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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망의 사망. 小寒節初候雁北鄕梅花風初日(음12/12)

solpee 2020. 1. 5. 05:58

 

紀3 淮陽王 更始 (癸未, 23)

 

 

 14. 전에 종무후엿던 유망이 여남에서 병사를 일으키니 엄우와 진무가 그에게 가서 귀부하였다. 8월에 유망이 황제에 즉위하여 엄우를 대사마로, 진무를 승상으로 삼았다.

 14. 前鍾武侯劉望起兵汝南,按《王子侯表》:鍾武節侯度,長沙定王之孫,成帝元延二年,侯則紹封;其後不見。或者望其則之子歟?鍾武在義陽郡界。《水經註》:師水過義陽郡城,東逕鍾武故城南。《考異》曰:《王莽傳》作「劉聖」,今從范《書‧劉玄傳》。嚴尤、陳茂往歸之;八月,望卽皇帝位,以尤爲大司馬,茂爲丞相。

 

 15. 황제는 태사 왕광과 국장 애장에게 낙양을 지키게 하였다. 경시는 정국상공 왕광을 파견하여 낙양을 공격하게 하고, 서병대장군 신도건과 승상부 사직 이송은 무관을 공격하게 하니, 삼보 지역이 벌벌 떨며 요동쳤다.

 15. 王莽使太師王匡、國將哀章守洛陽。將,卽亮翻。《考異》曰:袁《紀》作「襃章」,今從范《書》。更始遣定國上公王匡攻洛陽,西屛大將軍申屠建、丞相司直李松攻武關,李松,通之從弟。屛,必郢翻。三輔震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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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析人鄧曄、于匡起兵南鄕以應漢,師古曰:析,南陽之縣。南鄕,析縣之鄕名也。宋白曰:鄧州內鄕縣,古之析邑。析,音先歷翻。攻武關都尉朱萌,萌降;降,戶江翻。進攻右隊大夫宋綱,殺之;莽改弘農郡曰右隊。西拔湖。師古曰:湖,弘農之縣也,本屬京兆。莽愈憂,不知所出。崔發言:「古者國有大災,則哭以厭之。師古曰:《周禮》春官之屬女巫之職曰:凡邦之大災,歌哭以請。哭者,所以告哀也。《春秋左氏傳》:宣十二年,楚子圍鄭,旬有七日,鄭人大臨,守陴者皆哭。故發引之以爲言也。厭,音一葉翻。宜告天以求救!」莽乃率羣臣至南郊,陳其符命本末,仰天大哭,氣盡,伏而叩頭。諸生小民旦夕會哭,爲設餐粥;爲,于僞翻。師古曰:餐,音千安翻。甚悲哀者,除以爲郎,郎至五千餘人。

莽拜將軍九人,皆以虎爲號,將北軍精兵數萬人以東,內其妻子宮中以爲質。質,音致。時省中黃金尚六十餘萬斤,他財物稱是,稱,尺證翻。莽愈愛之,賜九虎士人四千錢;衆重怨,無鬭意。師古曰:重,音直用翻。九虎至華陰回谿,賢曰:回谿,今俗所謂回阬,在洛州永寧縣東北;其谿長四里,闊二丈,深二丈五尺。華,戶化翻。距隘自守。于匡、鄧曄擊之,六虎敗走;二虎詣闕歸死,莽使使責死者安在,皆自殺;其四虎亡。二虎自殺者,史熊、王況也。四虎亡者,史逸其名。三虎收散卒保渭口京師倉。三虎,郭欽、陳翬、成重也。師古曰:京師倉,在華陰灌北渭口也。

