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紀29 王莽 始建國 4年》 (壬申, 12)
6. 애초에, 오위장수들이 서남이에게로 나가서 구정왕을 후로 바꾸자, 왕 한은 원망하고 노하여 붙지 않았다.
황제는 장가의 대윤인 주흠에게 넌지시 일러서 한을 속여서 죽이게 하였다. 한의 동생인 승이 군사를 일으켜 주흠을 살해하여서 주군은 이를 공격하였으나 항복시킬 수 없었다.
6. 初,五威將帥出西南夷,改句町王爲侯,王邯怨怒不附。〈師古曰:邯,句町王之名也,音下甘翻。〉莽諷牂柯大尹周歆詐殺邯。〈牂柯,音臧哥。《考異》曰:《西南夷傳》作「周欽」。《莽傳》作「周歆」,今從之。〉邯弟承起兵殺歆,州郡擊之,不能服。
황제는 또 고구리 병사를 발동하여 흉노를 공격하려는데, 고구리에서 가려고 하지 아니하니 요서에서 억지로 압박하자 모두 도망하여 요새를 나가고 이어서 법을 범하면서 침구하였다. 요서 대윤 전담이 이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莽又發高句驪兵擊匈奴;高句驪不欲行,郡強迫,皆亡出塞,因犯法爲寇。〈強,其兩翻。〉遼西大尹田譚追擊之,爲所殺。
주군에서는 그 허물을 고구리후 추(騶: 이때는 유리왕 때라 맞지 않다)에게 돌렸는데, 엄우가 상주하였다.
"맥인(貉人: 당시 한에서는 맥인, 고리인, 부여인, 예맥인의 구별이 정확하지 않다)이 범법하는 것은 추를 좇은 것이 아니어서 바로 다른 마음을 가직도 있으니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또 그들을 안위하게 하여야 합니다.
州郡歸咎於高句驪侯騶,嚴尤奏言:「貉人犯法,不從騶起;〈貉,與貊同,莫百翻。《後漢書》,句驪,一名貊耳。〉正有他心,宜令州郡且尉安之。〈師古曰:假令騶有惡心,亦當且慰安。〉
지금 그들에게 큰 죄를 두텁게 덮어씌운다면 아마 그들은 끝내 배반할까 걱정이고, 부여 족속들에는 반드시 화합함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엿는데,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우환입니다."
今猥被以大罪,〈師古曰:猥,多也,厚也。被,加也,音皮義翻。余謂猥,積也,曲也。〉恐其遂畔,夫餘之屬必有和者。〈和,胡臥翻。〉匈奴未克,夫餘、濊貉復起,此大憂也。」〈《後漢書》:濊與句驪同種,言語法俗大抵相類,各有部界。復,扶又翻。〉
황제가 안위하지 아니하자 예맥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는데,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 이들을 공격하게 하엿다. 엄우가 고구리후 추를 유인하고, 오자 머리를 베어서 장안으로 보냇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고구리를 하구리로 고쳤다.
莽不尉安,濊貉遂反;詔尤擊之。尤誘高句驪侯騶至而斬焉,傳首長安。〈騶,側尤翻。〉莽大說,更〈【章:十二行本「更」上有「下書」二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名高句驪爲下句驪。〈說,讀曰悅。更,工衡翻;下同。〉
이에 예맥 사람들이 더욱 변방을 범하니 동북쪽과 서남이가 모두 어지러웠다. 황제는 속으로 바야흐로 왕성하여서 사이는 병탄하여 멸망시킨다고 할 정도로 못된다고 여기고, 오직 옛날 일만을 생각하여 다시 편지를 내렸다.
於是貉人愈犯邊,東、北與西南夷皆亂。〈東,濊貊;北,匈奴也。〉莽志方盛,以爲四夷不足吞滅,專念稽古之事,復下書:
"올해 2월에 동쪽으로 순수할 것이니, 예의와 조도를 갖추어라."
이미 그러하였는데 문모태후의 몸이 편안하지가 않아서 또 중지하고 훗날을 기대하였다.
「以此年二月東巡狩,具禮儀調度。」〈復,扶又翻。調,徒弔翻。〉旣而以文母太后體不安,且止待後。
《漢紀29 王莽 始建國 5年》 (癸酉, 13)
1. 봄, 2월에 문ㅁ모 황태후가 붕어하였는데, 나이는 여든 네 살이며 위릉에 장사를 지내고 원제와 더불어 합장하였지만 도랑을 파서 이롤 끊어 놓았다. 신실에서는 대대로 그 사당에 제사를 지냈는데, 운제는 배향하였지만 제상 아래에 암치하였다.
1. 春,二月,文母皇太后崩,年八十四;葬渭陵,與元帝合,而溝絕之。〈如淳曰:葬於司馬門內,作溝絕之。〉新室世世獻祭其廟;元帝配食,坐於牀下。莽爲太后服喪三年。〈爲,于僞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