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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謨의 北伐不可論 / 寒蟬鳴3日(음7/2)乙未

solpee 2020. 8. 20. 05:52

《晉紀18 成 咸康 5 (己亥, 339)

 

 ③. 여름, 4월, 유량이 상소문을 올렸다.

 "촉은 아주 약하고 호족은 오히려 강하니, 큰 무리 10만 명을 거느리고 이동하여 석성을 공격하면서, 여러 군사를 보내 장강과 면수에 늘어놓고서 조를 정벌하는 계획을 세우고자 합니다."

 황제는 그것을 의논하도록 내려 보냈다. 승상 왕도가 이것을 허락하도록 청하였는데, 태위 치감이 의견을 내 놓았다.

 "쓸 만한 밑천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크게 거동할 수는 없습니다."

 ③. 夏,四月,庾亮上疏,言「蜀甚弱而胡尚強,欲帥大衆十萬移鎭石城,遣諸軍羅布江、沔爲伐趙之規。」帝下其議。下,遐稼翻。丞相導請許之。太尉鑒議,以爲「資用未備,不可大舉。」

 

 태상 채모가 '북벌 불가론'을 올렸다.

 "때에는 꽉 막힐 때와 형통할 때가 있으며, 도에는 구부려야 하는 것과 펴야 하는 것이 잇으니, 진실로 강한지 약한지를 계산해보지 않고 가벼이 움직이면 망하는 것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있을 것인데, 어찌 공로를 세우려고 하십니까?

 太常蔡謨議,以爲「時有否泰,〈否,部鄙翻。〉道有屈伸,苟不計強弱而輕動,則亡不終日,何功之有!

 

 오늘의 입장에서 계책을 세운다면 위엄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때가 맞는지 아닌지는 호족의 강약에 관계된 것이며, 호족들이 강한지 약한지는 석호의 능력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석륵이 일을 일으키면서부터 석호는 항상 조아가 되어서 백 번 싸워도 백 번 이기게 되고 드디어 중원 지역을 평정하였으니 그들이 점거하고 있는 땅은 위나라 시대와 같습니다.

 爲今之計,莫若養威以俟時。時之可否繫胡之強弱,胡之強弱繫石虎之能否。自石勒舉事,虎常爲爪牙,百戰百勝,遂定中原,所據之地,同於魏世。

 

 석륵이 죽은 다음에 석호가 뒤를 이은 군주를 끼고서 장군과 재상들을 죽였으며, 내부의 어려움도 이미 평정되고, 외구도 없앴으며, 한 번 군사를 들어서 금용을 점령하였고, 두 번째 싸워서 석생을 사로잡고, 석총을 죽이는 것은 마치 길에 떨어진 낙엽 줍듯 하고, 곽권을 탈취하는 것은 마치 마른나뭇가지를 흔들듯 하엿으니, 사방으로 경계지역 안에서는 한 자의 땅도 잃지 않았습니다.

 勒死之後,虎挾嗣君,誅將相;謂殺石堪、程遐、徐光諸將相也。內難旣平,難,乃旦翻。翦削外寇,一舉而拔金墉,再戰而禽石生,誅石聰如拾遣,取郭權如振槁,咸和八年,虎殺石聰,又拔金墉,進殺石生,九年,取郭權,事並見上卷。四境之內,不失尺土。

 

 이러한 것으로 볼 때 석호는 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장차 할 수 없겠습니까? 논의하는 자들은 호족들이 전에 양양을 공격하였다가 점령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릇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강한 사람도 한 개의 성을 점령하지 못한다고 하여 열등하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건대 활 쏘는 사람이 백 번 쏘아 백 번 맞추는 가운데 하나를 실 수한 것과 같으니 이를 무능하다고 말하겠습니까?

 以是觀之,虎爲能乎,將不能也?論者以胡前攻襄陽不能拔,事見上卷咸康元年。謂之無能爲。夫百戰百勝之強而以不拔一城爲劣,譬如射者百發百中而一失,可以謂之拙乎?中,竹仲翻。

 

 또 석우의 군사는 곁가지에 해당하는 군사였고, 환 평북장군은 변방을 책임지는 장수인데, 다툰 것이 변강에 있는 일이어서 이로우면 나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야 하는 급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정서장군은 중요하게 진수를 맡은 이름 나고 현명한 사람으로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고 황하의 남쪽을 석권하려고 하며, 석호는 반드시 스스로 한 전체의 무리를 인솔하고 와서 승패를 결정지으려고 하는데, 어찌 양양에서의 전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且石遇,偏師也,桓平北,邊將也,桓宣爲平北將軍。將,卽亮翻;下同。所爭者疆埸之士,【章:乙十一行本「士」作「土」;孔本同。】士,讀曰事。利則進,否則退,非所急也。今征西以重鎭名賢,自將大軍欲席卷河南,虎必自帥一國之衆來決勝負,卷,讀曰捲。帥,讀曰率。豈得以襄陽爲比哉!

