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泣斬馬謖! / 庚子年 孟春季 立春節 初候 東風解凍 迎春風 初日(음 1/11).

solpee 2020. 2. 4. 04:39

 

《魏紀2 明 太和 2 (戊申, 228)

 

 

 2. 제갈량이 위를 정벌하려 하자 여러 아래들이 이를 모의하였다. 승상사마 위연이 말하였다.

 "듣건대 하후무는 주군의 사위이지만 겁쟁이이고 꾀도 없습니다. 이제 저 위연에게 정예의 병사 5천 명과 식랸을 짊어질 사람 5천 명을 빌려 주시면 바로 포중(섬서 포성)에서 나가 진령을 돌아 동쪽으로 가서 자오곡(길이 330Km, 북 출구를 子, 남 출구를 午, 절벽, 잔도, 교량이 많아 요새지역으로 불린다.)에 당도하여 다시 북쪽으로 가면 불과 열흘이면 장안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2. 初,諸葛亮將入寇,與羣下謀之。丞相司馬魏延曰:漢丞相有長史而無司馬,是時用兵,故置司馬。「聞夏侯楙,主壻也,怯而無謀。今假延精兵五千,負糧五千,直從褒中出,循秦嶺而東,當子午而北,褒中縣,屬漢中郡。子午道,王莽所通,事見三十六卷平帝元始五年。安帝延光四年,順帝罷子午道,通褒斜路。《三秦記》曰:子午,長安正南山名。秦嶺谷,一名樊川。余按今洋州東百六十里有子午谷。《郡縣志》曰:舊子午道在金州安康縣界,梁將軍王神念以緣山避水,橋梁百數,多有毀壞,乃別開乾路,更名子午道,則今路是也。不過十日,可到長安。

 

 하후무는 저 위연이 갑자기 도착한 것을 들으면 반드시 성을 버리고 도주할 것입니다. 장안 안에는 오직 어사와 경조 태수만 있을 것입니다. 횡문에 있는 저각과 흩어진 백성들이 남긴 곡식이면 충분히 먹일 수 있습니다.

 楙聞延奄至,必棄城逃走。長安中惟御史、京兆太守耳。時遣督軍御史與京兆太守共守長安。《晉志》曰:文帝受禪,改漢京兆尹爲太守。守,式又翻。橫門邸閣與散民之穀,足周食也。魏置邸閣於橫門以積粟。民聞兵至必逃散,可收其穀以周食。橫,音光。

 

 동방에 있는 군사들을 합쳐 모으는데 오히려 20일쯤이 걸릴 것이니 공께서는 야곡에서부터 오시면 또한 충분히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한꺼번에 한양의 서쪽은 평정할 수 있습니다."

 比東方相合聚,尚二十許日,比,必寐翻。而公從斜谷來,斜,余遮翻。谷,音浴,又古祿翻。亦足以達。如此,則一舉而咸陽以西可定矣。」

 

 제갈량은 이것을 위험한 계책으로 생각하고 편안하게 탄탄대로로 가서 농우를 평정하여 빼앗고 만전을 기하여 반드시 이겨서 걱정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만 못하다며, 위연의 계책을 채택하지 아니하였다.

 亮以爲此危計,不如安從坦道,可以平取隴右,十全必克而無虞,故不用延計。由今觀之,皆以亮不用延計爲怯。凡兵之動,知敵之主,知敵之將。亮之不用延計者,知魏主之明略,而司馬懿輩不可輕也。亮欲平取隴右,且不獲如志,況欲乘僥倖,盡定咸陽以西邪!

 제갈량은 겉으로 말하길, 야곡으로 가서 미를 점령하겠다고 하고 진동장군 조운과 무양장군 등지에게 병사가 있는 것처럼 의심하게 만들어서 기곡을 점령하도록 하였다. 황제는 조진을 파견하여 관우의 여러 부대를 총감독하여 미에 진을 치게 하였다. 제갈량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기산을 공격하는데 군사의 진지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호령도 엄숙하였다.

