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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根雖茂而端良甚寡[běngēn suīmào ér duānliáng shénguǎ]본래 뿌리는 무성하나 좋은 가지는 아주 적다./秋分節初候雷始收聲2日(陰8/7)己巳日

solpee 2020. 9. 22. 17:15

南北朝 宋紀2 文帝 元嘉 元年》〈甲子, 424年

 

 ⑥. 여름 4월, 서선지 등이 남연주 자사 단도제가 전 왕조의 옛날 장수여서 위세가 殿省(궁궐과 관부)를 덮고 또 많은 병사를 갖고 있어서 마침내 단도제와 강주 자사 왕홍을 불러서 들어와 조현하도록 하니, 5월에 모두 건강에 도착하여 폐립하려고 했던 음모를 그들에게 알렸다.

 ⑥. 夏,四月,徐羨之等以南兗州刺史檀道濟沈約曰:中原亂,北州流民多南渡。晉成帝立南兗州,寄治京口;文帝始割江、淮間爲境,治廣陵。先朝舊將,威服殿省,且有兵衆,乃召道濟及江州刺史王弘入朝;將,卽亮翻。朝,直遙翻。五月,皆至建康,以廢立之謀告之。

 

 24일에 사회가 영군장군부의 관부가 퇴락했다 하여 집안사람을 모두 밖으로 나가게 하고 장수와 병사를 관부 안에 모으고, 중서사인인 형안태·반성에게 안에서 호응하게 하였다. 밤에 단도제가 자리에 들자 잠이 곧 깊어지니 사회는 이 때문에 그에게 감복하였다.

 甲申,謝晦以領軍府屋敗,悉令家人出外,聚將士府內;又使中書舍人邢安泰、潘盛爲內應。夜,邀檀道濟同宿,晦悚動不得眠,道濟就寢便熟,晦以此服之。服其處大事而不變其常度也。

 

 이때 황제는 화림원에 점포를 늘어놓고 친히 물건을 팔았고, 또 좌우의 사람들과 더불어 배를 끄는 것을 낙으로 삼고 천연지에서 놀이를 하고 용주에 가서 잠을 잤다. 25일 새벽에 단도제가 군사를 이끌고 앞에 섰소 서선지 등이 그 뒤를 이어서 운용문으로부터 들어갔는데, 형안태 등이 우선 숙위에게 훈계하였더니 막는 사람이 없었다.

 時帝於華林園爲列肆,親自沽賣;又與左右引船爲樂,夕,遊天淵池,卽龍舟而寢。樂,音洛。魏氏作華林園、天淵池於洛中。晉氏南渡,放其制,作之於建康;華林園在宮城北隅。乙酉詰旦,詰,去吉翻。道濟引兵居前,羨之等繼其後,入自雲龍門;安泰等先誡宿衞,莫有禦者。

 

 황제는 아직 일어나지 않앗는데, 군대의 병사가 나아가서 두 명의 시종을 죽이고 환제의 손가락에 상처를 입히고 부축하여 동각을 나왓으며, 옥새와 인수를 거두자 신하들이 절하면서 인사를 하였고, 황제를 옛날의 태자궁으로 호송하였다.

 帝未興,軍士進殺二侍者,傷帝指,扶出東閣,收璽綬,璽,斯氏翻。綬,音受。羣臣拜辭,衞送故太子宮。

 

 시중 정도혜가 서선지 등에게 황제의 동생인 남에주 자사 유의공을 황제를 세우도록 권하였다. 서산지 등은 의도왕 유의륭이 평소 아름답다는 명망을 갖고 있었고 또 상서로운 징조가 많아서, 마침내 황태후의 명령이라고 칭하고서 황제의 과거의 악행을 일일이 들어서 헤아리고 그를 폐하여 영양왕으로 삼고, 의도왕으로 대통을 잇도록 하고, 사형죄 이하에 해당하는 죄수를 사면하였다.

 侍中程道惠勸羨之等立皇弟南豫州刺史義恭。羨之等以宜都王義隆素有令望,又多符瑞,景平初,有黑龍見西方,五色雲隨之。二年,江陵城上有紫雲,望氣者皆以爲帝王之符,當在西方。又江陵西至上明,東及江津,其間有九十九洲。楚諺云:「洲滿百,當出王者。」時忽有一洲自生,汀流迴薄而成。皆爲上龍飛之應。乃稱皇太后令,數帝過惡,數,所具翻。廢爲營陽王,以宜都王纂承大統,赦死罪以下。

 

 또 황태후령이라고 하고서 옥새와 인수를 반환시키고, 아울어 황후를 폐하여 영양왕비로 삼고, 여양왕을 오로 귀양 보냈다. 단도제로 하여금 들어와서 조정을 지키도록 하였다. 왕이 오에 도착하여 금창정에 머물렀고, 6월 24일에 서선지 등이 형안태로 하여금 가서 영양왕을 시해하도록 하였다. 왕은 힘이 샜는데, 뚫고 달아나서 昌門(吳城 外城西門)을 나가자 쫓는 사람이 문을 넘어뜨려서 그를 죽였다.

