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富貴有極,人當知足/부귀란 끝이 있고, 사람은 만족을 알아야 한다. 小寒 仲候 鵲始巢山茶風初日(음12/17).

solpee 2020. 1. 10. 15:12

 

紀34 光武帝 建武 9 (癸巳, 33)

 (漢帝 盧芳 5年, 成家(公孫述) 龍興 9年, 朔寧王 隗囂 4年)

 

 

 1. 봄, 정월 영양성후 채준이 군진에서 죽었다. 풍이에게 조서를 내려 그의 군영을 함께 거느리게 하였다. 채준의 사람됨은 청렴하고 검소하며 조심스럽고 자기를 극복하고 공적인 일을 받들었으며, 상으로 내려준 것을 모두 사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군기를 엄정하게 단속하여 부대가 있는 곳의 관리와 백성들은 군사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1. 春,正月,潁陽成侯祭遵薨於軍,潁陽縣,屬潁川郡。詔馮異幷將其營。遵爲人,廉約小心,克己奉公,賞賜盡與士卒;約束嚴整,所在吏民不知有軍。

 

 병사를 뽑는 것도 모두 유가의 방법으로 하였으며, 술자리를 마주하여 음악을 듣는 경우에도 반드시 아가를 듣거나 투호를 하였다. 죽음이 닥치자 유언을 내려서 소박하게 장사지내라고 훈계하였으며, 집안일에 관하여 물었으나 끝내 말하지 아니하였다.

 取士皆用儒術,對酒設樂,必雅歌投壺。賢曰:雅歌,謂歌雅詩也。《禮記‧投壺經》曰:壺頸脩七寸,腹脩五寸,口徑二寸半,容斗五升。壺中實小豆焉,爲其矢之躍而出也。矢以柘若棘,長二尺八寸,無去其皮,取其堅而重。投之,勝者飲不勝者,以爲優劣也。臨終,遺戒薄葬;問以家事,終無所言。

 

 황제가 몹시 안타갑게 애도하였는데, 채준이 영구가 하남에 이르자 거가는 소복을 입고 친히 그곳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애통해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성문까지 행차하여 운구하는 수레가 지나는 것을 보고는 흐르는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상례를 마치자 다시 친히 태뢰(소,양,돼지를 잡아 드리는 초고의 제사)로 제사지냈다.

 帝愍悼之尤甚,遵喪至河南,車駕素服臨之,望哭哀慟;還,幸城門,閱過喪車,涕泣不能已;喪禮成,復親祠以太牢。復,扶又翻;下同。

 

 대장추(황궁관리책임자)와 알자, 하남윤에게 조서를 내려서 상례를 맡아 처리하게 하고 대사농에게 경비를 지급하게 하였다. 장사를 지내게 되자 거가가 다시 그곳에까지 갔고 장사를 치르고 나자 또 그의 무덤에 가서 그의 부인과 집안사람들을 보고 위문하였다.

 詔大長秋、謁者、河南尹護喪事,大司農給費。皇后卿曰將行,秦官也,景帝中六年,更名大長秋。師古曰:秋者,收成之時,長者,恆久之義,故以爲皇后官名。西都或用中人,或用士人,東都之後純用閹人矣。至葬,車駕復臨之;旣葬,又臨其墳,存見夫人、室家。

 

 그 뒤에 조회를 열었는데, 황제는 매번 탄식하며 말하였다.

 "어디에서 나라를 걱정하고 공적인 것을 존중하는 사람 가운데 채 정로 같은 사람을 얻겠는가?"

 其後朝會,帝每歎曰:「安得憂國奉公如祭征虜者乎!」遵爲征虜將軍。

 

 위위 요기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지극히 어지시어 채준을 애도하며 생각하는 것이 그치지 아니하니 여러 신하들이 각기 부끄럽고 두려움을 품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비로소 그쳤다.

 衞尉銚期曰:「陛下至仁,哀念祭遵不已,羣臣各懷慚懼。」言帝念祭遵,屢以爲言,羣臣愧不如遵,各懷懼也。銚,音姚。帝乃止。

 

 9. 도적이 음귀인(유수의 본처)의 어머니 등씨와 그녀의 동생 음흔을 죽였다. 황제는 이를 아주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귀인의 동생 음취를 선은후로 삼았다. 다시 음취의 형인 시중 음흥을 불러서 그에게 작위를 책봉하려고 하여 인수를 그의 앞에다 놓았다.

 9. 盜殺陰貴人母鄧氏及弟訢。訢,許靳翻。帝甚傷之,封貴人弟就爲宣恩侯。帝追爵貴人父陸爲宣恩哀侯,以就嗣哀侯。後漢舊制,惟皇后父封侯。貴人未正位中宮而追爵其父,非舊也。復召就兄侍中興,欲封之,置印綬於前。

 

 음흥이 굳게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신은 아직도 먼저 적의 진지를 함락시키는 공로를 세우지 못하였는데, 한 집안에서 여러 명이 나란히 작위와 봉토를 받는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쳐다보게 하는 것이니 진실로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興固讓曰:「臣未有先登陷陳之功,復,扶又翻。陳,讀曰陣。而一家數人,並蒙爵土,令天下觖望,賢曰:觖,音羌志翻。《前書音義》曰:觖,猶冀也,一音決,猶望之也。誠所不願!」

 

 황제는 가상히 생각하여 그의 뜻을 빼앗지 아니하였다.

 귀인이 그 연고를 물었더니, 음흥이 말하였다.

 帝嘉之,不奪其志。貴人問其故,興曰:

 

 "무릇 외척 집안이 고생하는 것은 겸손하고 물러날 줄 모르는 것 때문이오. 딸을 후왕에게 배필로 보내려고 하고, 공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려고 곁눈질하는 것은 어리석은 내 마음으로는 실로 불안합니다. 부귀란 끝이 있는 것이니 사람은 마땅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하고, 지나치게 사치한 것은 더욱 보고 듣는데서 꺼리는 바가 됩니다."

「夫外戚家苦不知謙退,嫁女欲配侯王,取婦眄睨公主,取,讀曰娶。愚心實不安也。富貴有極,人當知足,夸奢益爲觀聽所譏。」

 

 귀인이 그 말에 감동하여 깊이 스스로를 낮추고 끝내 종친을 위하여 자리를 요구하지 아니하였다.

 貴人感其言,深自降挹,以器俯而取水曰挹,人之謙下者亦曰挹。卒不爲宗親求位。卒,子恤翻。爲,于僞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