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곽광의 사망.

solpee 2019. 12. 11. 16:28

 

紀16 宣帝 持節 (壬子, 前69

 

 

 4. 이 해에 우정국이 정위가 되었다. 우정국은 의혹사건을 처리하는데 고르게 법을 적용하고, 홀아비와 과부를 애달프게 생각하는데 힘썼으며, 죄가 있는지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처리하고 더욱 신중한 마음을 가지고 심리하였다.

 4. 是歲,于定國爲廷尉。《姓譜》:周武王子封於邘,子孫以國爲氏;其後去「邑」,單爲「于」。定國決疑平法,務在哀鰥寡,罪疑從輕,加審愼之心。

 

 조정에서는 이를 칭찬하여 말하였다.

 "장석지가 정위가 되니, 천하에는 원통한 백성이 없었다. 우정국이 정위가 되니 백성들은 스스로 억울하지 않았다."

 朝廷稱之曰:「張釋之爲廷尉,天下無冤民。師古曰:言決罪皆當。于定國爲廷尉,民自以不冤。」師古曰:言知其寬平,皆無冤枉之慮也。

 

 

紀16 宣帝 地節 2 (癸丑, 前68

 

 

 1. 봄에 곽광이 병이 들어 위독하였다. 거가가 스스로 입석하여 문병을 하고 황상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렷다. 곽광이 서신을 올려서 은혜에 감사하고 국읍 3천 호를 나누어 형의 손자인 봉거도위 곽산을 책봉하여 열후로 삼아 형 곽거병의 제사를 받들게 해주기를 원하였다.

 1. 春,霍光病篤。車駕自臨問,上爲之涕泣。爲,于僞翻。光上書謝恩,願分國邑三千戶以封兄孫奉車都尉山爲列侯,奉兄去病祀。霍去病封冠軍侯,子嬗嗣封,薨,無後,國除,故光乞分國邑以封其孫。

 

 그날로 곽광의 아들인 곽우를 우장군으로 삼앗다. 3월 경오일(8)에 곽광이 죽었다. 황상과 황태후가 친히 곽광의 영전에 임석하였고, 중이천석에게 묘를 만들게 하고, 재국과 장례도구는 모두 승여제도처럼 하였으며, 시호를 선성후라고 하였다.

 卽日,拜光子禹爲右將軍。三月,庚午,光薨。上及皇太后親臨光喪,中二千石治冢,賜梓宮、葬具皆如乘輿制度,諡曰宣成侯。

 

 삼하의 병졸을 발동하여 흙을 파고 덮었으며, 원읍 300호를 두고 장과 승이 받들고 지키게 하였고, 조서를 내려서 그 후세들에게 부세를 면제하여 주고, 그 작읍을 같게 하여 주며 세세토록 준 것과 다름없게 하였다.

 어사대부 위상이 봉사를 올려서 말하였다.

 發三河卒穿復土,乘,繩證翻。復,如字。置園邑三百家,長、丞奉守;下詔復其後世,復,方目翻。疇其爵邑,應劭曰:疇,等也。世世無有所與。與,讀曰豫。

御史大夫魏相上封事言事而不欲宣泄,重封上之,故曰封事。《漢官》曰:凡章表皆啓封;其言密事,得用皁囊。曰:

 

 "국가는 최근에 대장군을 잃어서 마땅히 밝은 공신을 들어내어 번국들을 진무하여야 하니, 큰 자리를 비워 두지 마셔서 권력의 쟁탈을 막으십시오. 마땅히 거기장군 장안세를 대장군으로 삼으셔서 광록훈에 관한 일을 관장하지 말게 하고, 그의 아들인 장연수를 광록훈으로 삼으십시오."

「國家新失大將軍,宜顯明功臣以塡藩國,塡,古鎭字通。毋空大位,以塞爭權。師古曰:大臣位空,則起爭奪之權也。塞,悉則翻。宜以車騎將軍安世爲大將軍,毋令領光祿勳事;以其子延壽爲光祿勳。」

 

 황상도 역시 이를 채용하려고 하였다. 여름, 4월 무신일(17)에 장안세를 대사마·거기장군으로 삼고, 영상서사로 삼았다.

 上亦欲用之。夏,四月,戊申,以安世爲大司馬、車騎將軍,領尚書事。《考異》曰:《百官表》:「地節三年,四月,戊申,張安世爲大司馬。七月,戊戌,更爲衞將軍;霍禹爲大司馬。七月,壬辰,禹要斬。」荀《紀》:「三年,四月,戊辰,安世爲大司馬。」按明年四月無戊辰,七月無戊戌,又不當再言七月。以《宣紀》、《張安世》、《霍光傳》考之,安世爲司馬當在今年,爲衞將軍當在明年十月,禹死在四年七月,蓋年表旁行通連書之,致此誤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