 

 지금 정서장군이 그와 싸우려고 한다면 석생보다는 어떠합니까? 만약에 성을 지키려고 한다면 금용보다는 어떠합니까? 면수에서 저지하려고 한다면 대강보다는 어떠합니까? 석호를 막으려고 한다면 소준보다는 어떠합니까? 무릇 이 몇 가지의 것들을 의당 자세히 비교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今征西欲與之戰,何如石生?若欲城守,何如金墉?欲阻沔水,何如大江?欲拒石虎,何如蘇峻?凡此數者,宜詳校之。

 

 석생은 사나운 장수로 관중의 정예 병사를 가졌는데, 정서장군이 싸웠다면 아마도 거의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당시에 낙양과 관중에 있는 모든 군사를 들어서 석호를 쳤는데 지금은 이 세 진을 도리어 그가 사용하고 있고, 앞의 경우에 비교하면 한편은 배가 되고, 다른 한편은 반이 되는 형세여서 석생은 그 반을 대적할 수 없었는데, 정서장군은 그 배나 되는 것을 감당하려고 하니 어리석은 저는 의심하는 바입니다.

 石生猛將,關中精兵,征西之戰殆不能勝也!【章:十二行本「也」下有「金墉險固,劉曜十萬衆不能拔,征西之守殆不能勝也」二十一字;乙十一行本同;退齋校同;張校同,云無註本亦脫。】又當是時,洛陽、關中皆舉兵擊虎,今此三鎭反爲其用;洛陽、關中而曰三鎭,併郭權據上邽爲三也。方之於前,倍半之勢也;石生不能敵其半,而征西欲當其倍,愚所疑也。

 

 소준이 갖고 잇는 강함은 석호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면수가 험하다고 하여도 대강에는 미치지 못하니, 대강으로는 소준을 막을 수 없엇는데 면수를 가지고 석호를 막으려고 하니 또 의심하는 바입니다.

 옛날에 초에 있으면서 성의 북쪽 경계 지역에서 둔전을 하다가 호족이 와서 공격하므로 미리 군사 주둔지를 두어서 그 밖에서 막게 하였습니다.

 蘇峻之強不及石虎,沔水之險不及大江;大江不能禦蘇峻而欲以沔水禦石虎,又所疑也。昔祖士稚在譙,佃於城北界,佃,亭年翻。【張:「胡」上脫「慮」字。】來攻,豫置軍屯以禦其外。

 

 곡식이 장차 익으려 하자 호족들이 과연 나타낫고, 정부들은 밖에서 싸우고, 노약자들은 안에서 수확을 하였는데, 대부분이 큰 횃불을 갖고 있다가 급하게 되면 곡식을 불태우고 달아났습니다. 이와 같이 몇 년을 하자 결국 그것의 이로움을 얻지 못했습니다. 당시 호족은 오직 황하 북쪽만 점거하였으니, 바야흐로 오늘에 비하면 4분의 1이었을 뿐인데, 조사치가 그 하나를 막을 수 없엇는데, 정서장군은 그 네 배를 막으려 하니 또 의심하는 바입니다.

 穀將熟,胡果至,丁夫戰於外,老弱穫於內,穫,戶郭翻。多持炬火,急則燒穀而走。如此數年,竟不得其利。當是時,胡唯據河北,方之於今,四分之一耳;言祖逖與石勒對境時,勒僅有河北之地,比之今來石虎據有之地,止四分之一也。士稚不能捍其一而征西欲以禦其四,又所疑也。

 

 그러나 이것은 다만 정서장군이 이미 그곳에 도착한 다음의 일을 말하는 것뿐이고, 아직은 도로에 있는 염료스런 것을 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면수에서 서쪽으로 가면 물길은 급하고 강둑이 높아서 물고를 꿰듯이 물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앞에 가는 것에서 맨 뒤까지는 백 리쯤 될 것입니다. 만약에 호족이 송 양공과 같은 의로움을 갖지 아니하엿다면 우리가 아직 진을 치지 아니하였을 때 공격할 것인데, 장차 이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然此但論征西旣至之後耳,謂旣至中原之後也。尚未論道路之慮也。自沔以西,水急岸高,魚貫泝流,首尾百里。言水狹而急,舟不得駢爲一列而進也。若胡無宋襄之義,《左傳》:宋襄公及楚人戰于泓。宋人旣成列,楚人未旣濟,司馬子魚請擊之,公曰:「不可。」旣濟而未成列,又以告,公曰:「未可。」旣陳而後擊之,宋師敗績。國人皆咎公。公曰:「古之爲軍也,不以阻隘也;寡人雖亡國之餘,不鼓不成列。」及我未陣而擊之,將若之何?

 

 지금 왕토와 호족들과의 물길ㄹ과 육로의 형세가 다르며 익힌 것도 같지 않으며 호족들이 만약에 죽음을 바치려고 한다면 ㄱ스들을 대적하는 데에 여유가 있겟지만, 만약에 장강을 버리고 멀리까지 나아간다면 우리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저들이 잘하는 것을 공격하려는 것이니 아마도 묘승이라도 계산되지 않을 것입니다."

 조정에서 의논하니 대부분 채모와 같았다. 마침내 유랑에게 조서를 내려서 진지를 옮기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今王土與胡,水陸異勢,便習不同;南便於用舟,北便於用馬。胡若送死,則敵之有餘,若棄江遠進,以我所短擊彼所長,懼非廟勝之算。」蔡謨之議,量彼量己,深切著明;後郗鑒薦之自代,蓋有見乎此也。

朝議多與謨同。朝,直遙翻。乃詔亮不聽移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