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孟德輕害士人,天下非之;맹덕이 가볍게 선비를 죽였기에 천하 사람들이 그를 비난하다.

solpee 2020. 4. 26. 16:43

《魏紀1 文帝 黃初 2 (辛, 221)

 

 

 25. 애초 태조가 답돈(蹋頓: 幽州 遼西 錦州 일대라고 하나 사실은 興隆일 것으로 보임)을 정복하고(207년)나서 오환 부족들이 점차 쇠퇴하였고, 선비 부족의 대인인 보도근·가비능·소리·미가·궐기 같은 사람들이 염유를 통하여 공헌물을  통시를 요구하니, 태조가 모두를 총애한다는 표문을 올려서 왕으로 삼게 하였다.

 25. 初,太祖旣克蹋頓,事見六十五卷漢獻帝建安十二年。蹋,徒臘翻。而烏桓浸衰,鮮卑大人步度根、軻比能、素利、彌加、厥機等因閻柔上貢獻,求通市,通關市,以其土物與中國互市也。上,時掌翻。太祖皆表寵以爲王。

 

 가비능은 본래 소종족의 선비족이었는데 용감하고 건전하며 염치가 있고 공평하여 많은 사람들을 복종시켰고 이로 말미암아서 여러 다른 부족들을 제압할 수 있었으며, 결국 가장 강성하게 되어서 雲中(托克托)·五原(包頭)의 동쪽에서부터 遼水(요녕성 변경이라 하나 지금의 灤河로 보임)까지를 선비족의 뜰로 만들었다.

 軻比能本小種鮮卑,種,章勇翻。以勇健廉平爲衆所服,由是能威制諸部,最爲強盛,徒勇健而不廉平,未必能制諸部也。自雲中、五原以東抵遼水,皆爲鮮卑庭。

 

 가비능은 소리·미가와 더불어 땅을 나누어 통솔하면서 각기 분계선을 갖고 있었다. 가비능의 부락은 변경 지역의 요새여서 중국인들이 많이 도망하거나 배반하고 귀부하였다. 소리 등은 遼西(遼寧 朝陽이라 하나 興隆으로 보임)·右北平(하북 豊潤)·漁陽(북경 密雲)의 요새 밖에 있어서 길이 멀어 변경에서의 걱정거리가 되지 아니하였다.

  軻比能與素利、彌加割地統御,各有分界。分,扶問翻。軻比能部落近塞,近,其靳翻。中國人多亡叛歸之;素利等在遼西、右北平、漁陽塞外,道遠,故不爲邊患。

 

 황제는 평로교위 건초를 호선비교위로 삼고 남양 태수 전예를 호오환교위로 삼아서 그들을 진무하게 하였다.

 帝以平虜校尉牽招爲護鮮卑校尉,南陽太守田豫爲護烏桓校尉,使鎭撫之。

 

※.조조의 요동정벌은 진황도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24. 황제는 오왕의 아들 손등을 만호후를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오왕은 손등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편지를 올려서 사양하였다. 다시 서조연인 오흥 사람 심형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감사의 뜻을 전하였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24. 帝欲封吳王子登爲萬戶侯,吳王以登年幼,上書辭不受;復遣西曹掾吳興【章:甲十六行本「興」作「郡」;乙十一行本同;孔本同。】沈珩入謝,《姓譜》:沈姓出吳興,本自周文王第十子耼季,食采於沈,卽汝南平輿沈亭是也,子孫以國爲氏。及楚莊王之子公子眞封於沈鹿,其後有沈尹戌、沈諸梁。珩,音行。幷獻方物。

 

 황제가 물었다.

 "오는 우리가 동쪽으로 향할 것이라고 의심하는가?"

 심형이 말하였다.

 "의심하지 않습니다."

 말하였다.

 "왜 그러한가?"

 대답하였다.

 "옛날에 맺은 맹약을 믿는데, 말하길 우호관계로 돌아가자고 하였으니, 그래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만약 위가 이 맹약을 어긴다면 우리 스스로 미리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帝問曰:「吳嫌魏東向乎?」珩曰:「不嫌。」曰:「何以?」曰:「信持舊盟,言歸于好,好,呼到翻。是以不嫌;若魏渝盟,自有豫備。」

 

 또다시 물었다.

 "듣건데 오의 태자가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하는데 정녕 그러한가?"

 심형이 말하였다.

 "신이 동조에 있어서 조회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연회에도 참여하지 않아서 이와같은 의논을 들은 바가 없습니다."

 황제는 그를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又問:「聞太子當來,寧然乎?」珩曰:「臣在東朝,朝不坐,宴不與,吳在江東,故曰東朝。「朝不坐宴不與」,《記‧檀弓》記尹商陽之言。朝,直遙翻。若此之議,無所聞也。」帝善之。

 

 오왕은 무창의 조대에서 술을 마시고 대취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신하들에게 물을 뿌리게 하고 말하였다.

