講,從,才用翻。數,所角翻。褠,古侯翻。江南人士交際以爲盛服,蓋次於朝服。毛脩之不肯以巾褠到殷景仁之門是也。蜀《註》曰:巾謂巾幘,褠謂單衣。資給甚厚。又除給事中,不就。久之,還廬山。

 

 사마광이 말한다.

 "《易》에서 '군자는 이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쌓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께서는 '말이란 뜻이 통하게 할뿐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臣光曰:《易》曰:「君子多識前言往行以畜其德。」行,下孟翻。《易‧大畜‧彖辭》。孔子曰:「辭達而已矣。」《論語》所記。

 

 그러므로 역사란 것은 유학의 일부분이며, 문학이란 유학의 찌거기인데, 노자·장자의 허무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가르침이라고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릇 학문이란 것은 탐구하는 것인데, 천하에 두 개의 도가 없으니, 어찌 四學이 있겠습니까?"

 然則史者儒之一端,文者儒之餘事;至於老、莊虛無,固非所以爲敎也。夫學者所以求道;天下無二道,安有四學哉!

 

 ⑩. 황제는 천성이 인자하고 후덕하며 공손하고 검소하여 정치하는 것에 부지런하였고, 법률을 지켰으나 준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하였으나 해이하지 않았다.

 ⑩. 帝性仁厚恭儉,勤於爲政;守法而不峻,容物而不馳

 

 백관들은 모두 그 직위에 오랫동안 있었으나, 수재들은 6년을 임기로 끊었고, 하급 관리가 억지로 면직되지 않은 것은 백성들과 연결하고 있어서이다.

 百官皆久於其職,守宰以六期爲斷;吏不茍免,民有所係。

 

 30년 동안 사방 경계의 영토 안에서는 편안하고 무사하였으며, 호구는 증가핬는데, 세금을 내거나 요역을 제공하는 것도 세부를 내는 것뿐이었으며,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스스로 일할 뿐이었다.

 三十年間,四境之內,晏安無事,戶口蕃息;斷,丁斷翻。蕃,音煩。出租供傜,止於歲賦,歲賦,常賦也,言不額外取民。晨出暮歸,自事而已。自適己事而已。

 

 여염에서는 학문을 강의하고 외는 것이 서로 들렸고, 선비들은 도타워서 지조가 숭상되었으며, 향촌에서는 경박한 것을 수치로 여겼다.

 閭閻之間,講誦相聞;士敦操尚,鄕恥輕薄。

 

 강좌(양자강 동쪽: 치도 건강=남경에서 기준)의 풍속이 이때 아름다워졌으니, 후에 정치를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원가시대라고 칭송하였다.

 江左風俗,於斯爲美,後之言政治者,皆稱元嘉焉。治,直吏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