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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秀의 後漢 건국/小寒節 初候雁北鄕4日,梅花風(음12/15).

solpee 2020. 1. 9. 01:49

 

紀32 光武帝 建武 (乙酉, 25)

 

 

 6....도호장군 가복이 오교와 진정에서 싸웠는데, 가복이 입은 상처가 아주 심하였다. 왕(유수)이 크게 놀라서 말하였다.

 "내가 가복으로 하여금 별도로 군사를 거느리지 못하게 한 것은 그가 적군을 가볍게 보기 때문이었소. 과연 나의 명장을 잃었구나! 듣건대 그의 처가 임신을 했다는데 딸을 낳으면 내 아들이 그를 맞아들이게 할 것이고, 아들을 낳으면 내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겠소. 그에게 처자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시오."

 6....都護將軍賈復漢宣帝置西域都護,盡護南、北道諸國。甘延壽之擊郅支也,自謂爲都護將軍;漢朝未以爲將軍號也,至光武,乃以命賈復。與五校戰於眞定,復傷創甚;校,戶敎翻。創,初良翻。王大驚曰:「我所以不令賈復別將者,將,卽亮翻。爲其輕敵也。爲,于僞翻。果然,失吾名將!聞其婦有孕,生女邪,我子娶之;生男邪,我女嫁之;不令其憂妻子也。」

 

 가복의 병세는 얼마 후에 호전되었고 왕을 뒤좇아서 계(북경)에까지 와서 서로 만나게 되자 아주 기뻐하였다.

 돌아와서 중산에 이르자, 제장들이 다시 존호를 올렸지만 왕은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가다가 남평극에 이르렀는데, 제장들이 그에게 다시 굳게 청하였지만 왕은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제장들이 또 이 말을 꺼냈고 경순이 나아가서 말하였다.

 復病尋愈,追及王於薊,相見甚驩。薊,音計。

還至中山,諸將復上尊號;王又不聽。行到南平棘,賢曰:縣名,屬常山郡,今趙州縣;故城在縣南。諸將復固請之;王不許。諸將且出,耿純進曰:

 

 "천하의 사대부들이 친척을 이별하고 토지를 버리면서 화살과 돌이 날아드는 곳에 있는 대왕을 좇아왔는데 그들의 계획은 진실로 용의 비늘에 올라타거나 봉황의 날개에 붙어서라도 그들이 뜻한 바를 이루려는 것일 뿐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그대로 머물러 계시면 때로 무리들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니, 명호와 지위를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저 경순은 아마도 '사대부들은 희망이 끊어지고 계책도 막히게 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하고 오랫동안 스스로 고통받지 않으려고 할까' 두렵습니다. 대중이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합치기 어렵습니다.."

「天下士大夫,捐親戚,棄土壤,從大王於矢石之間者,其計固望攀龍鱗,附鳳翼,以成其所志耳。今大王留時逆衆,不正號位,純恐士大夫望絕計窮,則有去歸之思,無爲久自苦也。大衆一散,難可復合。」

 

 경순의 말은 아주 정성스럽고 간절하여 왕은 깊은 감흥을 갖고 말하였다.

 "내가 장차 생각해 보겠소."

 가다가 호현에 도착하여 풍이를 불러서 사방의 동정을 물으니, 풍이가 말하였다.

 "경시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 종묘에 대한 걱정은 대왕에게 달려 있으니, 마땅히 여러 사람들의 의논한 것에 따르십시오."

 純言甚誠切,王深感曰:「吾將思之。」

行至鄗,《續漢志》:鄗縣,屬常山國,帝於此卽位,改曰高邑。鄗,呼各翻。召馮異,【章:十二行本「異」下有「詣鄗」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問四方動靜。異曰:「更始必敗,宗廟之憂在於大王,宜從衆議!」

 

 마침 유생 강화가 관중에서《적복부(赤伏符:예언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말하였다.

 "유수가 병사를 발동하여 부도한 사람들을 잡는데, 사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들에서 용들이 싸우지만 4·7(28은 유방 이후 228년에 꿰어 맞춘 것)의 시대에는 火가 주인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이 기회에 다시 주청하였다. 6월 기미일(22)에 왕은 호현의 남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기원을 고치고 크게 사면하였다.

 會儒生彊華自關中奉《赤伏符》來詣王曰:「劉秀發兵捕不道,四夷雲集龍鬭野,四七之際火爲主。」賢曰:彊,音其兩翻;《姓譜》:其良翻。《風俗通》作「疆華」,系之曰:晉有大夫疆劒。四七,二十八也。自高祖至光武初起,合二百二十八年,卽四七之際也。漢火德,故火爲主也。羣臣因復奏請。六月,己未,王卽皇帝位于鄗南;時設壇於鄗南千秋亭五城陌。賢曰:其地在今趙州柏鄕縣。《考異》曰:《光武本紀》,馮異破蘇茂,諸將上尊號,光武還至薊,皆在四月前。而《馮異傳》,異與李軼書云:「長安壞亂,赤眉臨郊,王侯構難,大臣乖離,綱紀已絕。」又勸光武稱尊號,亦曰:「三王反叛,更始敗亡。」按是年六月己未,光武卽位,是月甲子,鄧禹破王匡等於安邑,王匡、張卬等還奔長安,乃謀以立秋貙膢時,共劫更始,然則三王反叛,應在光武卽位之後,夏秋之交,馮異安得於四月之前已言之也!或者史家潤色其言,致此差互耳!改元,大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