 亮揚聲由斜谷道取郿,班《志》:斜水出衙嶺山北,至郿入渭,脈水沿山,則斜谷之路可知矣。郿,師古音媚。郿故城,陳倉縣東北十五里故郿城是。使鎭東將軍趙雲、揚武將軍鄧芝爲疑兵,據箕谷;今興元府褒縣北十五里有箕山,鄭子眞隱於此,趙雲、鄧芝所據,卽此谷也。又據《後漢書‧馮異傳》:箕谷當在陳倉之南,漢中之北。帝遣曹眞都督關右諸軍軍郿。亮身率大軍攻祁山,戎陳整齊,陳,讀曰陳。號令明肅。

 

 애초, 위에서는 한의 소열제가 이미 죽고 나서 여러 해 동안 고요하고 아무런 소문도 들리지 않앗으므로 대략 아무런 예방하는 방비가 없었으나 갑자기 제갈량이 출동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조야가 모두 무섭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천수와 남안, 안정에서 모두 반란을 일으켜 제갈량에게 호응하였으며, 관중 지역이 놀라는 반응을 보이니 조신들도 내놓아야 할 계책을 알지 못하였다.

 始,魏以漢昭烈旣死,數歲寂然無聞,是以略無備豫;謂不豫爲之備也。而卒聞亮出,卒,讀曰猝。朝野恐懼,於是天水、南安、安定皆叛應亮,魏分隴右置秦州,天水、南安屬焉。漢靈帝中平四年,分漢陽之䝠道立南安郡。漢陽郡至晉方改爲天水,史追書也。安定郡,屬雍州。杜佑曰:南安,今隴西郡隴西縣。關中響震,朝臣未知計所出,

 

 황제가 말하였다.

 "제갈량은 산으로 막으며 굳게 지켰었는데, 지금 그 스스로가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 병서에서 말한 '사람을 유지하는 술책에 바로 해당하는 것이니 제갈량을 격파하는 것은 분명하오."

 이에 병마와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내고, 우장군 장합을 파견, 이를 감독하게 하여 서쪽으로 가서 제갈량을 막게 하였다. 2월 17일에 황제가 장안까지 나아갔다.

 帝曰:「亮阻山爲固,今者自來,正合兵書致人之術,《兵法》曰:善戰者致人。帝姑以此言安朝野之心耳。破亮必也。」乃勒兵馬步騎五萬,遣右將軍張郃督之,西拒亮。郃,古合翻,又曷閤翻。丁未,帝行如長安。親帥師繼郃之後以張聲勢。如,往也。

 

애초 월수 태수 마속은 재주와 그릇이 보통사람을 뛰어 넘어서 군사 계획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제갈량은 그 그릇이 특이하다고 깊게 생각하였다. 한의 소열제가 죽음에 임박하여 제갈량에게 말하였다.

 "마속은 말이 실제보다 지나친 점이 있어 크게 쓸 수 없으니 그대는 이를 잘 살피시오."

 初,越巂太守馬謖,才器過人,好論軍計,好,呼到翻。諸葛亮深加器異;漢昭烈臨終,謂亮曰:「馬謖言過其實,不可大用,君其察之!」

제갈량은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마속을 참군으로 삼고 매번 그를 불러들여서 담론하였는데 낮에서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기산으로 군대를 출동시키게 되자 제갈량은 옛 장수 위연과 오의 등을 선봉장으로 쓰지 않고 마속에게 여러 부대를 감독하여 선봉에 서도록 하면서 장합과 가정(감숙 장랑)에서 싸우게 하였다.

 亮猶謂不然,以謖爲參軍,每引見談論,自晝達夜。以孔明之明略,所以待謖者如此,亦足以見其善論軍計矣。觀孔明南征之時,謖陳攻心之論,豈悠悠坐談者所能及哉!及出軍祁山,亮不用舊將魏延、吳懿等爲先鋒,而以謖督諸軍在前,與張郃戰于街亭。《續漢志》:漢陽略陽縣有街泉亭,前漢之街泉縣也,省入略陽。杜佑曰:街泉亭在隴縣。又曰:平涼郡界有街泉亭,馬謖爲張郃所敗處。又考《五代史志》,漢川郡西縣有街亭山、幡冢山、漢水,則隋之西縣,蓋兼得隴西之䝠道、漢陽之西縣矣。又按《郡國縣道記》:梁州之西縣,本名白馬城,又曰濜口城,後魏正始中,立幡冢縣,隋始改曰西縣。此非《續漢志》漢陽之西縣也。

