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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俗淫僻,恥尚失所[fēngsúyínpì,chǐshàngshīsuǒ]/立秋節末候寒蟬鳴初日(음6/28)壬辰

solpee 2020. 8. 16. 20:06

《晉紀11 愍 建興 4 (丙子, 316)

 

 ⑫. 간보가 평론하였다.

 ⑫. 干寶論曰:

 

 옛날에 고조선황제(사마의)는 영웅의 재질과 넓은 도량을 가지고 시대에 맞추어 일어났으며, 성품은 깊고 침착하여 마치 성을 쌓은 것 같았고, 관대하여 다른 사람을 받아들였고, 술수를 시행하여 사물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의 훌륭한 것을 알고 발탁하여 채용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그의 능력과 더불어 하니 위대한 법은 비로소 구성되었다.

 昔高祖宣皇帝,以雄才碩量,應時而起,性深阻有若城府,而能寬綽以容納;行數術以御物,而知人善采拔。言胸中有城府者多不能寬容,任數用術者多不能用人,而宣帝能之也。於是百姓與能,謂天下皆推其能,莫與爭也。大象始構。劉良曰:象,法也;言晉之興成,大法從此始立也。

 

 세종은 기업을 이어받고, 태조는 대업을 이어서 다르게 도모하려는 사람들을 모두 내쫓아내고 앞에서 세운 빛나는 업적을 녹아들게 하였다. 세조 때에 이르러서 드디어 皇極(천자의 자리)을 향유하게 되었으며, 어짊으로 아랫사람들을 후하게 해주었으며, 검소한 생활로 쓸 것을 충족시켰고, 화목하였지만 해이되지 않았으며, 관대하였지만 단안을 내릴 수 있어서 당우 시절의 옛터를 다 차지하고, 정삭을 팔황의 지역까지 반포하여서 이때에는 '천하는 가난한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었으니, 비록 태평성대라고 하기에는 미흡하지만 또한 백성들은 그 삶을 즐겼다고 하기에는 충분하였다.

 世宗承基,太祖繼業,威黜異圖,用融前烈。謂內誅李豐、夏侯玄,外平毌丘儉、文欽、諸葛誕。至于世祖,遂享皇極,呂延濟曰:享,當也;皇極,天子位也。仁以厚下,儉以足用,和而不弛,寬而能斷,斷,丁亂翻。掩唐、虞之舊域,班正朔於八荒,八荒,謂八方之外,戎荒之地。于時有「天下無窮人」之諺,呂向曰:言百姓盡富雖太平未洽,亦足以明民樂其生矣。樂,音洛。

 

 무황제가 이미 붕어하고, 능묘를 만든 흙이 마르기도 전에 변란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종실의 아들들은 도성을 보위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고, 師尹(고급관원) 가운데는 우러러 볼만큼 귀한 덕ㅇ늘 갖춘 사람이 없어서 아침에는 伊尹·周公 같지만 저녁이 되면 桀·盜跖처럼 되었으니 국정은 점차 난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갔고 금병(군대)은 박으로 나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方岳(지방 수령) 가운데에는 鈞石(鈞은  30斤, 4鈞을 石. 즉 균석 정도의 진중한 사람)정도가 되는 진이 없었고, 관문에는 풀을 묶어놓는 정도의 견고함도 없었다.(結草 정도의 방어 시설도 없었다.)

 武皇旣崩,山陵未乾而變難繼起。宗子無維城之助,乾,音干。宗子,謂八王搆難。《詩》曰:宗子維城。師尹無具瞻之貴,《詩》曰:赫赫師尹,民具爾瞻。朝爲伊、周,夕成桀、跖;謂楊駿、衞瓘、張華等。國政迭移於亂人,禁兵外散於四方,方岳無鈞石之鎭,關門無結草之固。三十斤爲鈞,四鈞爲石。《左傳》:秦伐晉,晉魏顆敗秦師,獲杜回。顆夢老人結草以亢杜回,杜回躓而顚,故獲之。

 

 융족·갈족도 制(천자의 命)라는 말을 쓰고, 두 명의 황제는 존귀한 지위를 잃었으니(懷帝 司馬熾, 愍帝 司馬業이 흉노 漢에 잡혀갔다) 왜 그러한가? 황제로 세워진 사람이 권한을 잃고, 재주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 부탁하였으니 四維(禮義廉恥:국가의 기강)는 넓혀지지 못하고 구차스러운 정치만 많다.

