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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입! 小寒仲候鵲始巢山茶風4日(음12/20).

solpee 2020. 1. 14. 05:56

 

紀37 孝明帝 永平 8 (乙丑, 65)

 

 

 6. 겨울, 10월, 병자일(14)에 죽을 조를 져서 옥에 갇혀 있는 죄수를 모집하여 도요영에 가게 하였는데, 죄지은 망명자들을 각기 차등 있게 속죄시키도록 하였다.

 초왕 유영이 황겸과 백환을 받들고서 봉국의 재상에게 가서 말하였다.

 6. 冬,十月,丙子,募死罪繫囚詣度遼營;有罪亡命者,令贖罪各有差。楚王英奉黃縑、白紈詣國相曰:漢成帝王國省內史,令相治民,職如太守,秩二千石。紈,今之絹也。師古曰:紈,素也;縑,幷絲絹也。相,息亮翻。

 

 "번국의 보신에 의탁 되어서 허물과 악함이 자꾸 쌓였는데, 큰 은혜를 받고 있음을 기뻐하여 비단을 받들어 보내드려서 허물과 죄를 사해 받고자 합니다."

 봉국의 재상이 이를 보고하니 조서를 내려서 회보하였다.

「託在藩輔,過惡累積,歡喜大恩,奉送縑帛,以贖愆罪。」國相以聞,詔報曰:

 

 "초왕은 황제와 노자의 미언을 외우고, 부도의 인자함을 숭상하여 깨끗하게 재계하면서 석 달이나 보내며 신과 맹세를 하였는데, 무슨 혐의가 있어서 마땅히 후회할만한 일이 있겠는가? 그 속죄를 위하여 보낸 것을 돌려보내어 포색과 상문①의 성찬을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라."

「楚王誦黃、老之微言,尚浮屠之仁慈,潔齊三月,齊,讀曰齋。與神爲誓,何嫌何疑,當有悔吝!其還贖,以助伊蒲塞、桑門之盛饌。」塞,悉則翻。饌,雛戀翻,又雛皖翻。

 

 처음에 황제는 서역에 신이 있는데, 그 이름이 불이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이에 사신을 파견, 천축국에 가게 하여 그 도를 구하고, 책과 사문을 얻어오도록 하였다.

初,帝聞西域有神,其名曰佛,因遣使之天竺求其道,得其書及沙門以來。

 

 그 책에서는 대개 허무를 으뜸으로 삼고, 자비를 베풀어 죽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였다. 사람이 죽어도 정신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있다가 다시 형체인 몸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살아있을때 행하였던 선과 악은 모두 그에 따른 응보를 받는 것이므로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정신을 수련하는 것이며, 끝에는 부처가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 넓고 큰 말씀을 하면서, 어리석은 속인들에게 권유하였다.

 其書大抵以虛無爲宗,貴慈悲不殺;以爲人死,精神不滅,隨復受形;生時所行善惡,皆有報應,故所貴修煉精神,以至爲佛。善爲宏闊勝大之言,以勸誘愚俗。

 

 그 도에 정통한 사람을 사문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중국에 처음으로 그 법술이 전해졌으며②,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는데, 왕공과 귀인 가운데 다만 초왕 유영만이 제일 먼저 그를 좋아하였다.

 精於其道者,號曰沙門。於是中國始傳其術,圖其形像,而王公貴人,獨楚王英最先好之。袁宏《漢紀》:浮屠,佛也。西域天竺國有佛道焉。佛者,漢言覺也,將以覺悟羣生也。其敎以修善慈心爲主,不殺生,專務清靜。其精者爲沙門。沙門,漢言息也。蓋息意去欲以歸於無爲。長丈六尺,黃金色。初,明帝夢見金人長大,以問羣臣。或曰:「西方有神,其名曰佛,陛下所夢,得無是乎?」於是遣使天竺,問其道術而圖其形像焉。賢曰:伊蒲塞,卽優婆塞也,中國翻爲近住,言受戒行堪近僧住也。桑門,卽沙門,梵云沙門那,或曰桑門,唐言勤息,秦譯云勤行,又云善覺。魏收曰:漢武帝遣霍去病討匈奴,獲休屠王金人,以爲大神,列於甘泉宮,不祭祀,但燒香禮拜而已。此則佛道流通之漸也。張騫使大夏,傳其旁有身毒國,一名天竺,始聞有浮屠之敎。哀帝元壽元年,博士弟子秦景憲受大月氏王使伊存口授浮屠經,中國聞之,未信了也。後明帝夜夢金人,頂有白光,飛行殿庭,乃訪羣臣,傅毅始以佛對。帝遣郎中蔡愔等使天竺,寫浮屠遺範,仍與沙門攝摩騰、竺法蘭東還洛陽,中國有沙門跪拜之法自此始。愔之還,以白馬負經而至,漢因立白馬寺於洛城雍關西。好,呼到翻。

 

①.포색: 蒲塞[púsāi] 五戒를 받은 사람으로 범어로 우바새이다. 상문:桑門[sāngmén]은 沙門 [shāmén] 즉수도자인데, 범어로 사문나이고 깨달은 자를 말한다.

 

②. 불교를 처음 수입한 것이 65년 음력 10월 14일이나.  이보다 먼저 전한 애제 원수 원년(BC2년)에 박사제자 秦景憲이 大月氏王의 사신 伊存이 입으로 불경을 전하는 것을 들은 바 있어 중국에서는 이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믿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다음에 명제가 밤 꿈에 금으로 된 사람이 정수리에서 힌 빛이 났는데, 날아와 궁궐의 뜰에 왔으므로 신하들에게 물었더니 傅毅가 부처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그때 황제는 蔡愔을 천축국에 사신으로 보내어 부처의 모습을 그리고 사문인 攝摩騰·竺法蘭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중국에는 사문이 무릎을 꿇고 절하는 법이 생겨났다. 채음이 돌아올 때 백마에 불경을 싣고 왔고, 이어 洛城의 雍關 서쪽에 白馬寺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