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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릉여공을 폐하고 고귀향공을 세웠다. 蟄蟲始振 櫻桃風 3日(음 正月18日).

solpee 2020. 2. 9. 21:03

 

《魏 高貴鄕公 正元 元年 (甲戌, 254)

 

 

 7. 황제는 이풍이 죽자 속으로 특별히 불평하였다. 안동장군 사마소가 허창에서 진수하고 있었는데, 그를 불러서 강유를 공격하라고 조서를 내렸다.

 9월에 사마소가 병사를 거느리고 들어와서 황제를 알현하였는데, 황제가 평락관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검열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황제에게  권고하기를 사마소가 작별의 말씀을 드리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를 죽이고, 그 병사들을 챙겨서 대장군을 물리치라고 하였다. 이미 앞서 조서를 다 써놓았으나, 황제는 두려워서 감히 명령을 발동하지 못하였다.

 7. 帝以李豐之死,意殊不平。安東將軍司馬昭鎭許昌,詔召之使擊姜維。九月,昭領兵入見,帝幸平樂觀以臨軍過。見,賢遍翻。樂,音洛。觀,古玩翻。左右勸帝因昭辭,殺之,勒兵以退大將軍;已書詔於前,帝懼,不敢發。

 

 사마소가 병사를 이끌고 성으로 들어가니 대장군 사마사가 이에 황제를 폐위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19일에 사마사가 황태후의 명령으로 여러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회의를 하며 황제가 황음하고 절도가 없어서 창우들과 외설스럽게 가까이하고 있어서 천자의 자리를 이을 수 없다고 하니 군신들은 모두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昭引兵入城,大將軍師乃謀廢帝。平樂觀在洛陽城西,昭已過軍,復引入城,帝事去矣。甲戌,師以皇太后令召羣臣會議,矯太后令以召羣臣。以帝荒淫無度,褻近倡優,倡,齒良翻。倡優,女樂也。近,其靳翻。不可以承天緒;羣臣皆莫敢違。

 

 이에 주청하기를 황제의 인새와 인수를 거두어들이고 제 지역에 있는 번국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하였다. 곽지로 하여금 들어가서 태후에게 아뢰게 하였고, 태후가 바야흐로 황제와 마주앉아 있었는데, 곽지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대장군이 폐하를 폐위시키고, 팽성왕 조거를 세우고자 합니다."

 이 말을 듣고서 황제가 일어나서 나갔고, 태후는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乃奏收帝璽綬,歸藩于齊。璽,斯氏翻。綬,音受。使郭芝入白太后,太后方與帝對坐,芝謂帝曰:「大將軍欲廢陛下,立彭城王據!」彭城王據,文帝子。此何等語!芝,太后之從父也,故使之入脅太后。帝乃起去。太后不悅。

 

 곽지가 말하였다.

 "태후께서는 아들을 두시고 제대로 가르칠 수 없었으니 지금 대장군이 마음으로 이미 결정하였습니다. 또한 군사를 동원하여 밖에서 비상사태를 대비하고 있으니, 다만 그 뜻에 따르셔야지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태후가 말하였다.

 "나는 대장군을 보고자 하며, 입으로 말할 것이 있소."

 곽지가 말하였다.

 "어찌 보겠다는 말씀입니까? 다만 마땅히 신속하게 인새와 인수를 거두십시오."

芝曰:「太后有子不能敎,今大將軍意已成,又勒兵于外以備非常,但當順旨,將復何言!」復,扶又翻。太后曰:「我欲見大將軍,口有所說。」芝曰:「何可見邪!但當速取璽綬!」王莽篡漢,遣王舜求璽於元后,其辭氣何至如此!

 

 태후는 뜻을 굽히고서 곁에 잇는 시어에게 인새와 인수를 가져다가 앉은 자리 옆에 놓게 하였다. 곽지가 나와서 사마사에게 보고하니, 사마사가 아주 기뻐하였다.

 또 사자를 파견하여 황제에게 제왕의 인새와 인수를 주게 하고, 내보내서 서궁으로 가게 하였다. 황제와 태후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였고, 드디어 왕의 수레를 타고 태극전의 남쪽으로 나갔는데, 여러 신하 수십 명이 그를 전송하였다. 사마부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였고,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太后意折,折,屈也;音之列翻。乃遣傍侍御取璽綬著坐側。太后侍御非止一人,傍侍御,謂當時侍御之在傍側者。著,直略翻。坐,徂臥翻。芝出報師,師甚喜。王莽、司馬師、蕭鸞,同是心也。國之姦賊,必有羽翼,有天下者其戒之哉!又遣使者授帝齊王印綬,出就西宮。帝與太后垂涕而別,人【章:甲十一行本「人」作「遂」;乙十一行本同;孔本同;熊校同。】乘王車,從太極殿南出,王車,諸王所乘青蓋車也。羣臣送者數十人,司馬孚悲不自勝,勝,音升。餘多流涕。廢帝時年二十一。

 사마사가 또 사자를 시켜서 태후에게 인새와 인수를 청하게 하였다. 태후가 말하였다.

