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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將亡,必多制/제도가 많아지면 나라가 망한다./ 草木萌動 李花風 3日(음2/8).

solpee 2020. 3. 1. 17:39

《漢紀49 孝靈帝 熹平 4 (乙卯, 175)

 

 1. 봄, 3월에 여러 유학자들에게 조서를 내려서《五經》의 문자를 바로잡게 하였고, 의랑(궁전 논의관) 채옹에게 고문과 전서, 예서 등 3종의 서체로 이것을 쓰고 비석(熹平石經)에 새겨서 태학의 문 빆에 세우게 하였다.

 1. 春,三月,詔諸儒正《五經》文字,命議郎蔡邕爲古文、篆、隸三體書之,刻石,立于太學門外。《雒陽記》曰:太學在雒陽城南開陽門外,講堂長十丈,廣二丈,堂前《石經》四部,本碑凡四十六枚。西行,《尚書》、《周易》、《公羊傳》十六碑存,十二碑毀。南行,《禮記》十五碑悉崩壞。東行,《論語》三碑毀。《禮記》碑上有諫議大夫馬日磾、議郎蔡邕名。古文,科斗書也。篆,大篆也。隸,今謂之八分書。後魏江式曰:伏羲氏作而八卦形其畫,軒轅氏興而靈龜彰其采。古史蒼頡覽二象之爻,觀鳥獸之迹,別刱文字,以代結繩。迄於三代,厥體頗異。雖依類取制,未能殊蒼氏矣。《周禮》:保氏敎國子以六書:一曰指事,二曰象形,三曰形聲,四曰會意,五曰轉注,六曰假借。蓋是史頡之遺法。及宣王太史史籀著《大篆》十五篇,與古文或同或異,時人卽謂之籀書。孔子修《六經》,左丘明述《春秋》,皆以古文。七國殊軌,文字乖別;秦兼天下,李斯奏罷不合秦文者。斯作《蒼頡篇》,車府令趙高作《爰歷篇》,太史令胡母敬作《博學篇》,皆取史籀,或頗有省改,所謂小篆者也。秦燒經書,滌除舊典,官獄繁多,以趣約易,始用隸書,古文由此息矣。隸書者,始皇使下杜人程邈附於小篆所作也。世人以邈徒隸,卽謂之隸書。故秦有八體:一曰大篆,二曰小篆,三曰符書,四曰蟲書,五曰摹印,六曰署書,七曰殳書,八曰隸書。漢興有尉律學,敎以籀書,又習八體。又有草書,莫知誰始,其書形雖無厥誼,亦是一時之變通也。孝宣時,召通《蒼頡》讀者,獨張敞從受之。涼州刺史杜業、沛人爰禮、講學大夫秦近亦能言之。孝平時,徵禮等百餘人說文字於未央宮中,黃門侍郎揚雄採以作《訓纂》。亡新居攝,使大司馬甄豐校文字之部,頗改定古文,時有六書:一曰古文,孔子壁中書也;二曰奇字,卽古文而異者;三曰篆書,云小篆也;四曰佐書,秦隸書也;五曰繆篆,所以摹印也;六曰鳥蟲,所以書幡信也。壁中書者,魯恭王壞孔子宅,而得《尚書》、《春秋》、《論語》、《孝經》也。又北平侯張蒼獻《春秋左氏傳》,書體與孔氏相類,卽前代之古文矣。後漢,郎中扶風曹喜號曰工篆,小異斯法,而甚精巧,自是後學,皆其法也。又詔侍中賈逵修理舊文,殊藝異術,王敎一端,苟有可以加於國者,靡不悉集。逵,卽汝南許愼古學之師也。愼嗟時人之好奇,歎俗儒之穿鑿,撰《說文解字》十五篇,類聚羣分,雜而不越,最可得而論也。左中郎將陳留蔡邕採李斯、曹喜之法,爲古今雜形。詔於太學立石碑,刊載《五經》,題書楷法,多是邕書。後開鴻都,書畫奇能莫不雲集。時諸方獻篆,無出邕者。魏初,博士清河張揖著《埤蒼》、《廣雅》、《古今字詁》,綴拾遺漏,增長事類,抑於文爲益,然其《字詁》方之許《篇》,古今體用,或得或失。陳留邯鄲淳亦與揖同時,善《倉》、《雅》、許氏字指,八體六書,精究閑理,有名於揖,又建《三字石經》於漢碑西,較之《說文》篆隸大同,而古字小異。又有京兆韋誕、河東衞覬二家,並號能篆,當時臺觀牓題、寶器之銘,悉是誕書,咸傳之子孫,世稱其妙。晉世,義陽王典祠令呂忱表上《字林》六卷,尋其況趣,附託許愼《說文》;而按偶章句,隱別古籀奇惑之字,文得正隸,不差篆意也。忱弟靜別放故左校令李登《聲類》之法,作《韻集》五卷,使宮商龣徴羽各爲一篇,而文字與兄便是魯、衞,音讀楚、夏,時有不同。皇魏承百王之季,世易風移,文字改變,篆形繆錯,隸體失眞,俗學鄙習,復加虛造,巧談辯士,以意爲疑,炫惑於時,難以釐改,乃曰「追來爲歸,巧言爲辯,小兔爲䨲,神虫爲蠶,」如斯甚衆,皆不合孔氏古書、史籀大篆、許氏《說文》、《石經》三字也。式言字學,本末頗詳,故備著之。趙明誠《金石錄》曰:《石經》,蓋漢靈帝熹平四年所立,其字則蔡邕小字八分書也;《後漢書‧儒林傳叙》云「爲古文、篆、隸三體」者,非也,蓋邕所書乃八分,而《三體石經》乃魏時所建也。洪氏《隸續》曰:《石經》見於范《史‧帝紀》及《儒林》、《宦者傳》,皆云《五經》。《蔡邕》、《張馴傳》則曰《六經》。惟《儒林傳》云:爲古文、篆、隸三體書法。酈氏《水經》云︰漢立《石經》於太學。魏正始中,又刻古文、篆、隸《三字石經》。《唐志》有《三字石經》古篆兩種,曰《尚書》,曰《左傳》。獨《隋志》所書異同,其目有《一字石經》七種,《三字石經》三種。旣以《七經》爲蔡邕書矣,又云魏立《一字石經》,乃其誤也。范蔚宗時,《三體石經》與熹平所鐫並列於學官,故史筆誤書其事,後人襲其譌錯,或不見石刻,無以考正。趙氏雖以一字爲中郎所書,而未見三體者。歐陽氏以三體爲漢碑,而未嘗見一字者。近世方勺作《泊宅編》,載其弟匋所跋《石經》,亦爲范《史》、《隋志》所惑,指三體爲漢字。至《公羊碑》有馬日磾等名,乃云世用其所正定之本,因存其名。可謂謬論。《北史》江式云:魏邯鄲淳以書敎皇子,建《三字石經》於漢碑西。按此碑以正始年中立。《漢書》云:元嘉元年,度尚命邯鄲淳作《曹娥碑》。時淳已弱冠,自元嘉至正始亦九十餘年。式以三字爲魏碑則是;謂之邯鄲淳所書,非也。

