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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의 봉기

solpee 2020. 1. 2. 06:23

 

紀30 王莽 地皇 3年 (壬午, 22)

 

 

 11.애초에, 장사왕 유발이 용릉절후 유매를 낳고, 유매는 대후 유웅거를 낳았으며, 유웅거는 고후 유인을 낳았다. 유인은 남방이 지대가 낮고 습하다 하여 남양의 백수향(호북 조양현)으로 옮겨서 책봉하니 종족들과 더불어 집을 마련하였다. 유인이 죽고, 아들 유창이 계승하였는데, 왕망이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게 되어 봉국이 없어졌다.

 11. 初,【張:「初」下脫「景帝子」三字。】長沙定王發生舂陵節侯買,買生戴侯熊渠,熊渠生考侯仁。仁以南方卑濕,徙封南陽之白水鄕,與宗族往家焉。賢曰:舂陵,鄕名,本屬零陵泠道縣,在今永州唐興縣北;元帝時,徙南陽,仍號舂陵,故城在今隨州棗陽縣東。杜佑曰:棗陽,後漢蔡陽縣;漢舂陵故城在今縣東。仁卒,子敞嗣;值莽篡位,國除。

 

 절후(유매)의 작은 아들인 유외는 울림 태수가 되었는데, 유외는 기록 도위 유회를 낳고, 유회는 남돈 사람 번중의 딸을 취하여 세 아들을 낳았는데, 유연·유중·유수이었고, 형제는 일찍이 부친을 잃게 되어 숙부 유랑에게서 자랐다.

 節侯少子外爲鬱林太守,賢曰:鬱林郡,今郴州縣。余按唐郴州無鬱林縣,而唐之桂、柳、鬱、邕、象、鷰、潯、南、尹、樂、融、賓等州,皆漢鬱林郡地。外生鉅鹿都尉回,賢曰:鉅鹿郡,今邢州縣。余按唐邢州固有鉅鹿縣,而唐邢、趙二州皆漢鉅鹿郡地。回生南頓令欽。賢曰:南頓縣,屬汝南郡;故城在今陳州項城縣西。《括地志》:陳州南頓縣,古頓子國;逼於陳,南徙,故曰南頓。欽娶湖陽樊重女,湖陽縣,屬南陽郡。宋白曰:湖陽縣,古蓼國地。生三男:縯,仲,秀,縯,音衍。兄弟早孤,養於叔父良。

 

 유연은 성품이 강직하고 굳고 강개하며 큰 절개를 가졌는데, 왕망이 한을 찬탈하면서부터 항상 분개하며 사직을 회복할 생각을 품고 집안사람으로서의 생업은 하지 않고 몸을 기울이고 재산을 깨뜨려서 천하의 영웅호걸들과 왕래하며 교분을 맺었다.

 縯性剛毅,慷慨有大節,自莽篡漢,常憤憤,懷復社稷之慮,不事家人居業,傾身破產,交結天下雄俊。

 

 유수는 隆準日角(융준일각:높은 코에 이마가 튀어나옴. 반골상)이면서 성품이 부지런하여 농사를 지었는데 유연이 항상 그를 비방하고 비웃으며 고조의 형 유중과 비교하였다. 유수의 누나 유원은 신야 사람 등신의 처가 되었는데, 유수가 일찍이 등신과 함께 양 사람 채소공의 집을 지나게 되었고, 채소공은 자못 도참을 배워서 말하였다.

 秀隆準日角,賢曰:隆,高也。許負云:鼻頭爲準。鄭玄《尚書中候註》云:日角,謂庭中骨起狀如日。性勤稼穡;賢曰:種曰稼,斂曰穡。縯常非笑之,比於高祖兄仲。賢曰:仲,郃陽侯喜也,能爲產業。高祖爲太上皇壽曰:始大人常以臣不能治產業,不如仲力;今其業所就,孰與仲多?秀姊元爲新野鄧晨妻,秀嘗與晨俱過穰人蔡少公,少公頗學圖讖,言

 

 "유수는 마땅히 천자가 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국사공인 유수입니까?"

 유수는 농담으로 말하였다.

 "제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등신은 마음속으로 홀로 기뻐하였다.

「劉秀當爲天子」;少,詩照翻。讖,楚譖翻。或曰:「是國師公劉秀乎?」秀戲曰:「何用知非僕邪!」坐者皆大笑。晨心獨喜。

 

 완 사람 이수는 성력과 참기를 좋아하여 왕망의 종경사가 되었다. 그가 일찍이 그의 아들인 이통에게 말하였다.

 "유씨가 마땅히 일어날 것이고, 이씨가 보필한다."

 신시와 평림의 군사들이 일어나게 되자 남양군이 소동하였는데, 이통의 사촌동생인 이일이 이통에게 말하였다.

 "지금 사방이 소란스럽고 한은 부흥되오야 합니다. 남양의 종실은 오직 유백승의 형제가 널리 무리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니 더불어 대사를 도모할 만합니다."