 마속은 제갈량의 통제를 벗어나자 행동거지가 번거롭고 소란스러웠는데, 물가를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성을 점거하려고 하지 아니하였다. 장합이 그들의 물 긷는 통로를 끊어버리고 공격하여 대파하니 사졸들이 흩어졌다.

 謖違亮節度,舉措煩擾,舍水上山,不下據城。《郃傳》言謖依阻南山。舍,讀曰捨。上,時掌翻。張郃絕其汲道,擊,大破之,士卒離散。

 

 제갈량은 진격하여도 근거할 곳이 없자 서현(감숙 천수)에 있는 1천여 집을 점령하고서 한중으로 돌아왔다. 마속을 잡아서 하옥시켰다가 죽였다. 제갈량은 스스로 그의 제사에 참석하고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가 남긴 아이들에게 전과 같은 은혜를 베풀면서 길러주었다.

 亮進無所據,乃拔西縣千餘家還漢中。《續漢志》:西縣,前漢屬隴西郡,後漢屬漢陽郡,有幡冢山、西漢水。收謖下獄,殺之。亮自臨祭,爲之流涕,下,遐稼翻。爲,于僞翻。撫其遺孤,恩若平生。殺之者,王法也;恩之者,故人之情不忘也。

 

 장완이 제갈량에게 말하였다.

 "옛날 초나라에서 성득신을 죽이자 진나라 문공이 기뻐하였을을 알 수 있습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혜로운 계책을 세우는 인사를 죽였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합니까?"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蔣琬謂亮曰:「昔楚殺得臣,文公喜可知也。《左傳》:晉文公及楚子玉得臣戰于城濮,楚師敗績。晉入楚軍三日穀,文公猶有憂色,曰:「得臣猶在,憂未歇也。」及楚殺得臣,然後喜可知也。杜預曰:謂喜見於顏色。天下未定而戮智計之士,豈不惜乎!」觀此,則蔣琬亦重謖矣。亮流涕曰:

 

 "손무가 천하에서 능히 적을 제압하여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법률을 분명하게 시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소. 이리하여서 양간(晉 悼公의 동생)이 법을 어지럽히니 위강(晉의 대부)이 그의 노복을 죽였소. 지금 사해가 분열되어 있고 전쟁이 바야흐로 시작되는데, 만약 다시 법률을 폐지하면 무엇을 가지고서 도적들을 토벌한다는 말이오."

「孫武所以能制勝於天下者,用法明也;《孫子‧始計篇》曰:法令孰行。言法令行者必勝也,故其敎吳宮美人兵,必殺吳王寵姬二人以明其法。是以揚干亂法,魏絳戮其僕。《左傳》:晉悼公合諸侯,其弟揚干亂行,魏絳戮其僕。悼公謂魏絳能以刑佐民,使佐新軍。四海分裂,兵交方始,若復廢法,何用討賊邪!」

 

 마속이 아직 실패하지 아니하였을 때 비장군 파서 사람 왕평이 계속하여 마속에게 규간하였으나, 마속이 그 말을 채택하지 아니하였는데 패하자 많은 사람들이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오직 왕평만은 그가 거느리는 1천 명을 데리고 전고를 두드리면서 영채를 지켰더니 장합은 그곳에 복병들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나아가서 공격하지를 못하였다. 이에 왕평이 천천히 여러 영채의 남은 병사들을 모아서 장교와 사병들을 이끄고 돌아왔다.