鄧曄開武關迎漢兵。李松將三千餘人至湖,與曄等共攻京師倉,未下。曄以弘農掾王憲爲校尉,掾,俞絹翻。將數百人北渡渭,入左馮翊界。李松遣偏將軍韓臣等徑西至新豐擊【章:十二行本「擊」下有「破」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莽波水將軍,據《竇融傳》,莽拜融爲波水將軍。《前書音義》曰:波水,在長安南。追奔至長門宮。王憲北至頻陽,所過迎降。師古曰:所過之處,人皆來迎而降附也。諸縣大姓各起兵稱漢將軍,【章:十二行本無「軍」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率衆隨憲。李松、鄧曄引軍至華陰,而長安旁兵四會城下;又聞天水隗氏方到,皆爭欲【章:十二行本「欲」下有「先」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入城,貪立大功、鹵掠之利。言入城誅莽,旣立大功,又得鹵掠,貪二者之利也。

 

 황제왕망은 성 안에 있는 죄수들을 사면하고 모두에게 무기를 주면서 돼지를 잡아 그 피를 마시게 하고 더불어 맹세하며 말하였다.

 "만약에 신 왕조를 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사직으리 귀신이 이것을 기억할 것이다."

 경시장군 사심에게 이들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위교를 건너자 모두 흩어져 달아나서 사심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莽赦城中囚徒,皆授兵,殺豨,飲其血,與誓曰:「有不爲新室者,社鬼記之!」豨,許豈翻,又音希。爲,于僞翻。使更始將軍史諶將之。諶,氏壬翻。渡渭橋,皆散走;諶空還。衆兵發掘莽妻、子、父、祖冢,燒其棺椁及九廟、明堂、辟雍,火照城中。

 

 9월 초하루 무신일에 병사들이 선평성문으로 들어갔다. 장한이 병사들과 마주쳐 살해되었고, 왕읍과 왕림, 왕순, 대운 등은 병사를 나누어 거느리고 북궐 아래에서 공격에 저항하였지만 날이 저물자 관부와 관원들의 저택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도망쳤다.

 九月,戊申朔,兵從宣平城門入。師古曰:長安城東出北頭第一門。張邯逢兵見殺;王邑、王林、王巡、䠠惲等分將兵距擊北闕下,䠠,師古曰:音帶,又音徒蓋翻。䠠姓,惲名。惲,於粉翻。會日暮,官府、邸第盡奔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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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己酉,城中少年朱弟、張魚等恐見鹵掠,趨讙並和,師古曰:衆羣行讙而自相和也。讙,許元翻。和,音乎臥翻。燒作室門,程大昌曰:作室者,未央宮西北織室、暴室之類,《黃圖》謂爲尚方工作之所者也。作室門,則工徒出入之門,蓋未央宮之便門也。斧敬法闥,師古曰:敬法,殿名也。闥,小門也。謂斧斫之也。呼曰:「反虜王莽,何不出降!」師古曰:呼,音火故翻。火及掖庭、承明,黃皇室主所居。黃皇室主曰:「何面目以見漢家!」自投火中而死。

莽避火宣室前殿,火輒隨之。莽紺袀服,師古曰:紺,深青而揚赤色也。袀,純也,純爲紺服也。袀,音均,又音弋旬翻。持虞帝匕首;虞帝安得有匕首,蓋莽自爲之以愚夫人。天文郎按式於前,師古曰:式,所以占時日。天文郎,今之用式者也。莽旋席隨斗柄而坐,曰:「天生德於予,漢兵其如予何!」莽引孔子之言以自況。

 

 경술일(3일)에 또 날이 밝자 여러 신하들이 황제의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선실의 전전에서부터 점대(漸臺:미앙궁의 滄池 가운데 있는 섬 안의 건물)로 가는데, 공경과 수행 관원들 1천여 명이 여전히 그를 따랐다.