 宛人李守,好星曆、讖記,宛,於元翻。好,呼到翻。爲莽宗卿師,賢曰:平帝五年,王莽攝政,郡國置宗師以主宗室。蓋時尊之,故曰宗卿師之。余按莽置宗師,主漢宗室耳。此宗卿師,莽篡時所置也。嘗謂其子通曰:「劉氏當興,李氏爲輔。」及新市、平林兵起,南陽騷動,通從弟軼謂通曰:從,才用翻。軼,音逸,又徒結翻。「今四方擾亂,漢當復興。復,扶又翻,又如字。南陽宗室,獨劉伯升兄弟汎愛容衆,可與謀大事。」縯,字伯升。

 

 이통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내 뜻이오."

 마침 유수가 완에서 곡식을 파는데, 이통이 이일을 보내서 유수를 영접하게 하고, 서로 만나보고 이어서 참문을 다 이야기하고는 서로 결합하기로 약속하고, 계책을 정하려고 의논하였다. 이통은 입추에는 재관이 기병을 모두 시험보는 날이니, 전대대부 진부와 속정 양구사를 겁탈하고, 이어서 대중을 호령하고 이일과 유수로 하여금 용릉으로 돌아가 군사를 일으켜서 서로 호응하게 하고자 하였다.

 通笑曰:「吾意也!」會秀賣穀於宛,宛,於元翻。通遣軼往迎秀,與相見,因具言讖文事,與相約結,定計議。通欲以立秋材官都試騎士日,劫前隊大夫甄阜及屬正梁丘賜,莽改南陽曰前隊,置大夫職如太守,屬正職如都尉。師古曰:隊,音遂。甄,之人翻。因以號令大衆,使軼與秀歸舂陵舉兵以相應。

 

 이에 유연이 여러 영웅호걸들은 불러놓고 계책을 의논하여 말하였다.

 "왕망이 포악하여 백성들은 나뉘고 무너졋고, 지금은 또 마르고 가뭄이 드는 것이 몇 해를 잇는데, 병란이 나란히 일어나니, 이는 역시 하늘이 멸망시키는 때이고, 고조의 업적을 회복하여 만세까지 안정할 시기이다."

 무리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於是縯召諸豪桀計議曰:「王莽暴虐,百姓分崩;今枯旱連年,兵革並起,此亦天亡之時,復高祖之業,定萬世之秋也!」言定天下傳之萬世,此其時也。衆皆然之。

 

 이에 가까운 빈객들을 여러 현에 나누어 파견하여 병사를 일으켰는데, 유연은 스스로 용릉의 자제들을 징발하였다. 여러 집안의 자제들은 두려워서 모두 도망하여 숨으면서 말하였다.

 "유백승이 나를 죽인다."

 유수가 진홍색의 옷과 큰 관을 쓴 것을 보게 되자 모두들 놀라며 말하였다.

 "삼가고 후한 사람도 다시 이렇게 하는구나!"

 마침내 점차 스스로 안정되었다.

 於是分遣親客於諸縣起兵,縯自發舂陵子弟。諸家子弟恐懼,皆亡匿,曰:「伯升殺我!」及見秀絳衣大冠,董巴《輿服志》曰:大冠者,武官冠之。《東觀記》:上時絳衣大冠、將軍服也。皆驚曰:「謹厚者亦復爲之!」乃稍自安。

 

 무릇 자제 7천~8천 명을 얻고 빈객들을 부서로 나누고 스스로 '주천도부'라고 호칭하였다. 유수의 나이는 이때 스물여덟 살이었다. 이통은 아직 일으키지 아니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도망하여 달아나고, 아버지 이수와 가족들 가운데 연좌되어 죽은 사람이 64명이었다.

 凡得子弟七八千人,部署賓客,自稱「柱天都部」。賢曰:柱天,若天之柱也。都部者,都統其衆也。秀時年二十八。李通未發,事覺,亡走;父守及家屬坐死者六十四人。

 

 유연은 친척인 유가를 시켜서 신시와 평림의 병사들을 초청하여 유세하며, 그들의 두목인 왕봉과 진목과 함께 서쪽으로 가서 장취를 공격하게 하였고, 나아가서 당자향을 도륙하고, 또 호양 현위를 죽이게 하였다.

 縯使族人嘉招說新市、平林兵,說,輸芮翻。與其帥王鳳、陳牧西擊長聚;帥,所類翻。聚,才喻翻;下同。進屠唐子鄕,賢曰:多所誅殺曰屠。唐子鄕有唐子山,在今唐州湖陽縣西南。又殺湖陽尉。

 

 군대 안에서는 재물을 분배하는 것이 고르지 않아서 무리들이 화를 내고 한스러워 하여 도리어 유씨를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유수는 종인들이 얻은 재물을 거두어 모두 그들에게 주자 무리들이 마침내 기뻐하였다. 나아가서 극양을 점령하였는데, 이일과 등신이 빈객들을 거느리고 와서 회합하였다.

 軍中分財物不均,衆恚恨,欲反攻諸劉;恚,於避翻。劉秀斂宗人所得物,悉以與之,衆乃悅。進拔棘陽,賢曰:棘陽,縣名,屬南陽郡,在棘水之陽,古謝國也;故城在今唐州湖陽縣西北。棘,音紀力翻。李軼、鄧晨皆將賓客來會。將,卽亮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