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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則圍之,五則攻之[shízéwéizhī,wǔzégōngzhī]/處暑絶(00:45)初候膺乃祭鳥初日(음7/5)戊戌

solpee 2020. 8. 22. 20:28

《晉紀22  永和 12年 (丙辰, 356)

 

 ⑰. 연의 대사마 모용각이 단감을 광고에서 포위하자 제장들이 그를 급하게 치라고 하니 모용각이 말하였다.

 "군사를 사용하는 형세에는 마땅히 천천히 해야 할 경우가 있고, 마땅히 급하게 해야 할 경우가 있으니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⑰. 燕大司馬恪圍段龕於廣固,諸將請急攻之,恪曰:「用兵之勢,有宜緩者,有宜急者,不可不察。

 

 만약에 저들과 우리의 형세가 대적할 만하고, 밖으로 강력하게 원조하는 세력을 갖고 있고, 안으로 배반할 지도 모르는 걱정거리를 갖고 있다면 그들을 공격하는 것을 급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에 우리가 강하고 저들이 약하면서도 밖에는 아무도 원조할 것이 없다면 힘으로 충분히 그들을제압할 수 있는 경우에는 마땅히 고삐를 잡아당기며 그들을 지켜서 그들이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병법에서 '열 배로 포위하고 다섯 배로 공격한다.' 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한다.

 若彼我勢敵,外有強援,恐有腹背之患,則攻之不可不急。若我強彼弱,無援於外,力足制之者,當羈縻守之,以待其斃;兵法,十圍五攻,正謂此也。《孫子》曰:用兵之法,十則圍之,五則攻之。

 

 단감의 군사는 아직도 많고 마음이 흐트러지지는 않았고, 제남의 전투에서는 날카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단감이 이들을 사용하는데 전술을 갖지 못하여 패배를 가져왔을 뿐이었다. 지금 굳건한 성의 의지하여 막고 있으며, 위아래 사람들이 힘을 합하고 있으니, 우리가 모든 정예의 군사를 다 써서 그들을 공격한다면 날짜를 세면서 탈취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 병사를 많이 죽이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龕兵尚衆,未有離心;濟南之戰,卽淄水之戰。曰濟南者,以濟水南北大界言之。非不銳也,但龕用之無術,以取敗耳。今憑阻堅城,上下戮力,我盡銳攻之,計數日【章:十二行本「日」作「旬」;乙十一行本同;孔本同。】可拔,然殺吾士卒必多矣。

 

 중원에서 일을 해온 다음부터 군사들은 잠시도 쉬지 못하여 내가 매번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밤에 잠을 잊고 있는데, 어떻게 가볍게 그들이 죽을 때까지 사용할 수 있겠는가? 요점은 그들을 빼앗는데 있는 것이지, 반드시 공로를 세우는 일을 급하게 찾을 필요는 없다."

 自有事中原,兵不蹔息,蹔,與暫同。吾每念之,夜而忘寐,柰何輕用其死乎!要在取之,不必求功之速也!」

 

 제장들이 다들 말하였다.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군대 안에서 이 소식을 듣고 사람마다 모두 기쁨을 느꼈다. 이에 울타리를 높이고 참호를 깊게 파놓고 이곳을 지키니 제인들이 양식을 다투듯 운반하여 연의 군사들에게 갖다가 먹였다.

 諸將皆曰:「非所及也。」軍中聞之,人人感悅。於是爲高牆深塹以守之。塹,七豔翻。齊人爭運糧以饋燕軍。

 

 단감이 농성하며 스스로 지켰는데, 나무라는 길도 끊어버리니 성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단감이 부하들을 모아 나와서 싸우자 모용각이 포위망 속에서 그들을 격파하였고, 먼저 기병을 나누어 여러 성문에 주둔하게 하였다. 단감이 몸소 스스로 부딪쳐서 겨우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지만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죽었다. 이에 성 안에서는 기세가 저상하여 굳은 뜻을 가질 수가 없었다. 11월 14일에 단감이 면박하고 나와서 항복하였고, 아울러 주독까지 잡아서 계로 호송하였다.

 龕嬰城自守,樵采路絕,城中人相食。龕悉衆出戰,恪破之於圍裏,時外築長圍,故戰於圍裏。先分騎屯諸門,屯廣固城諸門也。騎,奇寄翻。龕身自衝盪,盪,徒朗翻,又他浪翻。僅而得入,餘兵皆沒。於是城中氣沮,莫有固志。沮,在呂翻。十一月,丙子,龕面縛出降,幷執朱禿送薊。降,戶江翻。薊,音計。

 

 모용각이 새롭게 백성이 된 사람들을 위무하고 편안하게 하여 제 지역을 모두 평정하고, 선비족· 호족· 갈족 3천여 호를 계로 옮겼다. 연왕 모용준이 주독에게 다섯 가지 형벌을 모두 주었고, 단감을 복순장군으로 삼았다. 모용각이 모용진을 남겨 두어 광고를 지키게 하고, 상서좌승 국은을 동래 태수로 삼고 장무 태수 선우광을 제군 태수로 삼고서 마침내 돌아왔다.

 恪撫安新民,悉定齊地,徙鮮卑、胡、羯三千餘戶于薊。燕主儁具朱禿五刑,朱禿殺慕容鉤而奔龕,見上卷十年。以段龕爲伏順將軍。恪留慕容塵鎭廣固,以尚書左丞鞠殷爲東萊太守,章武太守鮮于亮爲齊郡太守,乃還。

 

 국은은 국팽의 아들이다. 국팽은 그때 연나라의 대장추였는데, 편질 써서 국은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왕미와 조억에게는 반드시 자손이 잇을 것이니, 너는 불러서 잘 위무하고 옛날의 원한을 찾아내 오랜 화란이 될 근원을 만들지 마라."

 국은이 이들을 찾아서 왕미의 조카 왕립과 조억의 손자 조암을 산속에서 찾아내고 그들을 청하여 만나보고 깊이 정의를 나누며 관계를 맺고, 국팽이 다시 사자를 파견하여 거마와 의복을 주니 그 군의 백성들이 이로 말미암아서 크게 화합하였다.

 殷,彭之子也。彭時爲燕大長秋,以書戒殷曰:「王彌、曹嶷,必有子孫,嶷,魚力翻。汝善招撫,勿長亂源!」長,知兩翻。殷推求,得彌從子立、嶷孫巖於山中,請與相見,深結意分,從,才用翻;下同。分,扶問翻。彭復遣使遺以車馬衣服,復,扶又翻。遺,于季翻。郡民由是大和。鞠彭自東萊歸燕,見九十一卷元帝大興二年。

 

 순선은 단감이 이미 패배하엿다는 소식을 듣고, 물러나 하비로 돌아오면서 장군 제갈유와 고평 태수 유장이 3천 명을 거느리고 머무르면서 낭야를 지키게 하였고, 참군인 초국 사람 대둔 등이 2천 명을 거느리고 태산을 지키게 하였다. 연의 장수 모용난이 변성에 주둔하였는데, 순신이 공격하여 그의 목을 베었다.

 荀羨聞龕已敗,退還下邳,留將軍諸葛攸、高平太守劉莊將三千人守琅邪,參軍譙國戴?等二千人守泰山。楊正衡曰:?,音遁。燕將慕容蘭屯汴城,汴城,卽浚儀城。余謂「汴」當作「卞」。魯國卞縣城也。劉昫曰:兗州泗水縣,卞縣古城也。羨擊斬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