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窮武之雄,斃於不仁(무을 끝까지 쓰면 어질지 못한 데서 죽는다.)蟄蟲始振 櫻桃風 末日(寅月念日).

solpee 2020. 2. 13. 02:36

 

《魏 高貴鄕公 甘露 3年 (戊寅, 258)

 

 

 1. 봄, 정월에 문흠이 제갈탄에게 말하였다.

 "장반·초이는 우리가 나가서 도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엿고, 전단·전역은 또 무리를 이끌고 거꾸로 투항하였으니, 이는 적이 대비하지 안을 때이므로 싸워볼 수 있습니다.

 1. 春,正月,文欽謂諸葛誕曰:「蔣班、焦彝謂我不能出而走,全端、全懌又率衆逆降,逆,迎也。降,戶江翻。此敵無備之時也,可以戰矣。」

 

 제갈탄과 당자 등오 모두 그러할 것으로 생각하고 드디어 크게 공격 도구를 만들어서 밤낮으로 5~6일 동안 남쪽의 포위망을 공격하여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고 하였다. 포위를 하고 있는 여러 부대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서 석차와 화전을 쏘아대니 도리어 그 공격 도구들이 불태워졌고, 화살이 비 오듯 하니 사상자가 땅을 덮었고 흐르는 피는 참호를 가득 채우게 되어 다시 성으로 올라왔다.

 誕及唐咨等皆以爲然,遂大爲攻具,晝夜五六日攻南圍,欲決圍而出。圍上諸軍臨高發石車火箭,石車,卽砲車也。車,昌遮翻。逆燒破其攻具,矢石雨下,死傷蔽地,血流盈塹,塹,七豔翻。復還城。

 

 성 안은 먹을 것이 고갈된 상태로 바뀌었고, 나아가서 항복한 자도 수만 이었다............................중략........................

 사마소가 몸소 스스로 포위망이 있는 곳까지 갔지만 성 위에서 활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쏘지 않는 것을 보고서 말하였다.

 "공격할 수 있겠다."

 城內食轉竭,出降者數萬口。欽欲盡出北方人省食,與吳人堅守,誕不聽,由是爭恨。欽素與誕有隙,徒以計合,事急愈相疑。言誕、欽初以詭計苟合,事急愈相猜疑。欽見誕計事,誕遂殺欽。欽子鴦、虎將兵在小城中,鴦、虎,欽二子也;時壽春蓋別有小城。聞欽死,勒兵赴之,衆不爲用,遂單走踰城出,自歸於司馬昭。軍吏請誅之,昭曰:「欽之罪不容誅,其子固應就戮;然鴦、虎以窮歸命,且城未拔,殺之是堅其心也。」乃赦鴦、虎,使將數百騎巡城,呼曰:呼,火故翻。「文欽之子猶不見殺,其餘何懼!」又表鴦、虎皆爲將軍,賜爵關內侯。城內皆喜,且日益饑困。司馬昭身自臨圍,見城上持弓者不發,曰:「可攻矣!」知其衆無拒守之心也。

 

 이에 사방에서 진군하여 동시에 북을 울리면서 성으로 올라갔다.

 2월 20일에 그곳에서 승리하였다. 제갈탄은 궁색하고 급박하여 혼자서 말을 타고 그 휘하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소성을 돌파하여 나가려고 하였으나, 사마 호분의 부하 병사들이 그를 공격하여 목을 베고 삼족을 이멸하였다. 제갈탄의 휘하에 있던 수백 명은 모두 손을 잡고 늘어서서 항복하지 아니하자 매번 한 명의 목이 베일 때마다 번번이 그들을 항복시키려 하였으나, 끝내 변하지 아니하여 다 죽이기에 이르렀다....................중략..................................

 乃四面進軍,同時鼓譟登城。二月,乙酉,克之。誕窘急,單馬將其麾下突小城欲出,司馬胡奮部兵擊斬之,夷其三族。誕麾下數百人,皆拱手爲列,不降,每斬一人,輒降之,降,戶江翻,下同。卒不變,以至於盡。史言諸葛誕得人心,人蒙其恩而爲之死。卒,子恤翻。

 吳將于詮曰:詮,且緣翻。「大丈夫受命其主,以兵救人,旣不能克,又束手於敵,吾弗取也。」乃免冑冒陳而死。陳,讀曰陣。唐咨、王祚等皆降。唐咨本魏人降吳,見七十卷文帝黃初六年。吳兵萬衆,器仗山積。

 

 사마소가 처음에 수춘을 포위하면서 왕기·석포 등이 모두 그곳을 급히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사마소는 생각하였다.

