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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桓之行若狗彘[qíhuán zhī xíng ruò gǒuzhì]/大雨始行4日(음6/16)庚辰

solpee 2020. 8. 5. 03:50

《韓紀58 孝獻帝 建安 17 (壬辰, 212)

 

 

 ⑩. 겨울, 10월에 조조가 동쪽으로 가서 손권을 공격하였다. 동소가 조조 조조에게 말하였다.

 "옛날부터 신하 된 사람이 세상을 바로잡은 것 가운데 아직은 오늘날과 같은 공격을 이룬 일이 없었고, 오늘날과 같은 공적을 가지고서 아직은 오랫동안 신하의 형세로 머물러 있었던 자가 없었습니다.

 지금 명공께서는 덕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명예와 절개를 지키는 것을 즐겁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대신의 형세로 머물러 있어서 사람들에게 큰일을 가지고 자기를 의심하게 하니, 진실로 거듭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⑩. 冬,十月,曹操東擊孫權。董昭言於曹操曰:「自古以來,人臣匡世,未有今日之功;有今日之功,未有久處人臣之勢者也。處,昌呂翻;下同。今明公恥有慙德,樂保名節;樂,音洛。然處大臣之勢,使人以大事疑己,誠不可不重慮也。」重,直用翻。

 

 마침내 열후와 제장들과 더불어 논의하여 승상을 국공의 작위에 오르게 하고 九錫(천자가 특별한 공로자에게 내리는 9가지 선물;車馬,의복,樂則,朱戶,納幣,虎賁,弓矢,斧鉞,秬鬯)에 해당하는 물건을 갖추게 하여 남다른 공훈을 표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乃與列侯諸將議,以丞相宜進爵國公,九錫備物,以彰殊勳。賢曰:《禮含文嘉》曰:九錫,一曰車馬,二曰衣服,三曰樂器,四曰朱戶,五曰納陛,六曰虎賁百人,七曰斧鉞,八曰弓矢,九曰秬鬯。謂之九錫,錫,予也;九錫皆如其德。《左傳》曰:分魯公以大路、大旂、夏后氏之璜、封父之繁弱、祝宗、卜史、備物典策。

 

 순욱이 말하였다.

 "조공이 본래 의병을 일으켜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녕 되게 하셨으니, 충성스럽고 곧은 정성을 가지시고, 물러나고 양보하는 실제를 지키십시오. 군자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덕행으로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조조가 이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지 않았다.

 荀彧以爲:「曹公本興義兵以匡朝寧國,朝,直遙翻。秉忠貞之誠,守退讓之實;君子愛人以德,《記‧檀弓》,曾子曰:君子之愛人也以德,細人之愛人也以姑息。不宜如此。」操由是不悅。

 

 손권을 공격하기에 이르자 표문을 올려서 순욱에게 譙(안휘 박현)에서 군사를 위로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어서 번번이 순욱을 머물러 있게 하면서 시중·광록대부·지절·참승상군사의 직함을 갖게 하였다.

 조조의 군대가 유수로 향하자 순욱이 병을 이유로 수춘에 머물다가 약을 마시고 죽었다. 순욱은 의로움을 행하고 몸을 단정히 하면서 지혜와 꾀도 있었으며,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고 선비를 끌어올리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及擊孫權,表請彧勞軍于譙,勞,力到翻。因輒留彧,以侍中、光祿大夫、持節、參丞相軍事。輒,言專輒也。操軍向濡須,彧以疾留壽春,飲藥而卒。《彧傳》云:操饋之食,發視,乃空器也,於是飲藥而卒。《考異》曰:陳《志‧彧傳》曰:「以憂薨。」范《書‧彧傳》曰:「操饋之食,發視,乃空器也,於是飲藥而卒。」孫盛《魏氏春秋》亦同。按彧之死,操隱其誅。陳壽云以憂卒,蓋闕疑也。今不正言其飲藥,恐後世爲人上者,謂隱誅可得而行也。彧行義修整而有智謀,好推賢進士,故時人皆惜之。行,下孟翻。好,呼到翻。

 

 사마광이 말하였다.

 "공자가 인을 말씀하신 것은 중한 것이니, 자로· 염구·공서적 같은 문하의 뛰어난 제자로부터 영윤인 자문· 진문자 같은 제후의 현명한 대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기에 해당되기에는 부족하였지만, 유독 관중의 어짊만은 칭찬하였으니, 어찌 그가 제나라의 환공을 도와 백성들을 크게 구제해서가 아니겠습니까?

