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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복의 은거!

solpee 2019. 12. 29. 10:58

 

紀27 平帝 元始2 (壬戌, 2

 

 

 10. 매복은 왕망이 반드시 한 왕조를 찬탈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하루아침에 처자를 버리고 떠났는데, 간 곳을 몰랐다. 그 후에 사람들 가운데 회계에서 매복을 본 사람이 있었는데, 성명을 바꾸고 오 지방의 저자거리에서 문졸이 되었다고 하였다.

 10. 梅福知王莽必篡漢祚,一朝棄妻子去,不知所之。其後,人有見福於會稽者,變姓名爲吳市門卒云。會稽郡,時治吳縣。會,工外翻。

 

 15. 왕망이 자신의 딸을 황제와 짝지어 황후가 되게 하여야 그 권력을 굳게 하고자 하여 상주하였다.

 "황제가 즉위한 지 3년인데 장추궁이 아직 세워지지 않았고, 액정에는 잉첩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근래의 국가의 어려움은 본래 후사가 없는 데서부터이고, 배필을 찾는 방법의 옳지 않았으니, 청컨대 《오경》을 참고하고 토론하여 후를 취하는 예를 정하고, 12녀의 뜻을 바로잡아서 후사를 잇는 길을 넓혀 이왕의 후손과 주공·공자의 후손과 열후들 중에서 장안에 있는 정처 소생의 여자들을 널리 채택하십시오."

 15. 莽欲以女配帝爲皇后以固其權,奏言:「皇帝卽位三年,長秋宮未建,師古曰:秋者,收成之時;長者,恆久之義;故以爲皇后宮名。掖庭媵未充。媵,以證翻;從嫁之女也。古者諸侯一國嫁女,九國媵之。乃者國家之難,本從無嗣,配取不正,請考論《五經》,定取后禮,難,乃旦翻。師古曰:取,皆讀曰娶。正十二女之義,以廣繼嗣,古者天子一娶九女。《公羊傳》曰:諸侯一聘九女,則周之天子固有十二女之禮。莽之進女也十一媵,蓋通后爲十二女也。博采二王後及周公、孔子世、列侯在長安者適子女。」二王後,殷、周之後。周公、孔子世,周、孔之後世,嫡相承者。師古曰:適,讀曰嫡。嫡,謂妻所生也。

 일이 유사에 내려가자 많은 여자들의 이름을 올렸는데, 왕씨의 여자들이 대부분 뽑힌 가운데 있었고, 왕망은 그들이 자기의 딸과 경쟁할까 두려워하여 즉시 말씀을 올려 말하였다.

 "자신은 덕이 없고 자식도 재주가 아래 급이어서 많은 여자들과 나란히 채택되기에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事下有司,上衆女名,下,遐稼翻。上,時掌翻;下同。王氏女多在選中者,莽恐其與己女爭,卽上言:「身無德,子材下,不宜與衆女並采。」

 

 태후는 왕망의 말이 지극한 정성이라고 여기고, 이에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왕씨의 여자들은 짐의 외가이니 그들은 채택하지 마라."

 서민·제생·낭이 이상이 궁궐문을 지키면서 편지를 올리는 사람이 하루에  천여 명이었고, 공경대부들  가운데서는  혹 궁정에 가고, 혹 문 아래에서 엎드려 모두 말하였다.

 太后以爲至誠,乃下詔曰:「王氏女,朕之外家,其勿采。」庶民、諸生、郎吏以上守闕上書者日千餘人,公卿大夫或詣廷中,或伏省戶下,咸言:

 

 안한공의 성대한 공훈이 이와 같이 당당한데도, 지금 황후를 세우게 되어서 어찌하여 단지 공의 딸만 제외하니, 천하 사람들이 어떻게 그 명령에 순종하겠습니까? 바라건대 공의 딸로 천하 사람들의 어머니로 삼으십시오!"

「安漢公盛勳堂堂若此,今當立后,獨柰何廢公女,天下安所歸命!願得父女爲天下母!」

 

 왕망은 장사 이하를 나누어 보내서 각각 공경과 제생들에게 중지하도록 말하였지만 상서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졌다. 태후는 부득이 하여 공경들의 말을 듣고, 왕망의 딸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왕망이 다시 스스로 아뢰었다.

 莽遣長史以下分部曉止公卿及諸生,師古曰:分,音扶問翻。曉止,開諭之使止也。而上書者愈甚。太后不得已,聽公卿采莽女。莽復自白:

 

 "의당 널리 여러 여자들을 선발하십시오."

 공경들이 앞을 다투어 말하였다.

 "여러 여자들을 채택하여서 정통을 두 명으로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왕망은 마침내 말하였다.

 "바라건대 딸을 만나 보십시오."

「宜博選衆女。」公卿爭曰:「不宜采諸女以貳正統。」師古曰:言皇后之位當在莽女也。莽乃白:「願見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