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因魘暴崩[yīn yǎn bào bēng]/ 處暑節中候天地始肅3日(음7/12)乙巳

solpee 2020. 8. 29. 20:10

《晉紀30 武帝 太元 21年(丙申, 396)

 

 ⑰. 황제가 술을 좋아하여 그러한 흐름이 내전에까지 이어지고, 술이 깬 날이 드므니 밖에 잇는 사람들이 궁궐로 나아가 알현하는 일도 아주 적었다 장귀인은 총애를 밥는 것이 후궁 중에서 으뜸이어서 후궁들은 모두 그녀를 두려워하였다.

 ⑰. 帝嗜酒,流連內殿,醒治【嚴:「治」改「日」。】旣少,言昏醉之時多,醒而治事之時少也。外人罕得進見。見,賢遍翻。張貴人寵冠後宮,冠,古玩翻。後宮皆畏之。

 

 8월, 20일에 황제가 후궁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면서 기생과 악대들도 모두 황제를 모셨으며, 당시 장귀인은 나이가 서른에 가까웠는데, 황제가 그녀를 희롱하며 말하였다.

 "너는 나이로 보아서는 역시 마땅히 폐출되어야 하며, 내 마음은 다시 어린 사람에게 가고 있다."

 庚申,帝與後宮宴,妓樂盡侍;妓,渠綺翻。時貴人年近三十,帝戲之曰:「汝以年亦當廢矣,吾意更屬少者。」近,其靳翻。屬,之欲翻。少,詩照翻。

 

 귀인은 속으로 분노하였고, 저녁이 될 무렵에 황제가 술에 취하여 청서전에서 잠을 잤는데, 귀인이 환관들에게 술을 두루 마시게 하고 그들을 흩어지게 하여 보내고, 비녀를 시켜서 이불로 황제의 얼굴을 덮어쓰우게 하여 그를 시해하고, 좌우 사람들에게 많은 뇌물을 준 후에 말하였다.

 "황제께서 가위에 눌려서 갑자기 붕어하셨다."

 貴人潛怒,向夕,帝醉,寢於清暑殿,清暑殿,帝所作。貴人徧飲宦者酒,散遣之,使婢以被蒙帝面,弒之,重賂左右,云「因魘暴崩」。飲,於鴆翻。魘(잠꼬대 염),於琰翻。《廣韻》曰:睡中魘(가위눌릴 엽)。毛晃曰:氣窒心懼而神亂則魘。

 

 당시 태자는 아둔하고 나약하였으며, 회계왕 사마도자는 생활이 어지럽고 황폐하여 마침내 더시는 캐내어 묻지를 않았다.

 왕국보가 밤에 궁궐의 문을 두드려 들어가서 유조를 만들려고 하자 시중 왕상이 그를 막으며 말하였다.

 "대행께서 안가에 계시고 황태자께서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감히 들어갸려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왕국보가 이에 멈추었다.

 왕상은 왕공의 아우이다. 21일에 태자가 황제에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時太子闇弱,會稽王道子昏荒,會,工外翻。遂不復推問。復,扶又翻;下同。王國寶夜叩禁門,欲入爲遺詔,侍中王爽拒之曰:「大行晏駕,皇太子未至,敢入者斬!」國寶乃止。爽,恭之弟也。辛酉,太子卽皇帝位,大赦。 .........................................중략..............................

 

 왕공이 들어가서 산릉으로 갔을 때 매번 정색을 하며 직언을 하여 사마도자가 그를 대단히 꺼렸다. 왕공이 조회를 마친 후 탄식하며 말하였다.

 "서까래와 기둥은 새 것이지만, 바로 서리의 탄식이 있겠구나!"

 王恭入赴山陵,每正色直言,道子深憚之。恭罷朝,歎曰:「榱棟雖新朝,直遙翻;下同。榱,所追翻。秦曰屋椽,齊、魯曰桷,周曰榱。便有《黍離》之歎!周大夫行役過故宗廟宮室,盡爲禾黍,故作《黍離》之詩。

 

 왕서가 왕국보에게 유세하기를, 왕공이 조회하러 들어오는 것을 이용하여 상왕에게 권하여 병사들을 숨겨두었다가 그를 죽이라고 했으나 왕국보가 허락하지 않았다. 사마도자가 조정의 안팎을 화목하게 하려고 이에 왕공에게 마음을 깊이 두어서 옛날에 있었던 나쁜 감정을 없애려고 하였지만 왕공이 정치를 언급할 때마다 번번이 사납게 말하며 얼굴색이 변하였다. 사마도자는 왕공과 화합하고 협력할 숭 ㅓㅄ음을 알고 마침내 그르 도모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緒說國寶,說,輸芮翻。因恭入朝,勸相王伏兵殺之,國寶不許。道子欲輯和內外,乃深布腹心於恭,冀除舊惡;而恭每言及時政,輒厲聲色。道子知恭不可和協,遂有相圖之志。

 

 ⑳. 11월, 연의 범양왕 모용덕이 안남왕 모용청 등을 시켜서 밤에 업성 아래에서 위의 군사를 공격하여 격파하니, 위의 군사가 물러나서 신성에 주둔하였다. 모용청 등이 그들을 추격하자고 요청하자 별가 한탁이 말하였다.

 ⑳. 燕范陽王德使南安王青等夜擊魏軍於鄴下,破之,魏軍退屯新城。新城,卽燕主垂攻鄴所築者也。青等請追擊之,別駕韓?曰:?,音卓。

 

 "옛 사람들은 먼저 계획하고 뒤에 싸웠습니다. 위의 군사에 대하여 추격할 수 없는 것은 네 가지인데, 현군과 멀리서 온 손님은 들판에서의 싸움에 유리한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이고, 경기에 가까이 깊이 들어가서 군사를 모아두는 것은 사지가 되니 두 번째이고, 선봉이 이미 패하고 났으니 후방의 진지는 바야흐로 견고하게 했을 것이니 세 번째이고, 저들은 수가 많고 우리는 수가 적으니 네 번째입니다.

 「古人先計而後戰。魏軍不可擊者四:懸軍遠客,利在野戰,一也;深入近畿,頓兵死地,二也;前鋒旣敗,後陣方固,三也;彼衆我寡,四也。

 

 관군이 의당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세 가지가 있는데, 스스로 그들의 지역에서 싸우는 것이 하나이고, 움직였다가 이기지 못하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단단해지기 어려운 것이 둘이고, 성과 해자가 아직 수리되지 않아서 적이 오면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셋입니다.

 官軍不宜動者三:自戰其地,一也;自戰其地者,衆易敗散。動而不勝,衆心難固,二也;城隍未修,敵來無備,三也。

 

 지금 위는 군수품과 군량이 없으니 깊이 도랑을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서 군사를 공고하게 하여 그들이 피로해지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모용덕이 그 말을 좇아서 모용청을 불러 돌아오도록 하였다. 모용청은 모용상의 형이다.

 今魏無資糧,不如深壘固軍以老之。」德從之,召青還。青,詳之兄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