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水鑑無私/東風解凍 迎春風 4日(음1/小望日).

solpee 2020. 2. 7. 05:12

 

《魏紀4 明 青龍 2 (甲寅, 234)

 

 

 11. 애초 장수교위 요립이 스스로 재능과 명성이 마땅히 제갈량의 다음이라고 생각하면서 항상 자기는 직위만 가지고 특별한 업무가 없어 놀기 때문에 앙앙거리면서 원망하고 비방하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자 제갈량이 요립을 폐하여 백성으로 만들고, 문산(사천 무현)으로 귀양보냈다.

 11. 初,長水校尉廖立,廖,力弔翻,姓也。裴松之音理救翻。《姓譜》:廖姓,周文王子伯廖之後,後漢有廖湛。《風俗通》曰:古有廖叔安,《左傳》作飂,蓋其後也。自謂才名宜爲諸葛亮之副,常以職位游散,散,悉亶翻。怏怏怨謗無已,亮廢立爲民,徙之汶山。據《立傳》,廢徙汶山,後主初立之時也。汶山,漢武帝開爲郡,宣帝地節三年,合於蜀郡,蜀又分置汶山郡;唐爲茂州汶山縣。汶,音㟭。

 

 제갈량이 죽자 요립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나는 끝까지 좌임(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다. 다시는 면천할 기회가 없다는 말)하겠구나!"

 이평도 이 소식을 듣고 병이 나서 죽었다. 이평은 항상 제갈량이 자기를 다시 거두어 주기를 바라며 스스로 잘못을 보충하고 회복할 기회를 얻기를 기대하였는데, 제갈량의 뒤를 이은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점쳤기 때문이었다.

 及亮卒,立垂泣曰:「吾終爲左衽矣!」李平聞之,亦發病死。平廢徙,見上太和五年。平常冀亮復收己,得自補復,策後人不能故也。復,扶又翻。

 

 습착지가 평론하였다.

 "옛날에 관중이 백씨의 병지에 있는 식읍 300호를 빼앗았으나, 죽을 때까지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성인께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제갈량이 요립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엿고, 이엄이 죽게 된 것은 어찌 단지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겠는가? 무릇 물이란 것은 지극히 평영한 것이므로 사악한 사람조차도 그곳에서 모범을 찾고, 거울이란 아주 밝게 비추는 것이므로 추한 사람도 화내기를 잊는다.

 習鑿齒論曰:昔管仲奪伯氏騈邑三百,沒齒而無怨言,聖人以爲難。見《論語》。鄭氏曰:小國之下大夫,采地方一成,其定稅三百家,故三百戶也。其實大國下大夫亦三百戶,故《論語》云:管仲奪伯氏騈邑三百。一成所以三百家者,一成九百夫,宮室、塗巷、山澤,三分去一,餘有六百夫,又不易再易,通率一家受二夫之田,是定稅三百家也。諸葛亮之使廖立垂泣,李嚴致死,豈徒無怨言而已哉!夫水至平而邪者取法,鑑至明而醜者忘怒;

 

 물과 거울이 사물을 끝까지 다 드러내지만 그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물과 거울이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비방을 면제받는 것인데, 하물며 대인과 군자가 즐겁게 살려는 마음을 품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는 덕을 흘리며, 법은 쓰지 않을 수 없는 곳에다만 사용하고, 형벌도 그들 스스로 범하였던 죄에만 주어졌고, 작위를 주면서 사사로움을 품지 아니하였고, 주살하였다고 하더라도 노여움에서 한 것이 아니니, 천하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水鑑之所以能窮物而無怨者,以其無私也。水鑑無私,猶以免謗;況大人君子懷樂生之心,樂,音洛。流矜恕之德,法行於不可不用,刑加乎自犯之罪,爵之而非私,誅之而不怒,天下有不服者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