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辯則辯矣[biànzébiànyǐ]/立秋節中候白露降4日(음6/26)庚寅 光復節

solpee 2020. 8. 15. 11:45

《晉紀1 武 泰始 10 (甲午, 274)

 

 

 ⑫. 8월, 19일 원황후를 준양능에 장사지냈다. 황제와 여러 신하들은 상복을 벗고 바로 吉服(평상복)을 입었는데, 박사 진규가 논의하며 말하였다.

 "오늘 시점에서 시행하는 것은 한나라의 황제가 임시로 만든 것입니다. 태자는 국사를 처리할 일이 없으니 스스로 규정대로 상복을 끝까지 입어야 됩니다."

 ⑫.八月,戊申,葬元皇后于峻陽陵。帝及羣臣除喪卽吉,博士陳逵議,以爲「今時所行,漢帝權制;太子無有國事,自宜終服。」

 

 상서 두예가 말하였다

 "옛날에 천자·제후가 삼년상을 치르는 것은 처음에 齊衰(제최; 숙마포로 만들고 옷의 변두리와 아랫부분을 보통바느질 부모상에 입는다.)·斬衰(참최; 거친 생마포 상복 변두리 아랫부분 바느질하지 않음.부모상)를 똑같이 하였고, 장사를 지내고 나서는 상복을 벗는데, 諒闇(양암; 침묵하고 말을 않음)하며 있다가 心喪(마음 속으로 상복을 입은 것처럼 정성을 다함)을 하면서 복상기간을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周公은 高宗이 3년 간 복상했다는 말을 않고 '양암했다.'고만 말하였으니 이것이 심상 3년을 입었다는 글입니다.

 尚書杜預以爲「古者天子、諸侯三年之喪,始同齊、斬,謂齊衰、斬衰之服,其始自天子達於庶人,無以異也。齊,津夷翻。旣葬除服,諒闇以居,心喪終制。故周公不言高宗服喪三年而云諒闇,此服心喪之文也;周公作《無逸》曰:其在高宗作其卽位,乃或亮陰三年。杜預遂引此言以爲不服喪之證。闇,與陰同。孔安國曰:諒,信也;陰,默也。

 

 숙향은 경왕이 상복을 벗어버리는 것을 나무라지 않앗고 그가 연회를 열고 즐긴 것은 나무랐으니, 이미 일찍이 장사를 지낸 다음에 응당 상복을 벗었지만 그러나 양암하는 절차를 위반한 것을 밝혔습니다. 아들이 예를 지키는 것은 그 마음 속에 있을 뿐이고, 예를 지킨다는 것이 玉帛(제기와 상복)을 말하는 것이 아닌데, 상례가 어찌 衰麻(최마;상복)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叔向不譏景王除喪而譏其宴樂已早,明旣葬應除,而違諒闇之節也。《左傳》:晉荀躒如周葬穆后,旣葬,除喪,以文伯宴。叔向曰:「王其不終乎!吾聞之,所樂必卒焉。今王樂憂,若卒以憂,不可謂終。王一歲而有三年之喪二焉,於是乎以喪賓宴,樂憂甚矣。三年之喪,雖貴遂服,禮也。王雖弗遂,宴樂以早,亦非禮也。」樂,音洛。【章:甲十一行本「子」上有「君」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之於禮,存諸內而已;禮非玉帛之謂,《論語》:孔子曰:「禮云禮云,玉帛云乎哉!」喪豈衰麻之謂乎!衰,七回翻;下同。

 

 태자께서는 나가시면 군사들을 위무하시고 자리를 지키면 나라를 감독하셔야 하여 나라 일을 안 볼 수는 없으니, 의당 곡을 마치고서는 최마를 벗으시고 양암으로 3년을 마치십시오."

 황제가 이를 좇았다.

 太子出則撫軍,守則監國,《左傳》:晉大夫里克之言。監,古銜翻。不爲無事,宜卒哭除衰麻,卒,子恤翻。而以諒闇終三年。」帝從之。

 

 사마광이 말하였다.

 "규구는 방을 그리거나 원을 그리는 것을 주로 하는 것인데 그러나 보통의 장인은 규구가 없이는 방이든 원이든 만들 수 없습니다. 최마는 슬프고 애통하는 심정을 주로 표현한 것인데, 그러나 보통사람이 최마를 갖추지 아니하면 애통하는 슬픔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합니다. 소관의 시가 바로 이것을 쓴 것입니다.

 臣光曰:規矩主於方圓,然庸工無規矩則方圓不可得而制也;衰麻主於哀戚,然庸人無衰麻則哀戚不可得而勉也。《素冠》之詩,正爲是矣。衰,倉回翻。《詩‧素冠》,刺不能三年也。爲,于僞翻。

 

 두예는 교묘하게 서경과 좌전을 수식하여 당시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하게 하였지만, 변론은 변론일 뿐이어서 신은 진규의 말이 질박하고 생략되었지만 두텁고 알찬 것만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杜預飾經、傳以附人情,辯則辯矣,傳,直戀翻。臣謂不若陳逵之言質略而敦實也。

 

 

 ⑭. 두예가 황하의 맹진의 건널목이 험하기 때문에 부평진에 황하교를 건설하자고 청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였다.

 "은·주 때에 도음한 곳인데 역대의 성현들이 다리를 만들지 아니한 것은 반드시 세울 수 없었던 연고가 있었을 것입니다."

 두예는 굳게 이것을 만들자고 청하였다.

 다리가 완성되기에 이르자 황제는 백관들과 그곳에 가서 연회를 베풀면서 술잔을 들고 두예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 다리는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대답하엿다.

 "폐하의 밝으심이 아니었다면 신도 역시 그 재주를 써볼 수 없었습니다."

 ⑭. 杜預以孟津渡險,請建河橋於富平津。《水經註》:孟津又曰富平津。杜佑曰︰富平津在河陽縣南。議者以爲「殷、周所都,歷聖賢而不作者,必不可立故也。」殷都河內,周都洛,二代夾河建都,不立河橋,故以爲言。預固請爲之。及橋成,帝從百寮臨會,舉觴屬預曰:屬,之欲翻。「非君,此橋不立。」對曰:「非陛下之明,臣亦無所施其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