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避世據[bì shì jù]:燕南趙北[yàn nán zhào běi]//大暑節大雨始行初日(음6/13)丁丑

solpee 2020. 8. 2. 04:53

《韓紀53 孝獻帝 興平 2 (乙亥, 195)

 

 ⑮ 공손찬이 이미 유우를 죽이고서 유주를 거의 차지하여 사기가 더욱 왕성해지자, 그 재주와 힘을 믿고 백성을 구휼하지 않고 잘못한 것은 기억하고 잘한 것은 잊어버리며 눈만 흘기는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반드시 찾아내어 복수를 하였다. 

 의관을 갖춘 훌륭한 선비 가운데에서 명성이 그보다 나은 사람은 반드시 법을 가지고 해쳤고,  재주가 우수한 사람은 반드시 억눌러 어렵게 만들어 고통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하였다.

 ⑮公孫瓚旣殺劉虞,事見上卷初平四年。盡有幽州之地,志氣益盛,恃其才力,不恤百姓,記過忘善,睚眦必報。睚,牛懈翻。眦,土懈翻。衣冠善士,名在其右者,必以法害之,有材秀者,必抑困使在窮苦之地。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공손찬이 말하였다.

 "의관을 갖춘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그 직분을 가지고 자신이 귀한 것을 당연하다고 여겨서 다른 사람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총애를 받은 사람은 대부분 장사꾼이거나 평범한 사람들로 그들과 의형제를 맺거나 때로는 혼인관계를 맺고, 부임지에서는 빼앗고 포악한 짓을 하니 백성들이 그들을 원망하였다.

 或問其故,瓚曰:「衣冠皆自以職分當貴,不謝人惠。」分,扶問翻。故所寵愛,類多商販、庸兒,與爲兄弟,或結婚姻,所在侵暴,百姓怨之。

 

 유우의 종사인 어양(밀운) 사람 선우(朝鮮姓)보 등이 연합하여 주의 군대를 거느리고 함께 복수하려고 했는데, 연국대흥) 사람 염유가 평소에 은혜와 신의를 갖고 있기에 추대하여 오환사마로 삼았다.

 劉虞從事漁陽鮮于輔等,《姓譜》:鮮于,子姓,周武王封箕子於朝鮮,支子仲食采於于,因以鮮于爲氏。合率州兵欲共報仇,以燕國閻柔素有恩信,推爲烏桓司馬。應劭《漢官》曰:護烏桓校尉,有司馬二人,秩六百石。燕,於賢翻。

 

 염유는 호와 한족 수만 명을 불러 유인하여 공손찬이 임명한 어양태수 추단과 노성의 북방에서 싸워서 추단 등 4천여 급의 목을 베었다. 오환족의 초왕 역시 같은 종족 사람과 선비족 7천 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선우보를 따라 남으로 와서 유우의 아들 유화와 원소의 장수 국의를 기주에서 맞이하여 합하여 군사 10만 명이 함께 공손찬을 공격하여 鮑丘(지금의 潮白河)에서 공손찬을 격파하고 참수한 것이 2만여 급이었다.

 柔招誘胡、漢數萬人,與瓚所置漁陽太守鄒丹戰于潞北,誘,音酉。潞縣屬漁陽郡。斬丹等四千餘級。烏桓峭王亦率種人峭,七肖翻。種,章勇翻。及鮮卑七千餘騎,隨輔南迎虞子和與袁紹將麴義合兵十萬共攻瓚,破瓚於鮑丘,鮑丘,水名。《水經註》:鮑丘水從塞外來,南過漁陽縣東,和等破瓚處也。又南過潞縣西。賢曰:鮑丘水又謂之潞水,俗又謂之大榆河,在今幽州漁陽縣。斬首二萬餘級。

 

 이에 代郡(산서 양고)·廣陽(북경 대흥)·上谷(회래)·우북편(풍윤) 등에서 각각 공손찬이 임명한 장리를 죽이고, 다시 선우보와 유화의 병사와 연합하니 공손찬의 군대가 연거푸 패하였다.