 臣光曰:孔子之言仁也重矣,自子路、冉求、公西赤門人之高第,令尹子文、陳文子諸侯之賢大夫,皆不足以當之,而獨稱管仲之仁,豈非以其輔佐齊桓,大濟生民乎!《論語》:孟武伯問:「子路仁乎?」子曰:「不知也。」又問。子曰:「由也,千乘之國,可使治其賦也,不知其仁也。」「求也何如?」曰:「求也,千室之邑,百乘之家,可使爲之宰也,不知其仁也。」「赤也何如?」曰:「赤也,束帶立於朝,可使與賓客言也,不知其仁也。」子張問曰:「令尹子文,三仕爲令尹,無喜色;三已之,無慍色。舊令尹之政,必以告新令尹。何如?」子曰:「忠矣。」曰:「仁矣乎?」曰:「未知,焉得仁?」「崔子弒齊君,陳文子有馬十乘,棄而違之,至於他邦,則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之一邦,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何如?」子曰:「清矣。」曰:「仁矣乎?」曰:「未知,焉得仁?」子貢曰:「管仲非仁者與?桓公殺公子糾,不能死,又相之。」子曰:「管仲相桓公,霸諸侯,一匡天下,民到于今受其賜;微管仲,吾其被髮左衽矣!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自經於溝瀆莫之知也!」子路曰:「桓公殺公子糾,召忽死之,管仲不死。」曰:「未仁乎?」子曰:「桓公九合諸侯,不以兵車,管仲之力也!如其仁!如其仁!」

 

 제나라 환공의 행실이 개나 돼지와 같았지만 관중이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그를 도운 것은 그 뜻이 대개 환공이 아니면 살아있는 백성들을 구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라라 말에 크게 혼란하여 많은 산 사람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자연히 세상에서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자가 아니면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순욱은 위 무제를 버리고 장차 누구를 섬기려고 하였습니까?

 齊桓之行若狗彘,管仲不羞而相之,行,下孟翻。相,息亮翻。其志蓋以非桓公則生民不可得而濟也。漢末大亂,羣生塗炭,自非高世之才不能濟也。然則荀彧捨魏武將誰事哉!

 

 제 환공 시절에 주나라 왕실이 비록 쇠하였지만 아직은 건안의 초기와 같지는 않았습니다. 건안 초기에는 천하가 동요하고 온통 뒤집혀 한 자의 땅과 한 명의 백성도 모두 한나라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순욱은 위 무제를 도와서 그를 일어나게 하였고,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하였으며, 병졸을 훈련시키고 군대를 독려하였으며, 기회를 결단하고 계책을 내어서 사방을 정벌하여 이기게 하고, 드디어 약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고, 어지러운 것을 변화시켜서 잘 다스려지게 하며 천하를 열로 나눠 여덟을 갖게 하였으니, 그의 공적이 어찌 관중보다 뒤지겠습니까? 관중은 자규를 위하여 죽지 않앗지만 순욱은 한 황실을 위하여 죽었으니, 그의 어짊은 또다시 관중보다 앞섰습니다.

 齊桓之時,周室雖衰,未若建安之初也。建安之初,四海蕩覆,尺土一民,皆非漢有。荀彧佐魏武而興之,舉賢用能,訓卒厲兵,決機發策,征伐四克,遂能以弱爲強,化亂爲治,治,直吏翻。十分天下而有其八,其功豈在管仲之後乎!管仲不死子糾而荀彧死漢室,其仁復居管仲之先矣!復,扶又翻。

 

 그러나 두목이 이에 말하였습니다. '순욱이 위 무제에게 연주를 빼앗으라고 권고하면서 그를 고조와 광무제에 비견하였었고, 관도에서 허 땅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않게 하면서 이를 초나라와 한나라에 비유하였지만, 사업이 이루어지고 공적이 완성되는 데에 이르러서는 한 왕조시대에서 명예를 얻고자 하였으니, 이를 비;유하자면 도둑에게 담장에 구멍을 뚫어 궤짝을 빼내도록 가르치고는 함께 끌어내지 않았다고 하여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而杜牧乃以爲「彧之勸魏武取兗州則比之高、光,官渡不令還許則比之楚、漢,及事就功畢,乃欲邀名於漢代,譬之敎盜穴牆發匱而不與同挈,得不爲盜乎!」

 

 신이 생각하건대, 공자가 '글이 본바탕보다 더 나으면 역사이다.'라고 하였으니, 무릇 역사를 쓰는 자가 남의 말을 기록하면서 반드시 이를 꾸미는 일이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위 무제를 고조·광무제·초나라·한나라에 비유한 것은 역사가가 쓴 글이지 어찌 모두 순욱이 입으로 한 말이겠습니까?

 臣以爲孔子稱「文勝質則史」,見《論語》。凡爲史者記人之言,必有以文之。然則比魏武於高、光、楚、漢者,史氏之文也,豈皆彧口所言邪!

 

 이것을 가지고 순욱을 깍아내린다면 그의 죄가 아닙니다. 또한 위 무제를 황제로 만들려고 하였다면 순욱은 좌명원공(천명을 보좌한 으뜸공로)이 되어 소하와 더불어 똑같은 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순욱은 이것을 이롭게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죽여서 명예를 구하기를 탐냈다고 하였으니, 어찌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겠습니까?"

 用是貶彧,非其罪矣。且使魏武爲帝,則彧爲佐命元功,與蕭何同賞矣;彧不利此而利於殺身以邀名,豈人情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