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震主之威[zhèn zhŭ zhī wēi]/白露節(13:08)初候鴻雁來(기러기 온다)初日(음7/20)癸丑

solpee 2020. 9. 7. 08:51

《晉紀34 安 元興 元年》壬寅, 402

 

 ⑨. 환현이 강릉을 떠났는데 일이 승리하지 못할까 걱정하며 항상 서쪽으로 돌아가는 계책을 세웠는데, 심양을 지나게 되어도 관군이 보이지 않자 마음속으로 아주 기뻤으며 장사들의 기운 역시 진동하였다.

 유해의 음모가 누설되어 환현이 그를 수감하였다.

 ⑨. 桓玄發江陵,慮事不捷,常爲西還之計;及過尋陽,不見官軍,意甚喜,將士之氣亦振。史言桓玄畏怯,劉牢之等不能仗順取之。將,卽亮翻;下同。

庾楷謀泄,玄囚之。

 

 18일에 조서를 내려서 제왕 사마유지를 파견하여 騶虞幡(황제의 전쟁중지 깃발)을 갖고서 형주·강주 두 주에 정식으로 알리고 군사를 해산시켰지만 환현의 선봉이 그를 죽였다. 사마유지는 사마종의 아들이다.

 丁巳,詔遣齊王柔之以騶虞幡宣告荊、江二州,使罷兵;騶,則尤翻。玄前鋒殺之。柔之,宗之子也。孝武太元十年,以柔之襲封齊王,紹攸、冏之祀;宗封南頓王。

 

 28일에 환현이 고숙에 이르러서 그의 장수 풍해 등에게 역양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양성 태수 사마휴지가 농성하며 굳게 지켰다. 환현의 군대는 동포를 차단하고 예주에 있는 배와 함선을 불태웠다. 예주 자사인 초왕 사마상지가 보병 9천 명을 통솔하고서 포의 주변에서 진을 쳤으며, 무도 태수 양추를 파견하여 횡강에 주둔시켰는데 양추가 환현의 군대에 항복하였다. 사마상지의 무리는 무너졌고 도중으로 도망하였는데 환현이 그를 붙잡았다. 사마휴지가 나가서 싸웠으나 패하였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丁卯,玄至姑孰,使其將馮該等攻歷陽,豫州刺史治歷陽。襄城太守司馬休之嬰城固守。玄軍斷洞浦,洞浦卽洞口,魏曹休破呂範處。斷,丁管翻。焚豫州舟艦。艦,戶黯翻。豫州刺史譙王尚之帥步卒九千陣於浦上,帥,讀曰率。遣武都太守楊秋屯橫江,秋降于玄軍。尚之衆潰,逃于涂中,玄捕獲之。涂,與滁同。司馬休之出戰而敗,棄城走。

 

 유뢰지는 평소 표기대장군 사마원현을 미워하였다. 환현이 이윽고 죽고 나면 사마원현이 더욱 교만하고 방자할 까 두려워하였으며 또 자기의 공적과 명성이 더욱 커지면 사마원현에게 용납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또 스스로 재간과 무용을 가졌고 강한 병사를 소유하였다고 믿고서 환현을 이용하여 정권 잡은 사람을 제거하고 다시 환현의 틈을 엿보아서 스스로 그것을 탈취하려 하였으니, 그러므로 환현을 토벌하려고 하지 않았다.

 劉牢之素惡驃騎大將軍元顯,惡,烏路翻。恐桓玄旣滅,元顯益驕恣,又恐己功名愈盛,不爲元顯所容;且自恃材武,擁強兵,欲假玄以除執政,復伺玄之隙而自取之,復,扶又翻。伺,相吏翻。故不肯討玄。

 

 사마원현은 밤낮으로 술에 취해 있었으며 유뢰지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유뢰지가 여러 번 문에 갓으나 볼 수가 없었고, 황제가 나와 사마원현을 전송하자 그를 공적인 좌석에서 만났을 뿐이었다.

 유뢰지가 율주에 진을 치니, 참군 유유가 환현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유뢰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환현은 유뢰지의 외당숙 하목에게 유뢰지로 하여금 유세하도록 하였다.