 庚戌,且明,羣臣扶掖莽自前殿之漸臺,【章:十二行本「臺」下有「欲阻池水」四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張校同;退齋校同。】此未央宮之漸臺也。《水經》:未央漸臺在滄池中。建章漸臺在太液池中。程大昌曰:漸者,漬也,言臺在水中受其漸漬也。凡臺之環浸于水者,皆可名爲漸臺。漸,子廉翻。公卿從官尚千餘人隨之。從,才用翻。

 

 왕읍은 밤낮으로 싸워서 극도로 피로하였고, 병사들도 죽고 다쳐서 대부분이 소진되자 말을 달려 궁으로 들어와 여러 곳을 돌다가 점대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인 시중 왕목이 의관을 벗어던지고 도망하려는 것을 보자 왕읍이 꾸짖어서 돌아오게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황제를 지켰다.

 王邑晝夜戰,罷極,師古曰:罷,讀曰疲。士死傷略盡;馳入宮,間關至漸臺,師古曰:間關,猶言崎嶇,展轉也。見其子侍中睦解衣冠欲逃,邑叱之,令還,父子共守莽。

 

 군인들이 전중으로 들어와서 황제가 점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사람이 함께 그곳을 수백 겹으로 둘러쌌다. 점대 위에서도 오히려 화살을 쏘았으나 화살이 다 떨어지자 짧은 칼로 접전을 벌였다. 왕읍의 부자와 대운, 왕순은 싸우다 죽었고, 황제는 방으로 들어갔다.

 軍人入殿中,聞莽在漸臺,衆共圍之數百重。重,直龍翻。臺上猶與相射,射,而亦翻。矢盡,短兵接,王邑父子、䠠惲、王巡戰死,莽入室。

 

 하포 때(申時) 많은 병사들이 점대로 올라갔고, 묘흔과 당존, 왕성 등이 모두 죽었다. 상 사람 두오가 황제를 죽이고, 교위인 동해 사람 공빈취가 황제의 머리를 잘랐는데, 군인들이 황제의 몸을 나누는데, 마디마디를 해체하고 살을 저미면서 다투다가 서로 죽인것이 수십 명이었다. 공빈취가 황제의 머리를 가지고 왕헌에게로 갔다.

 下餔時,衆兵上臺,晡後,謂之下晡。按《前書‧天文志》:旦至食時,食時至日昳,日昳至晡,晡至下晡,下晡至日入。苗訢、唐尊、王盛等皆死。訢,音欣。商人杜吳殺莽,校尉東海公賓就斬莽首;師古曰:公賓姓,就名也。《風俗通》曰:魯大夫公賓庚之後。王莽五十一居攝,五十四卽眞,六十八誅死。軍人分莽身,節解臠分,爭相殺者數十人;公賓就持莽首詣王憲。

 

 왕헌은 스스로 한나라의 대장군이라고 부르면서 성 안에 있는 병사 수십만 명을 모두 자기에게 귀속시키고, 동궁(장락궁)에 머물면서 왕망의 후궁을 처로 삼고, 그의 수레와 복장을 사용하였다.

 憲自稱漢大將軍,城中兵數十萬皆屬焉;舍東宮,師古曰:舍,止宿也。妻莽後宮,乘其車服。

 

 계축일(6)에 이송과 등엽이 장안으로 들어오고, 장군 조맹과 신도건이 또한 도착하였다. 왕헌이 얻은 새수를 위로 바치지 않고, 궁녀들을 많이 끼고서 천자의 북과 기치를 꽂고 있으므로 그를 잡아서 목을 베었다. 왕망의 수급을 전거로 완(宛:경시제 유현이 있는곳)에 보내니 저자에 내걸었다. 백성들이 함께 그것을 들어서 치고 때렸으며, 어떤 사람은 그 혀를 잘라 먹었다.

 癸丑,李松、鄧曄入長安,將軍趙萌、申屠建亦至;以王憲得璽綬不上,璽,斯氏翻。綬,音受。上,時掌翻。多挾宮女,建天子鼓旗,收斬之。傳莽首詣宛,縣於市;百姓共提擊之,縣,讀曰懸。提,音徒計翻。或切食其舌。

 

 반고가 찬하였다.

