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晉紀35 安帝 元興 3年》〈甲辰, 404〉
㉙. 연왕 모용희가 황후 부씨와 돌아다니면서 사냥을 하였는데. 북으로는 백록산(내몽고 카라친치 서남부)에 올랐고, 동으로는 청령(청경)을 넘었으며 남으로는 창해까지 갔다가 돌아오니 병사들 중에서 호랑이와 이리에게 죽거나 얼어서 죽은 자가 5천여 명이나 되었다.
㉙.燕王熙與苻后遊畋,北登白鹿山,東踰青嶺,〈《水經註》:大遼水東南過遼東郡房縣西,又右會白狼水,山出右北平白狼縣東南,北屈,逕白鹿山西,卽白狼山也。青嶺卽青陘,在龍城東南四百餘里。魏收《地形志》,建德郡石城縣有白鹿山祠。〉南臨滄海而還,〈滄海在遼西郡海陽縣南。還,從宣翻,又如字。〉士卒爲虎狼所殺及凍死者五千餘人。
㉛. 고구리가 연을 침략(영락 14년)하였다.
㉛. 高句麗侵燕。〈句,如字,又音駒。麗,力知翻。〉
《晉紀36 安帝 義熙 元年》〈乙巳, 405〉
②. 연왕 모용희가 고구리를 쳤다. 26일에 요동(지금 灤河의 동쪽 우안)을 공격하자 성이 또 함락되니(공격이 실패하였다는 통감필법이다), 모용희가 장령들과 병사들에게 명령하였다.
②. 燕王熙伐高句麗。〈句,如字,又音駒。麗,力知翻。〉戊申,攻遼東;城且陷,熙命將士:
"먼저 올라가려고 하지 마라. 그 성을 깍아서 평평하게 한 뒤에 짐과 황후가 연을 타고 들어갈 것이다."
「毋得先登,俟剗平其城,朕與皇后乘輦而入。」〈剗,楚限翻。〉
이로 말미암아 성안에서 엄하게 방비할 수 있게 되어서 이기지 못하여 돌아가고 말았다.
由是城中得嚴備,不克而還。〈後齊高緯之攻晉州,亦若是矣。還,從宣翻,又如字。〉
秦王 요흥이 구마라집을 국사로 삼고, 그를 받드는 것이 신을 모시는 것과 같았는데, 친히 여러 신하들과 사문들을 인솔하여 구마라집이 불경을 강의하는 것을 들었고, 또 구마라집에게 명하여 서역의 《經》과 《論》 300여 권을 번역하도록 하고, 탑과 절을 크게 지으니, 사문들 가운데 좌선하는 사람이 천 명을 헤아렸다.
秦王興以鳩摩羅什爲國師,奉之如神,親帥羣臣及沙門聽羅什講佛經,〈帥,讀曰率;下同。〉又命羅什翻譯西域《經》、《論》三百餘卷,〈古之譯者傳四夷之言;今羅什翻夷言爲華言,故曰譯。〉大營塔寺,沙門坐禪者常以千數。〈禪,靜也,寂也。《傳燈錄》曰:禪有五:有凡夫禪,有外道禪,有小乘禪,有大乘禪,有最上乘禪。禪,時連翻。〉
공경 이하가 모두 부처를 받드니, 이로 말미암아 주와 군에서도 그것에 감화를 받아 부처를 섬기는 사람들이 열에 아홉 가구였다.
公卿以下皆奉佛,由是州郡化之,事佛者十室而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