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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將士同甘苦[yǔjiāngshìtónggānkǔ]/寒蟬鳴2日(음7/1)甲午

solpee 2020. 8. 19. 07:45

·《晉紀13 元 太興 3 (庚辰, 320)

 

 ⑪. 조적(東晉豫州刺史)의 장수 한잠이 후조의 장수 도포와 진천에 있는 옛 성(개봉)을 나누어서 점거하여 도표는 서대에 있고 한잠은 동대에 있는데, 도표는 남쪽에 있는 문으로, 한잠은 동쪽에 있는 문으로 출입하면서 서로 지키기를 40일간 계속하였다.

 ⑪. 祖逖將韓潛與後趙將桃豹分據陳川故城,豹居西臺,潛居東臺,豹由南門,潛由東門,出入相守四旬。

 

 조적이 포대에 흙을 채워 마치 쌀부대처럼 만들어서 이것을 대로 올려놓게 하고, 또 몇 사람에게 쌀을 짊어지고 가다가 길에서 쉬게 하였다. 도표의 군사들이 이를 쫓으니 짐을 버리고 달아낫다. 도표의 병사들은 오래 주렸는데 쌀을 얻게 되었지만 조적의 병사들이 풍족하고 배가 부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逖以布囊盛土如米狀,盛,時征翻。使千餘人運上臺,上,時掌翻。又使數人擔米,息於道。豹兵逐之,擔,他甘翻。棄擔而走。擔,都濫翻。豹兵久飢,得米,以爲逖士衆豐飽,益懼。先以囊盛土運之,潛所以疑之也;又使人擔米以餌豹兵,示之以實也。

 

 후조의 장수 유아당은 노새 1천 마리로 양식을 운반하여 도표에게 공급하는데, 조적이 한잠과 별장 풍철에게 이들을 변수에서 맞아 싸우게 하여 이것을 모두 노획하였다. 도표는 밤중에 숨어 도망하여 동연성에 가서 주둔하였는데, 조적이 한잠에게 봉구에 주둔하면서 그를 압박하게 하였다.

 後趙將劉夜堂以驢千頭運糧饋豹,逖使韓潛及別將馮鐵邀擊於汴水,《水經註》:蒗?渠水,自中牟東流,至浚儀縣,分爲二水,南流者曰沙水,東注者曰汴水;汴水東流入梁郡。盡獲之。豹宵遁,屯東燕城,卽漢東郡燕縣也,後魏置東燕縣,屬陳留郡,隋改爲胙城縣,屬東郡,唐屬滑州。豹兵已有懼心,糧又爲逖所獲,故宵遁也。逖使潛進屯封丘以逼之。

 

 풍철이 두 대를 점거하고 조적이 옹구를 진수하며 자주 군사를 파견하여 후조의 군사를 맞아 싸우니, 후조에게 진을 치고 막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조적에게 귀부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고, 그 경계 지역도 점차 오그라들었다.

 이보다 먼저 趙固·上官巳·李矩·郭默이 서로 공격하였는데, 조적이 사자를 보내서 이들을 화해시키며 화가 되는지 복이 되는지를 보여주니 드디어 모두가 조적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馮鐵據二臺,逖鎭雍丘,封丘、雍丘二縣,皆屬陳留郡。《春秋傳》,敗狄于長丘,在封丘界。雍丘,故杞國也。數遣兵邀擊後趙兵,數,所角翻。後趙鎭戍歸逖者甚多,境土漸蹙。

先是,趙固、上官巳、李矩、郭默,互相攻擊,逖馳使和解之,先,悉薦翻。使,疏吏翻;下同。示以禍福,遂皆受逖節度。

 

 가을, 7월에 조적에게 진서장군을 덧붙여주었다. 조적이 군대에 있으면서 장사들과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하고 자기를 절제하고 힘써 베풀고, 농업과 잠업을 힘써 권고하고 새로이 귀부한 사람들을 위로하여 받아주엇는데, 비록 관계가 소원하고 천한 사람일지라도 모두에게 은혜와 예의로써 교제하였다.

 秋,七月,詔加逖鎭西將軍。逖在軍,與將士同甘苦,約己務施,〈施,式豉翻。〉勸課農桑,撫納新附,雖疏賤者皆結以恩禮。

 

 황하의 연변에 있는 여러 보루에 있는 사람들은 먼저부터 이들을 후조의 인질로 보낸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에게 양쪽에 소속되어도 좋다고 허락하였는데, 때로 유격부대를 파견하여 거짓으로 그들을 노략질하는 척하여 그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았음을 밝혀주었다.

 河上諸塢,先有任子在後趙者,皆聽兩屬,居兩界之上者,聽其兩屬,因以爲間。時遣游軍僞抄之,抄,楚交翻。明其未附。

 

 오주들은 모두 은혜를 주고 있다고 느끼게 하여 후조에서 어떤 이상한 모의가 있을 것 같으면 번번이 비밀리에 알려주니 이로 말미암아서 이겨서 얻은 것이 많아 황하 이남은 대부분 후조를 배척하고 진으로 귀부하였다.

 塢主皆感恩,後趙有異謀,輒密以告,由是多所克獲,自河以南,多叛後趙歸于晉。

 

 조적은 군사를 훈령시키고 곡식을 쌓아놓고서 하북 지역을 탈취할 계책을 만들었다. 후조의 왕 석륵이 이를 걱정하여 마침내 유주에 명령을 내려서 조적을 위하여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묘를 수리하고 이 무덤을 지키는 두 집을 두고, 이를 통하여 조적에게 편지를 보내고 사자를 교환하며 호시를 하자고 하였다.

 逖練兵積穀,爲取河北之計。後趙王勒患之,乃下幽州爲逖脩祖、父墓,置守冢二家,逖,范陽人,其祖、父墓在焉。下,遐嫁翻。因與逖書,求通使及互市。

 

 조적이 회보하는 편지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호시하자는 것은 들어주었는데, 그 이익이 열 배나 되었다. 조적의 아문 동건이 신채내사 주밀을 죽이고, 후조에 항복하니 석륵이 그의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조적에게 보내며 말하였다.

 "반역한 신하와 도망한 관리는 내가 깊이 원수처럼 생각하는데, 장군이 싫어하는 것은 내가 싫어하는 것과 같소."

 逖不報書,而聽其互市,收利十倍。逖牙門童建殺新蔡內史周密,降于後趙,《姓譜》:顓頊子老童之後,以爲氏。勒斬之,送首於逖曰:「叛臣逃吏,吾之深仇,將軍之惡,猶吾惡也。」惡,烏路翻。

 

 조적은 이것을 대단한 덕이라고 생각하고 이로부터 후조 사람 가운데 배반하고 조적에게 귀부한 사람이 잇으면 조적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고 제장들에게 후조의 백성들을 침탈하거나 포학하게 굴지 못하게 금지시키거나 변경에서 조금 휴식을 얻게 되었다.

 逖深德之,自是後趙人叛歸逖者,逖皆不納,禁諸將不使侵暴後趙之民,邊境之間,稍得休息。逖聽河上諸塢兩屬,此用間之智也。然石勒爲逖脩祖、父墓,斬童建而送其首,亦所以懈逖推鋒越河之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