 "신황제 왕망은 처음에 외척으로서 시작하여 일어났는데, 절개를 굽히고 힘써 행동을 하여 명예를 얻었고, 보정하는 자리에까지 이르자 국가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엿으며, 정직한 길로 갔는데, 어찌하여 이른바 '기색으로는 인한 태도를 취하고 행동으로는 어긋난' 사람이 되었는가?

 班固贊曰:王莽始起外戚,折節力行以要名譽,折,而設翻。要,一遙翻。及居位輔政,勤勞國家,直道而行,豈所謂『色取仁而行違』者邪!師古曰:《論語》載孔子答子張之言也。不仁之人假仁者之色,而行則違之。行,下孟翻。

 

 왕망은 이미 어질지 아니하고 망령스럽고 사악한 재간을 가졌고 또한  네 명의 아버지가 쌓아온 권력을 올라타고서 한나라가 중간에 미약해지고 나라의 후사가 세 번이나 끊어지는 시기를 만났고, 태후가 오래 살아있게 되어 그를 위하여 종주 노릇을 하였으니 그러므로 그는 간사하고 사특함을 방자하게 하여 찬탈하고 도적질하는 화를 완성한 것이다. 이를 미루어 말하건대 이 역시 천시이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莽旣不仁而有佞邪之材,又乘四父歷世之權,四父,謂王鳳、王音、王商、王根相繼秉政,皆莽諸父也。遭漢中微,國統三絕,成、哀、平皆絕。而太后壽考,爲之宗主,故得肆其姦慝以成篡盜之禍。推是言之,亦天時,非人力之致矣!

 

 그가 황제의 자리를 절취하여 남쪽을 향하여 앉게 되었지만, 넘어지고 뒤집힐 형세는 걸이나 주 때보다 더 위험하였지만 그러나 왕망은 편안하게 스스로 황제와 우가 다시 났다고 하면서 비로소 방자해져서 성을 내고, 위엄과 속임수를 펼치니, 그 해독은 여러 화하족이 사는 곳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 혼란은 만족과 맥족에게까지 퍼져 나갔는데도 오히려 그의 욕망을 아직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였다.

 及其竊位南面,顚覆之勢險於桀、紂,而莽晏然自以黃、虞復出也,黃帝、虞舜,莽祖之。復,扶又翻。乃始恣睢,奮其威詐,師古曰:睢,音呼季翻。毒流諸夏,亂延蠻貉,猶未足以逞其欲焉。

 

 이리하여 사해 안에서는 시끄러워져서 그들이 즐겹게 살려는 마음을 없앴고, 안팎에서 분노하고 원한이 생기게 되었으며, 멀건 가깝건 모두 일어나니 성지는 지킬 수 없게 되었고, 지체는 분열되었다. 마침내 천하의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었고, 두루 살아있는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쳤으니, 책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난신적자' 가운데 그들이 끼친 화난과 실패를 상고해보면, 아직까지도 왕망처럼 심한 사람은 없었다!

 是以四海之內,囂然喪其樂生之心,師古曰:囂然,衆口愁貌也,音五高翻。喪,息浪翻。中外憤怨,遠近俱發,城池不守,支體分裂,遂令天下城邑爲虛,虛,讀曰墟。害徧生民,自書傳所載亂臣賊子,考其禍敗,未有如莽之甚者也!

 

 옛날 진나라 때《시》《서》를 불태우고 사사로운 의론을 세어놓았지만 왕망은 6예를 외우며 자기의 간사한 말을 문식하였는데, 같은 결과를 가져왔지만 다른 방법들은 모두 멸망하였으며 사용되었으니 모두가 성왕을 위해 몰아내어 제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昔秦燔《詩》、《書》以立私議,莽誦《六藝》以文姦言,師古曰:以《六經》之事文飾姦言。同歸殊塗,俱用滅亡,皆聖王之驅除云爾。蘇林曰:聖王,光武也,爲光武驅除也。師古曰:言驅逐蠲除以待聖人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