 "팽성왕은 나의 시숙부인데, 지금 데려다 세운다면 나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명황제는 영원히 후게자가 끊어져야 하는가? 고귀향공은 문제의 장손이고 명황 동생의 아들이니 예에는 소종이 대종을 잇는 뜻을 갖고 있어서 그것은 자세히 의논하라."

 師又使使者請璽綬於太后。太后曰:「彭城王,我之季叔也,今來立,我當何之!之,往也。且明皇帝當永絕嗣乎?高貴鄕公,文【章:甲十一行本「文」下有「皇」字;乙十一行本同。】帝之長孫,明皇帝之弟子,太后謂明帝絕嗣,蓋謂以據爲後,則兄死弟及;又禮兄弟不得相入廟也。文帝黃初三年,初制封王之庶子爲鄕公,嗣王之庶子爲侯,公、侯之庶子爲亭伯。於禮,小宗有後大宗之義,其詳議之。」世嫡爲大宗支子之子,各宗其父爲小宗。禮,王后無嗣,擇建支子以繼大宗。

 

 22일에 사마사는 다시 여러 신하들을 소집하여 태후의 영을 보여 주었고, 이에 고귀향공 조모를 원성에서 영접해 오기로 확정하였다. 조모라는 사람은 동해정왕의 아들이고, 그때 나이가 14세였는데, 태상 왕숙으로 하여금 지절을 가지고 가서 그를 영접하게 하였다.

 사마사가 또다시 인새와 인수를 청하니 태후가 말하였다.

 "나는 고귀향공을 보았었음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를 아니, 나 자신이 손수 인새와 인수를 그에게 주고 싶다."

 丁丑,師更召羣臣,以太后令示之,乃定迎高貴鄕公髦於元城。定迎者,議始定而迎之也。元城縣,漢屬魏郡,魏屬陽平郡;時魏王公皆錄置鄴,故出髦而就元城迎之。髦者,東海定王霖之子也,時年十四,使太常王肅持節迎之。師又使請璽綬,太后曰:「我見高貴鄕公,小時識之,太后欲立高貴鄕公,必見其小時意氣異於諸王子,故欲立之,豈知祿去帝室,而終無益乎!我自欲以璽綬手授之。」

 

 겨울,10월 4일에 고귀향공이 현무관에 이르렀는데, 여러 신하들이 전전에 묵으라고 주청을 하자, 공은 먼저 선황들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피하고, 서상에 머물렀다. 여러 신하들이 또한 법가를 가지고 영접하겠다고 청하니 공은 듣지를 아니하였다.

 冬,十月,癸【章:甲十一行本「癸」作「己」;乙十一行本同;張校同,云無註本作「癸」,誤。】丑,高貴鄕公至玄武館,酈道元曰:魏氏立玄武館於芒垂。蓋館在芒山之尾,其地直洛城北。羣臣奏請舍前殿,玄武館之前殿也。公以先帝舊處,避止西廂;羣臣又請以法駕迎,公不聽。

 

 5일에 공이 낙양에 들어오니 여러 신하들이 서액문의 남쪽에서 환영하며 절하니 공이 수레에서 내려 답례하는 절을 하였다. 의례를 담당하는 자가 청하면서 말하였다.

 "의식에서 절은 하지 않습니다."

 공이 말하였다.

 "나는 신하요."

 이에 답례하는 절을 하였다.

 지거문에 이르러서 수레에서 내리니 좌우의 사람들이 말하였다.

 "옛날에는 수레를 타고 들어가셨습니다."

  庚寅,公入于洛陽,羣臣迎拜西掖門南,公下輿答拜,儐者請曰:「儀不拜。」儐,必刃翻;贊導者也。儀不拜者,謂於儀不當答拜也。公曰:「吾人臣也。」遂答拜。至止車門下輿,左右曰:「舊乘輿入。」

 

 공이 말하였다.

 "나는 황태후의 징소를 받았지만, 아직 해야 할 것을 모르오."

 드디어 걸어서 태근전의 동당에 이르러 태후를 알현하였다.

 그날로 태극전의 전전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배석한 모든 신료들은 기뻐하였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제왕을 위하여 하내에 궁궐을 지었다.

 公曰:「吾被太后徵,未知所爲。」言唯天子可乘輿入止車門,吾方被徵,未知何如,不可以天子自居也。以余觀高貴鄕公,蓋小慧而知書,故能爲此。若以爲習於禮,則余以爲猶魯昭公也。被,皮義翻。遂步至太極東堂,見太后。其日,卽皇帝位於太極前殿,百僚陪位者皆欣欣焉。謂公之足與有爲也,而卒死於權臣之手。嗚呼!余觀漢文帝入立之後,夜拜宋昌爲衞將軍,領南北軍,張武爲郎中令,行殿中,周勃、陳平、朱虛、東牟雖有大功,其權去矣,夫然後能自固。魏朝百官皆欣欣,果何所見邪!大赦,改元。自此,方是正元元年。爲齊王築宮于河內。爲,于僞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