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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士皆食,爾乃嘗飯 사병들이 식사한 후에 식사/草木萌動 李花風 4日(음2/9).

solpee 2020. 3. 3. 16:38

《漢紀50 孝靈帝 中平 (甲子, 184)

 

 10. 황보숭과 주준이 승리한 기회를 타고서 전진하여 여남과 진국의 황건적을 토벌하고, 양적에 있는 파재를 추격하고, 서화에서 팽탈을 공격하여 나란히 이들을 쳐부수자 나머지의 도적도 항복하거나 흩어져서 세 군이 모두 평정되었다.

 10. 皇甫嵩、朱儁乘勝進討汝南、陳國黃巾,追波才於陽翟,擊彭脫於西華,《姓譜》:波,姓也。其先事王莽爲波水將軍,子孫以爲氏。陽翟縣,屬潁川郡。西華縣,屬汝南郡。賢曰:西華故城,在今陳州項城縣西;又曰,在今溵水縣西北。並破之,餘賊降散,降,戶江翻。三郡悉平。

 

 황보숭은 이에 그 상황을 편지로 올리면서 공을 주준에게 돌렸는데 이에 주준의 봉작을 올려서 서향후로 삼고, 진적중랑장으로 승진시켰다. 황보숭에게 조서를 내려서 동군을 토벌하게 하고 주준은 남양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嵩乃上言其狀,以功歸儁,於是進封儁西鄕侯,遷鎭賊中郎將。此因欲鎭安黃巾餘賊而置官。詔嵩討東郡,儁討南陽。

 

 북중랑장 노식이 장각과 잇달아 싸워서 쳐부수고 목을 배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만여 명이 되니 장각 등이 달아나서 광종을 지켰다. 노식은 포위망을 구축하고 참호를 파고 운제를 만들어 공격하여서 거의 그곳을 점령할 참이었다. 황제가 소황문 좌풍을 파견하여 군대를 감시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노식에겍 권고하기를 좌풍에게 뇌물을 보내라고 하였으나 노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좌풍이 돌아가서 황제에게 말하였다.

 北中郎將盧植連戰破張角,斬獲萬餘人,角等走保廣宗。廣宗縣,屬鉅鹿郡。賢曰:今貝州宗城縣。植築圍鑿塹,造作雲梯,垂當拔之。垂,幾也。塹,七艷翻。帝遣小黃門左豐視軍,或勸植以賂送豐,植不肯。豐還,言於帝曰:

 

 광종의 황건적을 쉽게 격파할 수가 있는데 노중랑장이 보루를 튼튼히 하고 군대를 휴식시키며, 하늘이 주살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제가 대노하여서 함거를 보내어 노식을 불러들였고, 사형에서 한 단계 감형하고, 동중랑장인 농서 사람 동탁을 파견하여 그를 대신토록 하였다.

「廣宗賊易破耳,易,以豉翻。盧中郎固壘息軍,以待天誅。」帝怒,檻車徵植,減死一等;遣東中郎將隴西董卓代之。盧植先爲北中郎將,卓爲東中郎將。四中郎將始於此。

 

 11. 파군 사람 장수가 요사한 술법으로 사람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그 술법이 대략 장각과 같아서 병이 난 집에 명령하여 쌀 다섯 말을 내게 하고 '五斗米師'라고 불렀다.

 가을, 7월에 장수가 군중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군과 현을 노략질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米賊'이라 불렀다.

 11. 巴郡張脩以妖術爲人療病,爲,于僞翻。其法略與張角同,令病家出五斗米,號「五斗米師」。秋,七月,脩聚衆反,寇郡縣;時人謂之「米賊」。《考異》曰:范《書‧靈帝紀》有此張脩。陳壽《魏志‧張魯傳》有「劉焉司馬張脩」,劉艾《典略》有「漢中張脩」,裴松之以爲「張脩」應是「張衡」,非《典略》之失,則傳寫之誤。案《魯傳》云:「祖父陵,父衡,皆爲五斗米道。衡死,魯復行之。」劉焉司馬張脩與魯同擊漢中,魯襲殺脩,非其父也。今此據范《書》。

 

 14. 겨울, 10월에 황보숭은 장각의 동생 장량과 맞서 광종에서 싸웠는데, 장량의 무리는 선발된 용감한 자들이어서 황보숭이 이길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이에 군영을 닫고 병사를 쉬게 하면서 그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적의 의지가 조금 풀어진 것을 알고서 마침내 은밀히 밤중에 병사를 챙겨 닭이 울자 말을 달려 그들의 진지로 달려가 싸우기를 포시에 이르었는데, 그들을 대파하여 장량의 목을 베고, 수급을 얻은 것이 3만여 급이었으며, 황하에 이르러서는 죽은 사람이 5만 명 정도였다.

 14. 冬,十月,皇甫嵩與張角弟梁戰於廣宗,梁衆精勇,嵩不能尅;明日,乃閉營休士以觀其變,知賊意稍懈,懈,居隘翻。乃潛夜勒兵,雞鳴,馳赴其陳,陳,讀曰陣。戰至晡時,大破之,斬梁,獲首三萬級,赴河死者五萬許人。

 

 장각은 먼저 이미 병으로 죽어서 부관류시하여 머리를 전거로 경사에 보냇다. 11월에 황보숭이 다시 하곡양에 있는 장각의 동생 장보를 공격하여 목을 베었으며, 모글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10여만 명이었다 즉시 황보숭에게 벼슬을 내려 좌거기장군으로 삼고, 기주 주목의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으며, 괴리후로 책봉하였다.

 角先已病死,剖棺戮屍,傳首京師。十一月,嵩復攻角弟寶於下曲陽,斬之,下曲陽縣,屬鉅鹿郡;以常山有上曲陽,故此稱下。復,扶又翻。斬獲十餘萬人。卽拜嵩爲左車騎將軍,領冀州牧,封槐里侯。

 

 황보숭은 능히 사졸들을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었으며, 군대가 행군하다 머무르게 되면 매번 군대의 막사를 세우도록 하고, 이렇게 한 후에야 자기 막사로 갔으며, 군사가 모두 식사를 할 때에도 이렇게 하고서야 마침내 밥을 먹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가는 곳마다 공로를 세웠다.

 嵩能溫卹士卒,每軍行頓止,須營幔修立,然後就舍,軍士皆食,爾乃嘗飯,爾,如此也。故所嚮有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