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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의 항복!

solpee 2020. 2. 14. 11:58

 

《魏紀10 元帝 景元 4 (癸未, 263)

 

 

 8. 등애가 나아가서 음평에 도착하자 정예의 병사들을 선발하여 제갈서와 함께 강유에서부터 성도로 나가려고 하였는데, 제갈서는 본래 통제 받고서 강유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서쪽으로 가는 것은 본래 조서에 있는 내용이 아니어서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백수를 향하여 가서 종회와 합쳤다.

 8. 鄧艾進至陰平,簡選精銳,欲與諸葛緒自江油趣成都,《水經註》:涪水出廣漢屬國剛氐道徼外,東南流,逕緜竹縣北,又東南逕江油戍北。鄧艾自陰平、景谷步道懸兵束馬入蜀,逕江油、廣漢者也。宋白曰:龍州江油郡北踰山至文州三百三十里。文州,漢陰平地也。鄧艾自陰平行無人之地七百里至江油,卽此。《九域志》:龍州北至文州四百三十里。《元豐九域志》:龍州治江油縣,南至綿州二百餘里。緒以本受節度邀姜維,西行非本詔,遂引軍向白水,此白水關也。賢曰:在今梁州金牛縣西,東北至關城百八十里。與鍾會合。

 

 종회는 군사세력을 자기가 오로지 하고자 하여 비밀리에 제갈서가 두려워하고 겁이 나서 나아가지 않았다고 보고하여 함거에 실려 불려서 돌아오게 하였고, 그의 군사들은 모두 종회에게 소속시켰다.

 강유가 군영을 늘어놓고 험한 곳을 지키니 종회가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으며, 양곡을 실어 나르는길은 험하고 멀어서 군사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려고 하였다.

 會欲專軍勢,密白緒畏懦不進,檻車徵還,軍悉屬會。

姜維列營守險,會攻之不能克,糧道險遠,軍食乏,欲引還。

 

 등애가 말씀을 올렸다.

 "적은 이미 꺾이고 부러졌으니, 의당 마침내 이러한 기운을 타야 하는데, 만약에 음평에서 지름길로 가서 한의 덕양정을 거쳐 부현으로 가는데 검각의 서쪽으로 100리쯤 되는 곳으로 나오게 되면 성도까지는 300리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鄧艾上言:「賊已摧折,宜遂乘之,若從陰平由邪徑經漢德陽亭按前漢無德陽縣。《後漢志》:廣漢郡始有德陽縣,蓋因漢故亭而置縣也。自蜀分廣漢置梓潼郡之後,劍閣縣屬梓潼,德陽縣屬廣漢。《續漢志》以爲德陽縣有劍閣。今姜維守劍閣拒鍾會,而鄧艾欲從德陽亭趣涪,則此時分爲兩縣明矣。然德陽亭亦非此時德陽縣治,蓋前漢德陽亭故處也。此道卽所謂陰平、景谷道。趣涪,趣,七喻翻。涪,音浮。出劍閣西百里,去成都三百餘里,

 

 기습병으로 그들의 심장부를 쳐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게 나온다면 검각을 지키는 군사들은 반드시 돌아와서 부현으로 갈 것이고, 그러면 종회는 방궤로 전진할 것이니 검각에 있는 수비군들이 돌아오지 않개 되어 부현에서 응대하는 병사들은 적을 것입니다."

 奇兵衝其腹心,出其不意,劍閣之守必還赴涪,則會方軌而進,劍閣之軍不還,則應涪之兵寡矣。」趣,七喻翻。涪,音浮。

 드디어 음평에서부터 아무 사람도 없는 700여 리를 가서 산을 깎어 길을 통하게 만들고 교각을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골짜기는 깊어서 아주 어렵고 험난한 상황에 이르렀고, 또 양식의 운반도 장차 부족한 형편이 되었으며 위태한 지경에 빠지는 경우가 되어 등애 자신도 자리를 싸들고 밀면서 굴러 내려갔다.

 遂自陰平行無人之地七百餘里,鑿山通道,造作橋閣。今隆慶府陰平縣北六十里有馬閣山,峻峭崚嶒,極爲艱險。鄧艾軍行至此,路不得通,乃懸車束馬,造作棧閣,始通江油,因名馬閣。又自文州青塘嶺至龍州百五十里,自北而南者,右肩不得易所負,謂之左擔路,亦艾伐蜀路也。據《鍾會傳》,艾自漢德陽亭入江油左擔道,則德陽亭蓋當馬閣山之路。山谷高深,至爲艱險,又糧運將匱,瀕於危殆,艾以氈自裹,推轉而下。推,吐雷翻。

 

 장사들은 모두 나무에 올라가 절벽을 이어가니 물고기가 꿰인것처럼 나아갔다.

 먼저 올라가서 강유에 도착하니 촉한의 수비 장수 마막이 항복하였다. 제갈첨은 여러 부대를 독려하여 등애에게 대항하였는데, 부현에 이르러서는 정지하여 머물면서 나가지 아니하였다.