 於是代郡、廣陽、上谷、右北平各殺瓚所置長吏,復與鮮于輔、劉和兵合,瓚軍屢敗。

 

 이에 앞서 동요가 있었다.

 "연은 남으로 드리우고, 조는 북으로 변방에 닿아 잇는데, 중앙은 크기가 맞지 않은 숫돌과 같은 곳, 오직 이곳만이 세란을 피할 수 있네."

 공손찬은 스스로 易 땅이 여기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이사하여 역을 진압하고 주위에 참호를 10중으로 파고 참호 안쪽에 높은 언덕을 쌓으니 모두 높이가 5~6장이며, 그 위에 누각을 지었고, 가운데 참호에도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특별히 높이가 10장이었고 자신이 거주하였다.

 先是有童謠曰:長,知兩翻。復,扶又翻。先,悉薦翻。「燕南垂,趙北際,中央不合大如礪,唯有此中可避世。」瓚自謂易地當之,遂徙鎭易,爲圍塹十重,於塹裏築京,皆高五六丈,爲樓其上;中塹爲京,特高十丈,《水經註》:易京,在易城西四五里,易水逕其南。賢曰:《前書》,易縣屬涿郡。《續漢志》曰:屬河間。瓚所居易京故城,在今幽州歸義縣南十八里。《爾雅》曰:絕高謂之京,非人力謂之丘。重,直龍翻;下同。高,居傲翻。塹,七豔翻。自居焉。

 

 쇠로 문을 만들고 좌우의 사람들도 물리쳤으며 남자로서 7세 이상이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오로지 처첩들과난 함께 거주하였다. 그의 장부와 문서는 모두 끈을 가지고 당겨서 위로 올렸다. 부인들에게는 큰 소리 내는 법을 익히도록 하여 그들에게 수백 보의 거리에서도 듣게 하여 교령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빈객을 멀리하고 친하고 신임하는 사람도 없겓 ㅚ자 모의할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이 점차 배반하고 떠나갔다.

 以鐵爲門,斥去左右,去,羌呂翻。男人七歲以上不得入門,專與姬妾居。其文簿、書記皆汲而上之。以繩索引之而上,若汲水然。上,時掌翻。令婦人習爲大聲,使聞數百步,聞,音問。以傳宣敎令。疏遠賓客,無所親信,遠,于願翻。謀臣猛將,稍稍乖散。

 

 이 이후 다시 공격하러 전쟁에 나가는 것이 드물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묻자 공손찬이 말하였다.

 "나는 옛날에 요새 밖에서 배반한 호족을 쫓아냈고, 맹진(하남)에서 황건적을 소탕하였는데, 당시 나는 손가락만 휘둘러도 천하가 평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소. 오늘에 이르러서 병란이 바야흐로 시작되니 이러한 것을 볼때 내가 해결할 것이 아니고 병사들을 쉬도록 하며 힘써 경작하여 흉년을 구제하는 것만 못하오.

 自此之後,希復攻戰。復,扶又翻。或問其故。瓚曰:「我昔驅畔胡於塞表,事見五十九卷靈帝中平五年。掃黃巾於孟津,事見上卷初平二年。當此之時,謂天下指麾可定。至於今日,兵革方始,觀此,非我所決,不如休兵力耕,以救凶年。

 

병법에는 100척의 높은 성루는 공격할 수 없다고 하였소. 지금 우리의 모든 군영의 樓櫓(정찰, 방어, 공격 용 망루)는 수십 겹이며, 곡식 300만 곡을 쌓아두었는데, 이 곡식을 다 먹는다면 천하의 일을 기대하기에 충분할 것이오."

 兵法,百樓不攻。今吾諸營樓樐數十重,賢曰:樐,卽櫓字,見《說文》。《釋名》曰:櫓,露也。上無覆屋。積穀三百萬斛,食盡此穀,足以待天下之事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