 "수춘의 성은 견고하고 무리들도 많아서 이를 공격하면 반드시 힘이 부칠 것이다. 만약 밖에서 구적들이 나타나면 안팎에서 적을 만나게 되니 이것은 위험한 길이다. 지금 세 명이 반란을 일으켜서 외로운 성 안에 모여 있는데, 하늘이 혹여 그들에게 같은 날에 죽게 할 것이니 나는 마땅히 온전한 대책으로 그들을 얽어맬 것이다.

 司馬昭初圍壽春,王基、石苞等皆欲急攻之,昭以爲「壽春城固而衆多,攻之必力屈;若有外寇,表裏受敵,此危道也。今三叛相聚於孤城之中,三叛,謂諸葛誕、文欽、唐咨也。天其或者使同就戮,吾當以全策縻之。

 

 그러나 삼면을 굳게 지키다가 만약에 오나라의 도적들이 육로로 오게 되면 군량이 반드시 적을 것이다. 나는 유격병과 경무장한 기병을 가지고 그들의 보급로를 끊어버리면 싸우지 않고도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오적이 격파되면 문흠 등을 반드시 사로잡게 될 것이다."

 이에 여러 군대에게 갑옧을 입고 이를 지키라고 명령을 하엿고 끝내 번잡하게 공격하지 아니하고 격파하였다.

 但堅守三面,若吳賊陸道而來,軍糧必少;吾以游兵輕騎絕其轉輸,可不戰而破也。吳賊破,欽等必成禽矣!」乃命諸軍按甲而守之,卒不煩攻而破。卒,子恤翻。

 

 건의하는 사람들은 또한 생각하였다.

 "회남 지역은 여전히 반역을 하였고, 오군들의 가족들은 강남 지역에 잇으니 내버려 둘 수 없으며 의당 이들을 모두 땅에 묻어버려야 합니다."

 사마소가 말하였다.

 "옛날의 용병술은 나라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을 최상의 것으로 생각하였으니 그 우두머리의 목을 베는 것뿐이다. 오군들이 패망하여 돌아가게 된다면 바로 중국의 커다란 도량을 보여주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명도 죽이는 일이 없었고, 삼하 근처에 있는 군에 나누어 보내서 그들을 편안히 내버려두게 하였다.

 議者又以爲「淮南仍爲叛逆,仍,相因也。吳兵室家在江南,不可縱,宜悉坑之。」昭曰:「古之用兵,全國爲上,戮其元惡而已。言全其國之人民,止戮其君;所謂誅其君而弔其民也。吳兵就得亡還,適可以示中國之大度耳。」一無所殺,分布三河近郡以安處之。河南,都也;河東、河內皆近京師。處,昌呂翻。

 

 당장에게 벼슬을 주어 안원장군으로 삼고 그 나머지의 비장들에게도 모두 임시로 관위와 명호를 붙여주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그리고 회남 지역의 장령과 병사, 관리나 백성들 가운데 제갈탄의 협박을 받아서 노략질한 자들을 모두 사면하였다. 또한 문앙 형제가 그들의 아버지의 시체를 거둔다는 소식을 듣고, 수레와 소를 주어서 옛 조상들의 묘역에 장사지내게 하였다.

 拜唐咨安遠將軍,其餘裨將,咸假位號,衆皆悅服。其淮南將士吏民爲誕所脅略者,皆赦之。聽文鴦兄弟收斂父喪,給其車牛,致葬舊墓。文欽,譙人也,舊墓在焉。斂,力贍翻。

 사마소가 왕기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초에 건의한 자들이 여러 이야기를 하였는데, 부대를 옮기기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지만 그때는 아직 직접 가보지 않아서 나 또한 마땅히 그러할 것이라 생각하였소. 장군은 이해관계를 깊이 계산하고 홀로 굳은 의지를 가지고서 위로는 조서로 내린 명령을 어기고, 아래로는 많은 사람들의 건의를 막아가면서 끝내 적을 제압하고 도적을 사로잡는데 이르렀으니, 비록 옛 사람이 서술한 전략이라고 하여도 이것을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오."

昭遺王基書曰:遺,于季翻。「初議者云云,求移者甚衆,謂前詔諸軍轉據北山。時未臨履,亦謂宜然。臨履,謂親臨其地而履行營壘處所也。將軍深算利害,獨秉固志,上違詔命,下拒衆議,終至制敵禽賊,雖古人所述,不是過也。」

 

 사마소는 경무장한 여러 부대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깊이 들어가서 당자 등의 자제를 초청하여 맞아들이고 틈을 보아서 오를 멸망시킬 형세를 잡으려고 하였다.

 왕기가 간하였다.

 "옛날에 제갈각이 동관에서의 승리를 틈타서 강표의 병사들을 다 긁어모아서 신성을 포위하엿으나, 성은 점령할 수 없었고 무리들 가운데 죽은 사람이 반을 넘었습니다. 강유는 도수의 서쪽에서 승리한 것 때문에 경무장으로 깊이 들어왔다가 보급이 이어지지 아니하여 군대는 상규에서 복멸되었습니다.