 

 이후의 유학자와 뒤에 배울 사람들에게 모두 올바른 것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비석이 처음 세워지니 그것을 보거나 모사하려는 사람이 타고 온 수레가 매일 천여 량씩 거리를 가득 매웠다.

 使後儒晚學咸取正焉。碑始立,其觀視及摹寫者車乘日千餘兩,塡塞街陌。乘,繩證翻。兩,音亮。塞,悉則翻。

 

 2. 애초 조정에서는 주와 군에서 서로 파당을 결성하여 사사로운 정으로 비호하는 것을 논의하고서 제를 내려 혼인한 집안이 두 주에 걸쳐진 인사는 서로 관직을 감독하거나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재차 삼호법(출신지제한법+혼인 관계 집안끼리 바꿔서 하는 금법)을 만들어 금기시 하는 것이 더욱 세밀해지고, 선발해 등용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워져서 유주와 기주 두 주에서는 오랫동안 결원이 생겨도 보충되지 않았다. 채옹이 상소를 올렸다.

 2. 初,朝議以州郡相黨,人情比周,比,毗至翻;下同。乃制昏姻之家及兩州人士不得對相監臨,監,古銜翻。至是復有三互法,賢曰:三互,謂婚姻之家及兩州人不得交互爲官也。復,扶又翻;下同。禁忌轉密,選用艱難,幽、冀二州久缺不補。蔡邕上疏曰:

 

 "엎드려 보건대, 유주와 기주는 옛날부터 있던 땅으로 갑옷과 말이 산출되는 곳이었으나 근년에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점차로 불모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관직을 결원된 채로 시일을 보내니 관리와 백성이 목을 빼고 기다리나 삼부에서는 선발하여 천거하는데 한 달이 넘어도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伏見幽、冀舊壤,鎧、馬所出,賢曰:鎧,甲也。《周禮‧考工記》曰:燕無函。函,亦甲也。言幽、燕之地,家家皆能爲函,故無函匠也。《左傳》曰:冀之北土,馬之所生。比年兵饑,漸至空耗。今者闕職經時,吏民延屬,比,毗至翻。延屬者,延頸而屬望也。屬,之欲翻。而三府選舉,踰月不定。