 元顯日夜昏酣,以牢之爲前鋒,牢之驟詣門,不得見,及帝出餞元顯,遇之公坐而已。坐,徂臥翻。

牢之軍溧洲,溧,音栗。溧水出溧陽縣,在建康東南;元顯遣牢之西上擊桓玄,非其路也。《晉書‧劉牢之傳》作「洌洲」。又,桓沖發建康,謝安送至溧洲。宋武陵王討元凶劭,四月戊午至南州;辛酉次溧洲;丙寅次江寧。今舟行自采石東下,未至三山,江中有洌山,卽洌洲也。洌、溧聲相近,故又爲溧洲。張舜民曰:過三山十餘里至溧洲,自溧洲過白土磯入慈湖夾。舜民《郴行錄》言泝流之先後水程也。參軍劉裕請擊玄,牢之不許。玄使牢之族舅何穆說牢之曰:

 

 "옛날부터 군주를 떨게 할 정도의 위엄을 머리에 이고, 상을 줄 수 없을 정도의 공적을 옆에 끼고서 스스로를 보전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越의 文種·秦의 白起·漢의 韓信 모두 밝은 군주를 섬기고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였으나 공적을 이룬 날 오히려 종족이 주륙되는 일을 면치 못하였거늘 하물며 흉악하고 우매한 사람이 사용되게 된 데서여!

 「自古戴震主之威,挾不賞之功而能自全者,誰邪?越之文種,秦之白起,漢之韓信,皆事明主,爲之盡力,說,輸芮翻。爲,于僞翻。功成之日,猶不免誅夷,況爲凶愚者之用乎!

 

 그대가 만약 지금 전쟁에서 승리하면 종족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전쟁에서 패하면 일족이 멸망되는데 이런 상태에서 어디로 돌아가려고 하는가! 얼굴을 바꾸어 계획을 고쳐서 부귀를 오래 보전할 수 있게 하는 것만 못하오! 옛 사람은 가죽 띠에 달린 쇠를 쏘고 소매를 베어도 오히려 해치지 않고 보좌할 사람으로 삼았는데 하물며 환현과 그대는 과거의 원한이 없지 않은가!"

 君如今日戰勝則傾宗,戰敗則覆族,欲以此安歸乎!不若翻然改圖,則可以長保富貴矣。古人射鉤、斬袪,猶不害爲輔佐,齊桓公與子糾爭國,管仲射桓公中帶鈎;子糾死,桓公釋管仲之囚而以爲相。晉獻公使寺人披伐公子重耳於蒲城,重耳踰垣而走,披斬其袪;重耳反國,披屢納忠。射,而亦翻。況玄與君無宿昔之怨乎!」

 

 이때 초왕 사마상지가 이미 패배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더욱 두려워하니, 유뢰지는 자못 하목의 말을 받아들여 환현과 서로 왕래하였다. 동해중위인 동해(강소 진강) 사람 하무기는 유뢰지의 생질인데 유유와 함께 극진히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표기장군부의 종사중랑 유경선이 간하였다.

 時譙王尚之已敗,人情愈恐;牢之頗納穆言,與玄交通。東海中尉東海何無忌,牢之之甥也,與劉裕極諫,不聽。其子驃騎從事中郎敬宣諫曰:

 

 "지금 국가는 쇠약하고 위태로우며 천하의 무게는 대인과 환현에게 있는데, 환현을 아버지와 숙부의 자산을 빙자하여 초 전체를 점거하여 소유하고, 晉의 2/3를 떼어내고, 하루아침에 그를 풀어놓아 그에게 조정을 능욕하도록 만들었으니, 환현의 위세와 명망이 이미 완성되어 일을 도모하기 어려울까 두려우며, 동탁의 변고같은 일이 바야흐로 지금 있습니다."