 謖之未敗也,裨將軍巴西王平連規諫謖,謖不能用;及敗,衆盡星散,惟平所領千人鳴鼓自守,張郃疑其有伏兵,不往逼也,於是平徐徐收合諸營遺迸,率將士而還。據《王平傳》:平所識不過十字。觀其收馬謖敗散之兵,拒曹爽猝至之師,則用兵方略,固不在於多識字也。迸,北孟翻。還,從宣翻,又如字。

 

 제갈량은 이미 마속과 장군 이성을 주살하였고, 장군 황습 등의 병사를 빼앗았지만 왕평이 특히 우뚝 드러났으므로 그에게 참군의 직책을 덧붙여 주엇고 동오부 겸 당영사로 하였으며, 직위를 높여서 토구장군으로 하고, 정후로 책봉하였다. 제갈량이 상소를 올려서 스스로 3등급을 내리게 하니 한의 주군은 제갈량을 우장군으로 삼고, 행승상사(승상대리)로 하였다.

 亮旣誅馬謖及將軍李盛,奪將軍黃襲等兵,平特見崇顯,加拜參軍,統五部兼當營事,旣總統五部兵,時亮屯漢中,又使之兼當營屯之事。進位討寇將軍,封亭侯。後漢之制,列侯有縣侯、鄕侯、亭侯。亮上疏請自貶三等,漢主以亮爲右將軍,行丞相事。

 

 .............................하략...........................

 是時趙雲、鄧芝兵亦敗於箕谷,雲斂衆居守,故不大傷,雲亦坐貶爲鎭軍將軍。據《晉書‧職官志》:鎭軍將軍在四征、四鎭將軍之上。今趙雲自鎭東將軍貶鎭軍將軍,蓋蜀漢之制,以鎭東爲專鎭方面,而以鎭軍爲散號,故爲貶也。亮問鄧芝曰:「街亭軍退,兵將不復相錄,錄,收拾也。將,卽亮翻;下同。復,扶又翻。箕谷軍退,兵將初不相失,何故?」芝曰:「趙雲身自斷後,斷,丁管翻。軍資什物,略無所棄,兵將無緣相失。」雲有軍資餘絹,亮使分賜將士,雲曰:「軍事無利,何爲有賜,其物請悉入赤岸庫,《水經註》:褒水西北出衙嶺山,東南逕大石門,歷故棧道下谷,俗謂「千梁無柱」也。諸葛亮與兄瑾書曰:「前趙子龍退軍,燒壞赤崖閣道緣谷一百餘里,其閣梁一頭入山腹,一頭立柱於水中。今水大而急,不得安柱。」又云:「頃大水暴出,赤崖以南,橋閣悉壞。」時趙子龍與鄧伯苗一戍赤崖屯田,一戍赤崖口,但得緣崖與伯苗相聞而已。後亮死于五丈原,魏延先退而焚之,卽是道也。赤崖卽赤岸,蜀置庫於此,以儲軍資。須十月爲冬賜。」須,待也。亮大善之。

或勸亮更發兵者,亮曰:「大軍在祁山、箕谷,皆多於賊,而不破賊,乃爲賊所破,此病不在兵少也,在一人耳。謂兵之勝敗在將也。少,詩沼翻。今欲減兵省將,將,卽亮翻。明罰思過,校變通之道於將來;若不能然者,雖兵多何益!自今已後,諸有忠慮於國者,但勤攻吾之闕,則事可定,賊可死,功可蹻足而待矣。」蹻,巨嬌翻。於是考微勞,甄壯烈,甄,稽延翻,察也,別也。引咎責躬,布所失於境內,厲兵講武,以爲後圖,戎士簡練,民忘其敗矣。善敗者不亡,此之謂也。姜維之敗,則不可復振矣。

亮之出祁山也,天水參軍姜維詣亮降。降,戶江翻。亮美維膽智,辟爲倉曹掾,《續漢志》:丞相倉曹掾,主倉穀事。使典軍事。《考異》曰:孫盛《雜語》曰:「維詣諸葛亮,與母相失。後得母書,令求當歸。維曰:『良田百頃,不在一畝,但有遠志,不在當歸也。』」按維粗知學術,恐不至此。今不取。

曹眞討安定等三郡,皆平。眞以諸葛亮懲於祁山,後必出從陳倉,乃使將軍郝昭等守陳倉,治其城。杜佑曰:漢陳倉故城,在今縣東二十里。治,直之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