 무릇 기초가 넓으면 기울어지기가 어렵고, 뿌리가 깊으면 뽑히기가 어려우며, 조리와 절제가 있으면 어지러워지지 않고, 아교처럼 굳게 결합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 않는다. 옛날에 천하를 소유한 사람이 오래 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도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戎、羯稱制,二帝失尊,何哉?樹立失權,託付非才,四維不張而苟且之政多也賈誼《策》曰:禮義廉恥,是謂四維,四維不張,國乃滅亡。基廣則難傾,根深則難拔,理節則不亂,膠結則不遷。李周翰曰:理節,謂政敎有條理、節度也。膠,固也。言君布仁惠之根基深廣,又不失理節,則人心固結而不可遷也。昔之有天下者所以能長久,用此道也。

 

 주나라는 후직의 백성들을 아끼면서부터 16대가 지나고, 무왕이 처음으로 임금이 되었으니 그 기초를 쌓고 근본을 세운 것이 이처럼 단단하였던 것이다. 지금 晉이 일어나면서 그 기초를 만들고 근본을 세운 것에서 진실로 먼저 있었던 시대와는 달랐다. 그 위에 조정에는 순수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었고, 시골에는 不貳(두 번 허물을 짓지 않는 사람)한 노인이 부족하였으니, 풍속은 음란하고 간사하여 수치스러운 일과 숭상할 일이 알맞은 곳을 잃었다.

 周自后稷愛民,十六王而武始君之,后稷子不窋,不窋子鞠,鞠子公劉,公劉子慶節,慶節子皇僕,皇僕子差弗,差弗子毀隃,毀隃子公非,公非子高圉,高圉子亞圉,亞圉子公叔祖類,公叔祖類子古公亶父,古公亶父子季歷,季歷子文王,文王子武王,凡十六王。其積基樹本,如此其固。今晉之興也,其創基立本,固異於先代矣。加以朝寡純德之人,鄕乏不貳之老,《周官》有鄕老;不貳,謂不貳過者。朝,直遙翻。風俗淫僻,恥尚失所。言所恥者非所恥,所尚者非所尚也。

 

 학자는 노장을 으뜸으로 삼았고, 6경을 내쫓았으며, 담론하는 사람들은 텅비고 방탕한 것으로 변론하였고, 명분과 규범을 천하게 생각하였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방탕한 곳에 내맡기는 것으로 통달이라고 하고, 절의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좁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벼슬에 나아가는 사람은 억지로라도 얻기만 하면 귀하다고 여기고, 올바로 사는 것을 비루하다고 하였고, 관직을 맡은 사람은 헛된 것을 바라보는 것을 높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을 비웃었다.

 學者以莊、老爲宗而黜《六經》,談者以虛蕩爲辨而賤名檢,行身者以放濁爲通而狹節信,進仕者以苟得爲貴而鄙居正,當官者以望空爲高而笑勤恪。呂延濟曰:望空,謂不識是非,但望空署名而已。

 

 이리하여서 유송은 누누이 올바로 다스리는 도리를 말하였고, 부함은  매번 사악한 것을 지적하여 올바로 잡고자 하였지만 모두들 속된 관리라고 하였고, 그들은 헛되고 텅 빈 것에 기대고 아부하며 주견도 없는 사람은 모두가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만약에 무릇 문왕 같은 사람처럼 해가 기울어도 밥 먹을 틈이 없었고, 중산보처럼 주야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모두가 비웃음을 받아 쫒겨나서 재나 먼지로 취급되었다.

 是以劉頌屢言治道,傅咸每糾邪正,頌、咸事並見《武紀》、《惠記》。治,直吏翻。皆謂之俗吏;其倚杖虛曠,依阿無心者,皆名重海內。若夫文王日昃不暇食,仲山甫夙夜匪懈者,蓋共嗤黜以爲灰塵矣!文王自朝至于日中昃,不遑暇食,用咸和萬民。仲山甫夙夜匪懈以事一人。

 

 이로 말미암아서 비방을 받든 칭찬을 받든 선악의 실제에서는 어지러웠으며, 인정의 사특함은 재물을 바라는 길로 분주하게 달려갔으며, 선발하는 사람은 자기 사람들을 위하여 관직을 선택하고, 관직을 가진 사람은 자기 몸을 위하여 이익을 선택하니,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과 귀한 사람의 친척 자제들은 관직 등급의 순서를 뛰어 넘어 승진하고, 그 자질이나 순서에 구애받지 않았다.