 「今國家衰危,天下之重在大人與玄,玄藉父、叔之資,玄父溫,叔沖。據有全楚,割晉國三分之二,一朝縱之使陵朝廷,玄威望旣成,恐難圖也,董卓之變,將在今矣。」董卓事見五十九卷漢靈帝中平六年、獻帝初平元年。

 

 유뢰지가 노하여 말하였다.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금일에 환현을 잡는 것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을 뿐이지만, 다만 환현을 평정한 후 내가 표기장군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牢之怒曰:「吾豈不知!今日取玄如反覆手耳;但平玄之後,令我柰驃騎何!」元顯爲驃騎將軍,故稱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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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매(392년 유매가 환현을 공격하였다.)가 가서 환현을 보니, 환현이 말하였다.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왔는가?"

 유매는 말하였다.

 "가죽 띠의 쇠를 쏘았고, 소매를 벤 일이 잇는데, 저 유매까지 합치면 셋이 되겠지요."

  환현이 크게 기뻐하여고 그를 참군으로 임명하였다.

 劉邁往見玄,玄曰:「汝不畏死,而敢來邪?」邁曰:「射鉤斬袪,幷邁爲三。」玄悅,以爲參軍。邁折玄事見一百八卷孝武太元十七年。

 

 5일에 유사가 '회계왕 사마도자가 술에 방종하고 불효하니 기시에 처해야 한다.'고 상주하자, 조서를 내려서 안성군으로 옮기게 하고, 사마원현·동해왕 사마언장·초왕 사마상지·유해·장법순·모태 등을 건강의 저자거리레서 참수하였다. 환수가 왕탄을 위하여 굳게 살려달라고 청하자, 남령 이남으로 오래 귀양 보냈다.

 癸酉,有司奏會稽王道子酣縱不孝,當棄市,會,工外翻。詔徙安成郡;吳孫晧寶鼎二年,分豫章、長沙、廬陵立安成郡,唐吉州安福縣及袁州諸縣,皆其地也。劉昫曰:安福縣,吳安成郡治。斬元顯及東海王彥璋、彥璋,元顯之子,隆安初,使繼東海王後。譙王尚之、庾楷、張法順、毛泰等於建康市。桓脩爲王誕固請,長【章:甲十一行本「長」作「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流嶺南。爲,于僞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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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유뢰지는 부하관리를 크게 모으고 장강 이북을 점거하여 환현을 토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참군 유습이 말하였다.

 "일 가운데 할 수 없는 것으로 배반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장군은 예전에 왕 연주를 등졌고, 근래에는 사마원현을 배신하였으며, 지금은 다시 환공을 배반하니, 한 사람이 세 번 배반하고 어떻게 자립하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달려나가니 보좌하는 관리는 대부분 흩어지고 달아났다. 유뢰지가 두려웍서 유경선을 시켜 경구에 가서 가족을 맞아들이도록 하였으나 시기를 놓쳐서 도착하지 못하였다.

 於是牢之大集僚佐,議據江北以討玄,參軍劉襲曰:「事之不可者莫大於反。將軍往年反王兗州,王兗州,謂王恭。近日反司馬郎君,司馬郎君,謂元顯。今復反桓公,復,扶又翻;下復推同。一人三反,何以自立!」語畢,趨出,佐吏多散走。牢之懼,使敬宣之京口迎家,失期不至。

 

 유뢰지는 일이 이미 누설되어 환현에게 죽임을 당할 것으로 생각하고, 마침내 부곡을 인솔하고 북으로 달아났는데 신주에 이르러서 목을 매고 죽었다. 유경선이 도착하자, 곡을 할 겨를도 없이 즉시 장강을 건너서 광릉으로 달아났다. 장리들이 함께 유뢰지를 거두어 염을 하고 그 영구를 단도로 돌려보냈다. 환현이 관을 쪼개서 머리를 베며 시신을 저잣거리에 드러내도록 하였다.

 牢之以爲事已泄,爲玄所殺,乃帥部曲北走,帥,讀曰率。至新洲,縊而死。敬宣至,不暇哭,卽渡江奔廣陵。將吏共殯斂牢之,將,卽亮翻。斂,力贍翻。以其喪歸丹徒。玄令斲棺斬首,暴尸於市。暴,步卜翻,又如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