 將士皆攀木緣崖,魚貫而進。山崖險陿,單行相繼而進,如貫魚然。先登至江油,江油,今龍州江油縣地,南至綿州二百餘里。綿州,古涪城也。蜀守將馬邈降。降,戶江翻;下同。諸葛瞻督諸軍拒艾,至涪,停住不進。陳壽曰:涪去成都三百六十里。

 

 상서랑 황숭은 황권의 아들인데, 누차 제갈첨에게 당연히 신속하게 나아가 험요한 곳을 점거하여서 적들이 평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으나, 제갈첨은 미적미적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숭이 새삼 이것을 말하였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으나, 제갈첨은 이말을  좇지 아니하였다.

 尚書郎黃崇,權之子也,黃權,劉璋所用,先主伐吳而敗,權隔在江北,遂降魏。屢勸瞻宜速行據險,無令敵得平地,瞻猶豫未納;崇再三言之,至于流涕,瞻不能從。

 

 등애는 드디어 먼 거리를 달려 앞으로 나가서 제갈첨의 선봉부대를 격파하였고 제갈첨은 면죽으로 물러나서 머물렀다. 등애가 편지를 써서 제갈첨을 유혹하였다.

 "만약 항복한다면 반드시 표문을 올려 낭야왕으로 삼겠소."

 제갈첨은 화가 나서 등애 사자의 목을 베고 진을 치고서 등애를 기다렸다.

 艾遂長驅而前,擊破瞻前鋒,瞻退住緜竹。緜竹縣,屬廣漢郡。今綿竹縣東北至綿州百餘里。艾以書誘瞻曰:「若降者,必表爲琅邪王。」諸葛氏,本琅邪人,故以此誘之。誘,音酉。瞻怒,斬艾使,列陳以待艾。使,疏吏翻。陳,讀曰陣;下同。

 

 등애는 아들인 해당정후 등충을 파견하여 그의 오른쪽으로 나아가게 하였고, 사마 사찬 등에게 그의 왼쪽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등충·사찬이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자 함께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서 말하였다.

 "아직은 도적들을 칠 수가 없습니다."

 艾遣子惠唐亭侯忠出其右,司馬師纂等出其左。忠、纂戰不利,並引還,曰:「賊未可擊!」

 

 등애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가림길이 이 한 번의 전투에 달려 있는데,  어찌 못할 수가 있겠느냐!"

 등충·사찬 등을 나무라고 장차 장차 이들의 목을 베려고 하였다. 등충·사찬이 말을 달려 나가 다시 싸워서 대파하고 제갈첨과 황숭의 목을 베었다.

 艾怒曰:「存亡之分,在此一舉,何不可之有!」叱忠、纂等,將斬之。忠、纂馳還更戰,大破,斬瞻及黃崇。

 

....................................중략..................................

瞻子尚歎曰:「父子荷國重恩,荷,下可翻。不早斬黃皓,使敗國殄民,用生何爲!」策馬冒陳而死。杜佑曰:漢州德陽縣,鄧艾破諸葛瞻於此,因爲京觀。敗,補邁翻。

漢人不意魏兵卒至,不爲城守調度;卒,讀曰猝。調,徒弔翻。聞艾已入平土,百姓擾擾,皆迸山澤,不可禁制。迸,比孟翻。漢主使羣臣會議,或以蜀之與吳,本爲與國,宜可奔吳;或以爲南中七郡,南中七郡:越巂、朱提、牂柯、雲南、興古、建寧、永昌也。阻險斗絕,易以自守,易,以豉翻。宜可奔南。光祿大夫譙周以爲:「自古以來,無寄他國爲天子者,若入吳國,亦當臣服。且治政不殊,則大能吞小,此數之自然也。治,直吏翻。由此言之,則魏能幷吳,吳不能幷魏明矣。等爲稱臣,爲小孰與爲大,爲,于僞翻。再辱之恥何與一辱!謂今降魏,一辱而已。若奔吳稱臣,是一辱矣;與吳俱亡,又將臣服於魏,是爲再辱。且若欲奔南,則當早爲之計,然後可果;果,決也,克也。今大敵已近,禍敗將及,羣小之心,無一可保,恐發足之日,其變不測,何至南之有乎!」謂衆心已離,旣行之後,中道潰散,必不能至南中。或曰:「今艾已不遠,恐不受降,如之何?」降,戶江翻;下同。周曰:「方今東吳未賓,事勢不得不受,受之不得不禮。若陛下降魏,魏不裂土以封陛下者,周請身詣京都,京都,謂洛陽,魏都。晉景王諱師,晉人避之,率謂京師爲京都。蜀方議降,譙周已爲晉人諱矣,吁!以古【張:「古」作「大」。】義爭之。」衆人皆從周議。漢主猶欲入南,狐疑未決。

 

 초주가 상소하였다.