 由是毀譽亂於善惡之實,情慝奔於貨欲之塗,選者爲人擇官,官者爲身擇利,呂延濟曰:言選者不復爲官擇賢,爲官者但擇所利而趨。譽,音余。爲,于僞翻。世族貴戚之子弟,陵邁超越,不拘資次。

 

 유유하게 흐르는 바람과 먼지는 모두 달려가고 다투는 인사들로 일어난 것이고, 늘어놓은 관직이 천 개 백 개라도 똑똑한 사람에게 양보하는 일은 없다. 자진이 '崇讓'을 저술하였지만 이를 살펴보는 사람이 없었고, 자아는 구반의 제도를 만들었지만 채용될 수 없었다.

 悠悠風塵,皆奔競之士;列官千百,無讓賢之舉。子眞著《崇讓》而莫之省,劉寔,字子眞;《崇讓論》見八十二卷武帝太康十年。省,悉景翻。子雅制九班而不得用。劉頌,字子雅。九班之制見同上。

 

 그래서 부녀자들은 여자가 하여야 할 일을 알지 못하였고,  마음 가는 것에 맡겨 움직였으니 시어머니를 거스르는 며느리가 있고, 잉첩을 살육하는 일이 있어도 부형은 그런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하지 않고, 천하 사람들도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다. 예의와 법도, 형벌과 정치는 여기에서 크게 무너졌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근본되는 것이 반드시 먼저 거꾸로 된다.'는 말은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다.

 其婦女不知女工,任情而動,有逆干舅姑,有殺戮妾媵,二事皆賈后爲之倡。父兄弗之罪也,天下莫之非也。禮法刑政,於此大壞,「國之將亡,本必先顚,」其此之謂乎!〈《左傳》曰:國將亡,本必先顚,而後枝葉從之。〉

 

 그러므로 완적의 행동을 보면 예교가 붕괴되고 해이하게 된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또 유순과 가충의 다툼을 살펴보면 사윤들 대부분이 사악함을 알 수 있고, 오 지역을 평정한 공로를 상고해 보면 장수들이 양보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곽흠이 냈던 꾀를 생각해 보면 융적들이 틈이 생긴 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부현과 유의의 말을 보면 백관들의 사악함을 찾을 수 있고, 부함의 상주문과 전신론의 핵심을 보면 총애하고 뇌물을 주는 일이 창궐하였음을 알 수 있다.

 故觀阮籍之行而覺禮敎崩弛之所由,事見七十八卷魏元帝景元三年。行,下孟翻。察庾純、賈充之爭而見師尹之多僻,事七十九卷武帝泰始七年、八年。考平吳之功而知將帥之不讓,思郭欽之謀而寤戎狄之有釁,平吳爭功及郭欽疏,並見八十一卷武帝太康元年。覽傅玄、劉毅之言而得百官之邪,傅玄、劉毅,武帝時爲司隸,前後糾核,不避貴游,因其所言而得百官之邪也。核傅咸之奏、《錢神》之論而覩寵賂之彰。傅咸奏見八十二卷惠帝元康四年;《錢神論》見八十三卷元康九年。

 

 백성들의 기풍은 국가의 형세인데, 이것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버록 중용의 재주와 법을 지키는 군주가 이를 다스린다고 하여도 오히려 혼란에 이를까 두려운 것인데, 하물며 우릐의 혜제가 방탕한 덕을 가지고서 여기에 임한대서야!

 懷帝는 혼란함을 이어서 즉위하였고, 강력한 신하들에게 얽매었으며, 愍帝는 도망 다니던 끝에 헛되이 빈이름만 지키고 있었다. 천하의 형세는 이미 가버렸고, 세상을 명령할 만한 영웅의 재주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를 다시금 빼앗을 수 없을 것이다."

 民風國勢,旣已如此,雖以中庸之才、守文之主治之,劉良曰:中庸,謂非賢非愚之才;守文,謂守常平治世之主也。治,直之翻。猶懼致亂,況我惠帝以放蕩之德臨之哉!懷帝承亂卽位,羈以強臣;愍帝奔播之後,徒守虛名。天下之勢旣去,非命世之雄材,不能復取之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