 "오늘 술을 즐겨 마시는데, 오직 술에 취하여 이 조대 위에 쓰러지거든 그때 술마시기를 그칠 뿐이니라."

 장소가 정색을 하며 말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서 수레를 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장소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 말하였다.

 吳王於武昌臨釣臺《水經》,武昌有樊山,北背大江,江上有釣臺。飲酒,大醉,使人以水灑羣臣醉者,以水灑之醒,然後能飲。曰:「今日酣飲,惟醉墮臺中,乃當止耳!」張昭正色不言,出外,車中坐。王遣人呼昭還入,謂曰:

 

 "함께 즐기려고 한 것뿐인데, 공은 어찌하여 화를 내시오?"

 장소가 대답하였다.

 "예날에 주임금은 조구에 술 담은 연못을 만들어 밤새도록 술을 마셨는데①,  당시에도 역시 즐기는 것이라고 여겼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왕은 아무 말 없이 부끄러워하다가 드디어 술자리를 끝냈다.

「爲共作樂耳,樂,音洛;下同。公何爲怒乎?」昭對曰:「昔紂爲糟丘酒池,長夜之飲,紂以酒爲池,糟丘足以望七里,一鼓而牛飲者三千人。懸肉爲林,使男女倮逐於其間,爲長夜之飲。當時亦以爲樂,不以爲惡也。」王默然慙,遂罷酒。

 

 오왕과 여러 신하들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오왕이 스스로 일어나서 행주를 하엿는데 우번이 땅에 엎어져서 겉으로 취한 척하며 잡지 아니하였다. 왕이 지나가자 우번은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왕은 몹시 화가 나서 손칼로 그를 치려고 하니 모시고 앉았던 사람들이 두렵고 황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吳王與羣臣飲,自起行酒,虞翻伏地,陽醉不持;王去,翻起坐。翻爲是者,所以諫也。王大怒,手劍欲擊之,手劍,手援劍也。《記》曰:子手弓。手,守又翻。侍坐者莫不惶遽。坐,徂臥翻。

 

 오직 대사농 유기만이 일어나서 왕을 안고 간하였다.

 "대왕께서 세 잔의 술을 드신 다음(신하가 주군을 모시고 술을 마실 때 3잔 이상 마시지 않았다. 이는 취하여 그 절도를 잃을까 염려하여서였다.)에 손수 훌륭한 선비를 죽이시면 비록 우번에게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천하사람 가운데 누가 그것을 알겠습니까? 또한 대왕께서는 똑똑한 사람을 수용할 수 있어서 많은 인재를 모아놓으셨고, 그러므로 해내에서는 그 기풍을 멀리 바라보고 있는데, 오늘 하루아침에 이 사람들을 버리시려 하니 될 말입니까?"

 惟大司農劉基起抱王,諫曰:「大王以三爵之後,手殺善士,雖翻有罪,天下孰知之!古者,臣侍君宴,不過三爵,懼其失節也。且大王以能容賢蓄衆,故海內望風;今一朝棄之,可乎!」

 

 왕이 말하였다.

 "조맹덕은 오히려 공문거를 죽였는데, 고가 우번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다는 것이오?"

 유기가 말하였다.

 "조맹덕이 가볍게 선비들을 해쳤기에 천하 사람들이 그를 비난합니다. 대왕께서는 몸소 덕과 의를 실천하시며 요임금이나 순임금만큼 융성하게 하시려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스스로 그런 사람과 비굣하려고 하십니까?"

 王曰:「曹孟德尚殺孔文舉,事見六十五卷漢獻帝建安十三年。孤於虞翻何有哉!」基曰:「孟德輕害士人,天下非之。大王躬行德義,欲與堯、舜比隆,何得自喻於彼乎?」

 

 우번은 이 일로 말미암아서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다. 왕은 이어서 좌우 사람에게 칙령을 내려서 말하였다.

 "오늘 이후로 술을 마신 다음에 죽이겠다고 말한 경우에는 모두 죽일 수 없다."

 유기는 유요의 아들이다.

 翻由是得免。王因敕左右:「自今酒後言殺,皆不得殺。」基,繇之子也。劉繇爲孫策所襲,走死。

 

①. 紂以酒爲池,糟丘足以望七里,一鼓而牛飲者三千人。懸肉爲林,使男女倮逐於其間,爲長夜之飲。: 은의 말왕 紂(주)는 술로 연못을 만들었는데, 그 술 연못인 조구는 7리 정도(둘레 3km정도)가 되어서 한 번 북을 치면 소처럼 술을 마시는 사람이 3천 명이나 되었고, 고기를 매달아놓은 것이 마치 수풀 같았고 남녀가 그 사이에서 발가벗고 서로 좇으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