 "남방은 멀리 떨어진 이적들이 사는 땅인데, 평상시 상공하는 일이 없었으면서도 오히려 자주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승상 제갈량이 군사적인 위엄을 가지고 그들을 몰아붙이니 궁해지게 되자 이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만약 남쪽으로 간다면 밖으로는 적에 대항하여야 하고, 안으로는 입고 움직이는 것을 공급해야 하므로 그 비용이 늘어날 것인데, 다른 곳에서 걷을 것이 없어 여러 이적들의 것을 소모하여야 할 것이므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한의 주군은 마침내 시중 장소 등을 파견하여 인새와 인수를 받들고 가서 등애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周上疏曰:「南方遠夷之地,平常無所供爲,言其民旣不出稅租以供上用,又不出力爲上有所施爲。猶數反叛,自丞相亮以兵威偪之,窮乃率從。事見七十卷文帝黃初六年。數,所角翻。今若至南,外當拒敵,內供服御,費用張廣,他無所取,耗損諸夷,其叛必矣!」漢主乃遣侍中張紹等奉璽綬以降於艾。璽,斯氏翻。綬,音受。

 

 북지왕 유심이 화가 나서 말하였다.

 "만약에 사리가 몰리고 힘이 모자라서 화란과 실패가 곧 닥칠 것이라면 마땅히 부자와 군신이 성을 등지고 한 번 싸우고 사직을 위하여 같이 죽어서 먼저 선황을 뵐 수 있게 하는 것이 옳거늘 어찌하여 항복한단 말입니까?"

 한황이 이 말을 듣지 아니하였다. 이날 유심은 소열제의 사당에 통곡하고 먼저 처자를 죽이고 나서 자살하였다.

 北地王諶怒曰:「若理窮力屈,禍敗將及,便當父子君臣背城一戰,同死社稷,以見先帝可也,諶,時壬翻。背,蒲妹翻。柰何降乎!」漢主不聽。是日,諶哭於昭烈之廟,先殺妻子而後自殺。曾謂庸禪有子如此乎!

 장소 등이 낙성에서 등애를 만나자, 등애가 크게 기뻐하면서 포상하며 받아들이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한황은 태복 장현을 파견하고, 강유에게 별도로 칙령을 내리고 종회에게 항복하였다. 또 상서령 이호를 파견하여 사민의 명적부를 등애에게 보냈는데, 호수는 28만 가구이고 인구는 94만 명이었으며, 갑사는 10만2천 명이었고 관리를 4만 명이었다.

 張紹等見鄧艾於雒,雒縣屬廣漢郡,東南至成都八十餘里。艾大喜,報書褒納。漢主遣太僕蔣顯別敕姜維使降鍾會,又遣尚書郎李虎送士民簿於艾,戶二十八萬,口九十四萬,甲士十萬二千,吏四萬人。

 

 등애가 성도의 성 북쪽에 도착하니, 한의 주군이 태자와 여러 왕들 그리고 여러 신하들 60여 명을 인솔하고 면박여친을 하고 군문에 나아갔다.

 등애가 지절을 앞세우고 결박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돌아와서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며, 장사들을 수습하고 통제하여 노략질하는 일이 없게 하고 항복하여 귀부한 사람들을 안무하고 그들에게 원래의 직업을 회복하게 하였다.

 艾至成都城北,漢主率太子、諸王及羣臣六十餘人,面縛輿櫬詣軍門。杜預曰:面縛,縛手於後,唯見其面也。櫬,棺也,示將受死。櫬,初覲翻。後主時年四十八。艾持節解縛焚櫬,延請相見;檢御將士,無得虜略,綏納降附,使復舊業;

 

 번번이 등우가 옛날에 했던 예에 의거하여 승제하여서 한의 왕 유선에게 벼슬을 주어 행표기장군으로 하고, 태자를 봉거도위로, 제왕을 부마도위로 하였다.

 한의 여러 관청에서는 각기 그 지위의 고하에 따라서 왕관으로 임명하거나 혹은 등애의 관속으로 관장하였다. 사찬에게 익주 자사의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농서 태수 견홍은 촉중에 있는 여러 군을 통괄하게 하였다.

 輒依鄧禹故事,承制拜漢王禪行驃騎將軍,太子奉車、諸王駙馬都尉,漢羣司各隨高下拜爲王官,或領艾官屬;依鄧禹承制授隗囂故事也,後艾由此得罪。驃,匹妙翻。以師纂領益州刺史,隴西太守牽弘等領蜀中諸郡。

 

 ...............................하략...........................................

 艾聞黃皓姦險,收閉,將殺之,皓賂艾左右,卒以得免。卒,子恤翻。

姜維等聞諸葛瞻敗,未知漢主所嚮,乃引軍東入于巴。巴,卽巴中也。鍾會進軍至涪,遣胡烈等追維。維至郪,郪縣屬廣漢郡。劉昫曰:梓州飛烏縣,漢郪縣地,隋取飛烏山以名縣。師古曰:郪,音妻,又音千私翻。得漢主敕命,乃令兵悉放仗,送節傳於胡烈,傳,株戀翻。自從東道與廖化、張翼、董厥等同詣會降。將士咸怒,拔刀斫石。觀此,則蜀之將士豈肯下人哉,其主不能用之耳!於是諸郡縣圍守皆被漢主敕罷兵降。圍守,卽魏延所置漢中諸圍之守兵也。鍾會厚待姜維等,皆權還其印綬節蓋。漢先主以獻帝建安十九年得蜀,魏文帝黃初二年卽帝位,傳二世、四十三年而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