 又稱皇太后令,奉還璽紱;紱,音弗。幷廢皇后爲營陽王妃,遷營陽王於吳。使檀道濟入守朝堂。朝,直遙翻。王至吳,上金昌亭;六月,癸丑,羨之等使邢安泰就弒之。王多力,突走出昌門,金昌亭在昌門內。《孫權記注》云:閶門,吳西郭門,夫差作;以天門通閶闔,故名之。後春申君改爲昌門。金昌亭,以其在西門內,故曰金昌。追者以門關踣而弒之。踣,蒲北翻。

 

 배자야가 평론하였다.

 裴子野論曰:

 

 "옛날에 인군이 아들을 양육할 때, 말을 할 수 있으면 스승이 그에게 문장을 가르쳤고, 걸을 수 있으면 스승이 그에게 예를 도왔다. 송의 교육은 평소 이와 사뭇 달랐는데, 금중에 있을 때는 노복과 비첩에게 맡겼고, 밖에 있을 때는 즉 심부름하는 사람이 쫓아다녔다.태자와 황제의 아들에게는 帥가 있고 侍가 있는데, 이 두 직무에 종ㅅ하는 사람은 모두 臺皁(대조: 皁는 士臣, 臺는 僕臣)이다.

 古者人君養子,能言而師授之辭,能行而傅相之禮。相,息亮翻。宋之敎誨,雅異於斯,居中則任僕妾,處外則近趨走。處,昌呂翻。近,其靳翻。趨走,執役者也。太子、皇子,有帥,有侍,帥,所類翻。是二職者,皆臺皁也。《左傳》申無宇曰:士臣皁,僕臣臺。

 

 그가 행하고 멈추는 것을 통제하며, 그에게 법칙을 가르치고, 선과 악을 넌지시 깨우쳐주는 것은 모두 그들로 말마암지 않은 것이 없는데, 말을 한 것은 예의에 미치지 못하고, 식견은 옛것과 오늘의 것에 이르지 못하며, 삼가하고 조심하는 사람은 그를 권고할 수 있는 것에서 인색하고, 거칠고 우매한 사람은 간혹 흉악하고 간특한 것으로 그를 유도한다.

 制其行止,授其法則,導達臧否,否,音鄙。罔弗由之;言不及於禮義,識不達於今古,謹敕者能勸之以吝嗇,狂愚者或誘之以凶慝誘,音酉。慝,吐得翻。

 

 비록 사부가 잇으나 대부분 耆艾大夫(기애대부: 耆는 60세 이상 늙은이, 艾는 50세로 쇠잔한 사람을 이름)로 삼으며, 비록 벗과 문학자가 있으나 대부분 귀족 출신과 소년으로 그것을 삼으니, 자리를 갖추고 있는 것일 뿐이고 역시 함께 놀지 못한다. 어린 왕이 주에 가게 되면, 長史(재상급)가 행사(행부주사)하고 교명을 선포하여 전하고, 또 전첨을 갖고 있으나 때때로 제멋대로 자행하여 위세와 권력을 훔쳐서 농단하니, 이 때문에 본래의 뿌리는 비록 무성하나 가지가 좋은 것은 아주 적다.

 雖有師傅,多以耆艾大夫爲之;雖有友及文學,多以膏粱年少爲之;具位而已,亦弗與遊。王置文學、師、友各一人,晉制也。《禮》,五十曰艾,服官政;六十曰耆,指使。孔穎達曰:艾者,年至五十,氣力已衰,髮蒼白如艾也。賀瑒曰:耆,至也,至老之境也。少,詩照翻。幼王臨州,長史行事,宣傳敎命;行事,行府州事也。又有典籤,往往專恣,竊弄威權,《南史》曰:故事,府州部內論事,皆籤前直敍所論之事;後云「謹籤」,日月下又云「某官某籤」;故府州置典籤以領之。本五品吏,宋初改爲士職。宋末,多以幼少皇子爲藩鎭,時主以左右親近領典籤,其權任遂重。是以本根雖茂而端良甚寡

 

 뒤를 이은 군주가 어리고 대대로 간사한 무리를 이어나가니 비록 더러운 물건과 추한 것들이라고 해도 자연스럽게 스스로 나타나게 되지만 그러나 익숙하게 되면 일상적인 것이 되니 그 유래는 깊고 멀다. 태종 대에 내려와서 천하를 들어서 이를 버렸는데, 역시 간사한 소인배가 한 일이다. 아! 나라를 갖고 가정을 가졌다면 그것을 거울삼을진저!"

 嗣君沖幼,世繼姦回,雖惡物醜類,天然自出,然習則生常,其流遠矣。降及太宗,舉天下而棄之,亦昵比之爲也。昵,尼質翻。比,毗至翻。嗚呼!有國有家,其鑒之矣!裴子野究言宋氏亡國之禍,《通鑑》載之於此,欲使有國有家謹於其初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