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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를 죽이는 방법./白露節末候群鳥養羞3日(음8/3)乙丑

solpee 2020. 9. 19. 08:26

《南北朝 宋紀 武 永初 2年》〈辛酉, 421年

 

 ⑬. 애초에, 황제(유유)가 독주 한 단지를 옛 낭야의 낭중령 장위에게 주고 영릉왕(東晉 末帝 恭帝 司馬德文)을 짐독시키게 하였는데, 장위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군주를 짐독으로 시해하고, 살기를 구하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

 이에 길에서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장위는 장소의 형이다.

 ⑬. 初,帝以毒酒一甖甖,於耕翻,瓦器也。授前琅邪郎中令張偉,使酖零陵王,偉歎曰:「酖君以求生,不如死!」乃於道自飲而卒。卒,子恤翻。偉,卲之兄也。初,帝領揚州,辟卲爲僚屬。

 

 태상 저수지와 시중 저담지는 모두 왕비의 오빠인데, 왕이 남자아이를 낳을 때마다 황제가 번번이 저수지 형제로 하여금 편리한 방법으로 죽이도록 하였다. 왕이 스스로 자리릃 양보하였는데, 화가 미칠까 깊이 걱정하여 저비와 함께 한 방에 거처하면서 스스로 침상 앞에서 끓여 먹었으며 음식 재료가 모두 저비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송인은 그 틈을 엿볼 수 없었다.

 太常褚秀之、侍中褚淡之,皆王之妃兄也,王每生男,帝輒令秀之兄弟方便殺之。方便者,隨宜處分,不令其事彰露也。王自遜位,深慮禍及,與褚妃共處一室,處,昌呂翻。自煑食於牀前,飲食所資,皆出褚妃,故宋人莫得伺其隙。伺,相吏翻。

 

 9월에 환제가 저담지에게 형인 우위장군 저숙도와 함께 비를 살펴보도록 하니 비가 나와서 별실에 가서 만나보았다. 군사와 사람들이 담을 뛰어넘어 들어가서 왕에게 약을 먹였다. 왕이 마시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였다.

 "불교에서는 자살하는 사람은 다시 인간의 몸으로 환생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병사와 사람들이 이불을 덮어씌워 죽였다. 황제가 백관을 인솔하고서 조당에 3일간 임석하였다.

 九月,帝令淡之與兄右衞將軍叔度往視妃,妃出就別室相見。兵人踰垣而入,進藥於王。王不肯飲,曰:「佛敎,自殺者不復得人身。」兵人以被掩殺之。復,扶又翻。《考異》曰:《宋‧本紀》,「九月己丑,零陵王薨」;《晉‧本紀》,「九月丁丑」;據《長曆》,九月丙午朔,無己丑、丁丑,今不書日。帝帥百官臨於朝堂三日。自是之後,禪讓之君,罕得全矣。帥,讀曰率。臨,力鴆翻。朝,直遙翻。

 

 ㉑. 황상이 송공이었을 때, 사첨을 송대의 중서시랑으로 삼았고, 그의 동생인 사회를 우위장군으로 삼았다. 이때 사회는 권세가 이미 무거웠으며, 팽성에서 도읍으로 돌아와서 가족을 맞이하자, 빈객이 폭주하여 문과 통하는 좁은 골목길을 매워서 막혔다. 사첨이 집에 있다가 놀라서 사회에게 말하였다.

 ㉑. 上之爲宋公也,謝瞻爲宋臺中書侍郎,其弟晦爲右衞將軍。時晦權遇已重,自彭城還都迎家,上爲宋公,建宋臺於彭城。賓客輻湊,門巷塡咽。瞻在家驚駭,謂晦曰:

 

 "너는 명예와 지위가 아직 높지 않으나 사람들이 돌아가는 곳이 바로 너에게로구나! 우리 집은 평소 편안하게 물러나는 것을 본업으로 삼았고, 당시의 세상일에 간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교류하는 것은 친한 벗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너는 드디어 위세가 조야를 기울이게 하니, 이것이 어찌 가문의 복이겠느냐!"

 이에 울타리로 문과 뜰을 막으며 말하였다.

 "나는 차마 이것을 보지 못하겠다."

 「汝名位未多,而人歸趣乃爾!趣,七喻翻。吾家素以恬退爲業,不願干豫時事,交遊不過親朋。而汝遂勢傾朝野,朝,直遙翻。此豈門戶之福邪!」乃以籬隔門庭曰:「吾不忍見此。」

 

 팽성으로 돌아오게 되자 송공에게 말하였다.

 "신은 본래 바탕이 사인이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지위는 이천석을 넘지 않았습니다. 동생의 나이가 비로소 서른이고 뜻과 쓰임새가 무릇 가까워져서 영화가 대부에서 으뜸이고 지위와 직무는 드러나고 찬찬합니다. 복이 지나가면 재앙이 생기며 그 응보가 멀지 않으니 특별히 빌건대 강등시키고 밖으로 내쳐서 쇠락한 가문을 보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전후로 누차 진술하였다.

 及還彭城,言於宋公曰:「臣本素士,父祖位不過二千石。瞻、晦,晉太常謝裒之玄孫,於謝安爲從孫,是其高曾與謝安同其所自出,但名位不及耳。弟年始三十,志用凡近,榮冠臺府,冠,古玩翻。位任顯密。福過災生其應無遠,特乞降黜,以保衰門。」前後屢陳之。

 

 사회가 혹 조정의 은밀한 일을 사첨에게 말하면 사첨은 일부러 친구에게 애기하며 이를 인용하여 익살거리로 삼아서 그 말을 끊었다. 황상이 즉위하게 되자, 사회가 좌명공으로 지위와 직무가 더욱 무거워지니 사첨이 더욱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이 해에 사첨은 예장 태수가 되었으나 병이 들었는데 고치지 아니하였다.

 晦或以朝廷密事語瞻,語,牛倨翻。瞻故向親舊陳說,用爲戲笑,以絕其言。及上卽位,晦以佐命功,位任益重,瞻愈憂懼。是歲,瞻爲豫章太守,遇病不療。

 

 임종할 때사회에게 편지를 남겨서 말하였다.

 "나는 다행히 몸을 온전하게 이끌 수 있었으니 또한 무엇을 한스러워 하겠는가! 동생은 스스로 근면하고 나라를 위하고 가정을 위하는 것을 생각하시오."

 臨終,遺晦書曰:「吾得啓體幸全,亦何所恨!遺,于季翻。曾子有疾,召門弟子曰:「啓予足,啓予手。《詩》云『戰戰兢兢,如臨深淵,如屢薄冰,』而今而後,吾知免夫,小子!」孔子曰:「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毀傷。父母全而生之,子全而歸之。」弟思自勉勵,爲國爲家。」居寵思危,謝瞻有焉。爲謝晦殺身亡家張本。爲,于僞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