 昭欲遣諸軍輕兵深入,招迎唐咨等子弟,因釁有滅吳之勢。王基諫曰:「昔諸葛恪乘東關之勝,竭江表之兵以圍新城,城旣不拔,而死者大半。事見上卷邵陵厲公嘉平五年。姜維因洮西之利,輕兵深入,糧餉不繼,軍覆上邽。謂段谷之敗也。

 

 무릇 승리를 한 다음에는 위아래 사람이 적을 가벼이 보게 되고, 적을 가벼이 보게 되면 곤란한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깊지 아니하게 됩니다. 지금 도적들은 밖에서 막 실패하였고, 또 안으로도 우환이 기치지를 아니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대비하고 시설을 만들고 염려하는 때입니다.

 夫大捷之後,上下輕敵,輕敵則慮難不深。難,乃旦翻。今賊新敗於外,又內患未弭,謂孫綝君臣相猜。是其脩備設慮之時也。

 

 또한 병사들이 밖에 출정하여 해를 넘겨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갈 뜻을 가지고 있을 터인데, 지금 포로로 잡은 것이 10만여 명이고, 죄인도 잡았으니, 역대의 정벌 가운데 병사를 온전히 하고 승리만 한 것으로 오늘만큼 성대하였던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且兵出踰年,人有歸志,今俘馘十萬,罪人斯得,謂禽諸葛誕也。《書》曰:周公居東二年,則罪人斯得。自歷代征伐,未有全兵獨克如今之盛者也。

 

 무황제께서 원소를 관도에서 이기고 스스로 잡은 사람이 이미 많다고 하여 다시 뒤쫓지 아니하는 것은 위엄이 좌절될까 걱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마소가 마침내 그쳤다. 왕기를 정동장군·도독양주제군사로 삼고, 작귀를 올려 동무후로 책봉하였다.

 武皇帝克袁紹於官渡,自以所獲已多,不復追奔,復,扶又翻。懼挫威也。」事見六十二卷漢獻帝建安五年。昭乃止。以基爲征東將軍、都督揚州諸軍事,進封東武侯。

 

 습착치가 평론하였다.

 習鑿齒曰:

 

 "군사들은 사마대장군이 이 전역에서 덕을 가지고 공격할 수 있었다고 말할 만하다고 생각하염ㅅ다. 무릇 대업을 세운 사람은 각기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잇고, 각각 그 숭상하는 바를 갖고 있지만 여러 가지를 겸하여 가질 수는 없다.

 君子謂司馬大將軍於是役也,可謂能以德攻矣。《左傳》:晉文公城濮之勝,君子謂晉於是役也能以德攻。夫建業者異道,各有所尚而不能兼幷也。

 

 그러므로 무력을 끝까지 쓰는 영웅은 어질지 못한 데서 죽게 되고, 의를 갖고 있는 나라는 나약하고 물러나는데서 잃게 된다. 지금 한 번의 정벌을 통하여 세 명의 반란분자를 잡았고, 오의 무리를 크게 포로로 잡았으며, 회포 일대를 석권하고 포포로 잡은것이 10만여 명이나 되니 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故窮武之雄,斃於不仁;如夫差、智伯是也。存義之國,喪於懦退。如宋襄公是也。喪,息浪翻。今一征而禽三叛,大虜吳衆,席卷淮浦,俘馘十萬,生虜爲俘,截耳爲馘。古者戰勝,馘所格之左耳而獻之。可謂壯矣。

 

 그러나 아직은 편안하게 자리에 앉게 되지는 아니하였으니, 왕기가 세운 공로를 상 주었고, 오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이류들에게 정을 맺었다. 문앙에게 은총을 내려서 문흠을 장사지내게 하여서 과거의 벌어진 틈을 잊었고, 제갈탄을 좇았던 무리들에게 허물을 주지 아니하였으며, 양주 지역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갖게 하였다.

 而未及安坐,賞王基之功;種惠吳人,結異類之情;《書》曰:皋陶邁種德。孔安國《註》曰:種,布也。夫種則有穫,種惠於吳人,使歸心中國,以成他日混一之功,如種藝之有秋也。寵鴦葬欽,忘疇昔之隙;不咎誕衆,使揚土懷愧。

 

 공로는 높아서 사람들은 그의 성공을 즐거워하였고, 업적은 넓어서 적들이 그의 덕을 품게 하였다. 그의 무력은 빛나서 벌써 두루 퍼지고, 그의 문치는 흡족할  만하니 이런한 도를 밀고 나간다면 천하의 그 누가 이것을 당할 수 있겠는가?"

 功高而人樂其成,業廣而敵懷其德。樂,音洛。武昭旣敷,文算又洽,推是道也,天下其孰能當之哉!鑿齒,晉人,其辭蓋有溢美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