 

 신이 이상하게 여겨 그 연유를 물어보니 삼호법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11개 주에는 금령이 있어서 두 주에서만 뽑아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또한 이 두주의 인사에서 어떤 사람은 다시 근무연한의 제한을 받게 되니 의심하거나 지연되고 덮어버려서 두 주는 공중에 매달린 채로 있게 되어 만 리나 되는 지역이 쓸쓸하고 고요해져 관리 받고 매일 곳이 없습니다.

 臣怪問其故,云避三互。十一州有禁,當取二州而已。又,二州之士或復限以歲月,復,扶又翻;下同。狐疑遲淹,兩州懸空,萬里蕭條,無所管繫。

 

 우매한 저는 삼호법의 금령으로 이것을 금하는 것이 야박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단지 권위와 위엄을 늘리고 그 방법을 분명하게 하면 마주 보는 곳에서 서로 부주가 되게 해도 역시 두려워서 감히 사사로이 결탁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삼호법이 있는데 우엇을 족히 의심하려는 것입니까?

 愚以爲三互之禁,禁之薄者。今但申以威靈,明其憲令,對相部主,冀州之人刺幽州,幽州之人刺冀州,是爲對相部主。尚畏懼不敢營私;況乃三互,何足爲嫌!

 

 예전에 한안국은 형을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에서 일으켰고, 주매신은 숨겨지고 비천한 곳에서 나왔는데 나란히 재주로 보아 마땅하므로 돌아와 고향을 지켰으니 어찌 다시 삼호법에 따라 소소한 제약에 얽매일 것입니까?

 昔韓安國起自徒中,韓安國,梁人,坐法抵罪,梁內史缺,天子遣使拜爲梁內史,起徒中爲二千石。朱買臣出於幽賤,朱買臣,吳人,家貧,賣薪以自給,後隨計吏至長安,拜會稽太守。並以才宜,還守本邦,豈復顧循三互,繫以末制乎!

 

 신이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위로는 선황을 본받아 최근의 금령을 폐지하여 없애시고, 여러 주의 자사는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사람을 그릇으로 보아 등용하며 날짜와 삼호법에 구애받지 않고 그 속에서 인재를 차출하여야 합니다."

 조정에서는 따르지 않았다.

 臣願陛下上則先帝,蠲除近禁,其諸州刺史器用可換者,無拘日月、三互,以差厥中。」朝廷不從。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臣光曰:

 

 "숙향이 말한 적이 잇습니다. '나라가 장차 망할 때에는 반드시 제도가 번잡해진다.' 밝으신 군왕의 정치는 삼가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을 선발하여 이를 맡기고, 무릇 안팎의 신하 가운데 공적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죄가 있으면 바로 처벌하면 사사롭게 아첨하는 바가 없으며, 법과 제도가 번잡하지 않아도 천하는 크게 잘 다스려집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근본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叔向有言:「國將亡,必多制。」《左傳》叔向詒子產書之言也。明王之政,謹擇忠賢而任之,凡中外之臣,有功則賞,有罪則誅,無所阿私,法制不煩而天下大治。治,直吏翻。所以然者何哉?執其本故也。

 

 그것이 쇠퇴할 때에 이르면 백관을 맡길 때에인재를 선택할 수 없고, 금령은 더욱더 많아져서 막고 금하는 것은 더욱 조밀해지니 공이 잇는 사람은 법조문에 막혀서 상을 받지 못하고, 간신배는 법을 교묘하게 이용해 처벌을 면하게 되니 위아래가 수고롭고 소란스러워서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집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엽적인 것을 쫓기 때문입니다.

 及其衰也,百官之任不能擇人,而禁令益多,防閑益密,有功者以閡文不賞,閡,與礙同。爲姦者以巧法免誅,上下勞擾而天下大亂。所以然者何哉?逐其末故也。

 

 효령제 때 자사와 이천석 관리의 탐욕이 승냥이와 이리와 같아서 백성들을 포악하게 죽이니 비로소 조정에서 삼호법의 금령을 준수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이를 보면 충분히 웃을 만한 일이지만 어찌 깊이 굥계할 만하지 않습니까?"

 孝靈之時,刺史、二千石貪如豺虎,暴殄烝民,而朝廷方守三互之禁。以今視之,豈不適足爲笑而深可爲戒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