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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偏不黨,王道蕩蕩/불편부당하니 왕도가 탕탕하다!

solpee 2019. 12. 4. 04:20

 

紀13 武帝 後元 2 (甲午, 前87

 

 

 2. 무제가 병이 위독하였는데, 곽광이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만약에 꺼리지 않고 말하게 된다면 누가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합니까?"

 황상이 말하였다.

 "그대는 전에 내가 그림을 그려서 뜻을 유시하지 않았는가? 어린 아들을 세울 것이니, 그대는 주공의 일을 행사하라."

 2. 上病篤,霍光涕泣問曰:「如有不諱,賢曰:不諱,謂死也。死者人之常,故言不諱也。師古曰:不諱,言不可諱也。誰當嗣者?」上曰:「君未諭前畫意邪?立少子,君行周公之事!」

 

 곽광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여 말하였다.

 "저는 금일제만 못합니다."

 금일제가 역시 말하였다.

 "신은 외국인이니 곽광만 못하며 또 흉노로 하여금 한을 가볍게 보게 할 것입니다."

 을축일(12)에 조서를 내려서 유불릉을 황태자로 삼았는데, 그때 나이는 여덟 살이었다.

 光頓首讓曰:「臣不如金日磾!」日磾亦曰:「臣,外國人,日磾,休屠王子,故云然。不如光;且使匈奴輕漢矣!」乙丑,詔立弗陵爲皇太子,時年八歲。

 

 병인일(13)에 곽광을 대사마·대장군으로 삼고, 금일제를 거기장군으로 삼으며, 태복 상관걸을 좌장군으로 삼았는데, 어린 군주를 보필하라는 유조를 받았고, 또 수속도위 상홍양을 어사대부로 삼았으며, 모두 침실의 침상 아래에서 벼슬을 주었다. 곽광은 궁정을 출입한 지 20여 년이 되었는데, 나가면 수레로 모셨고, 들어와서는 좌우에서 시중을 들었으며, 조심스럽고 근신하여 아직 일찍이 허물된 일이 없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자세히 살펴서 매번 궁전문을 출입하고 내려오면서 멈추고 나가는 것이 항상 한 곳이어서 낭(郞:금위관)과 복야(僕射:환관책임자, 상선)가 몰래 그를 살펴 보았는데, 한 치도 차이가 없었다.

 丙寅,以光爲大司馬、大將軍,日磾爲車騎將軍,太僕上官桀爲左將軍,受遺詔輔少主,又以搜粟都尉桑弘羊爲御史大夫,皆拜臥內牀下。光出入禁闥二十餘年,出則奉車,入侍左右,小心謹愼,未嘗有過。爲人沈靜詳審,沈,持林翻。每出入、下殿門,止進有常處,郎、僕射竊識視之,師古曰:識,記也,音式志翻,又職吏翻。不失尺寸。

 

 금일제는 황상의 좌우에 있으면서 눈으로 거슬러 보지 않은 것이 수십 년이었으며, 궁녀를 내려 주어도 감히 접근하지 않았고, 황상이 그의 딸을 후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으나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의 돈독하고 신중함이 이와 같아서 황상은 그를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日磾在上左右,目不忤視者數十年;忤,逆也,五故翻。賜出宮女,不敢近;上欲內其女後宮,內,讀曰納。不肯;其篤愼如此,上尤奇異之。

 

 금일제의 맏아들은 황제와 놀이 짝인 아이여서 황제가 심히 그를 아꼈다. 그 후 놀이 짝이었던 아이가 자라서 삼가 조심하지 않고 전 아래에서 궁인과 놀이를 하였는데, 금일제가 바로 그것을 보자 그가 음란한 것을 싫어하여 드디어 놀이 짝인 아이를 죽였다.

 日磾長子爲帝弄兒,帝甚愛之。其後弄兒壯大,不謹,自殿下與宮人戲;日磾適見之,惡其淫亂,惡,烏路翻。遂殺弄兒。

 

 황상이 이를 듣고서 크게 화를 냈다. 금일제가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면서 그 놀이 짝인 아이를 죽여야 하는 상황을 갖추어 말하였다. 황상이 심히 슬퍼하여 이 때문에 눈물을 흘렸고 이미 그러하고서는 마음으로 더욱 금일제를 존경하였다.

 上聞之,大怒。日磾頓首謝,具言所以殺弄兒狀。上甚哀,爲之泣;爲,于僞翻。已而心敬日磾。

 

 상관걸은 애초에는 재주와 힘으로 아낌을 받아서 미앙궁의 구령(廐令: 마굿간 책임자)이 되었는데, 황상이 일찍이 몸이 편안하지 않다가 쾌유되자 말을 가서 보았는데, 말은 대부분이 말라 있었다. 황상이 화가 나서 말하였다.

 上官桀始以材力得幸,桀少時爲羽林期門郎,從帝上甘泉,天大風,車不得行,解蓋授桀;桀奉蓋,雖風,常屬車,雨下,蓋輒御,上奇其材力。爲未央廐令;未央廐令屬太僕。上嘗體不安,及愈,見馬,師古曰:見,謂呈見之,音胡電翻。馬多瘦,上大怒曰:

 

 "영은 내가 다시는 말을 못 볼 것이기 때문인가?"

 형리에게 내려 보내려고 하였다. 상관걸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신이 듣건대 성체가 편치 않다 하여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느라 생각이 진실로 말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말을 아직 마치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몇 줄 흘러내렸다. 황상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여, 이로부터 가깝게 되어 시중이 되었다가 조금씩 자리를 옮겨 태복에 이르렀다.

「令以我不復見馬邪!」欲下吏。復,扶又翻。下,遐嫁翻。桀頓首曰:「臣聞聖體不安,日夜憂懼,意誠不在馬。」師古曰:誠,實也。言未卒,泣數行下。卒,子恤翻。行,戶剛翻。上以爲愛己,由是親近,近,其靳翻。爲侍中,稍遷至太僕。

 

 세 사람은 모두 황상이 아끼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으니, 그러므로 특히 그들을 들어서 뒷일을 맡겼다. 정묘일(14)에 황제가 오작궁에서 붕어하였고, 미양궁의 전전에 들어가서 염하였다.

 三人皆上素所愛信者,故特舉之,授以後事。丁卯,帝崩于五柞宮;臣瓚曰:壽七十一。入殯未央宮前殿。

 

 황제는 총명하고, 결단을 내릴 수 있었으며, 사람 쓰는 일을 잘하였고, 법을 시행하는 데에는 인정을 베푸는 바가 없었다. 융려공주(무제의 여동생)의 아들인 소평군이 황제의 딸인 이안공주를 모시고 살았다. 융려공주가 병이 들어 곤란하게 되자, 황금 1천근과 전 1천만을 가지고 소평군을 위하여 죽을죄를 미리 속죄해 달라고 하자, 황상은 이를 허락하였다.

 帝聰明能斷,斷,丁亂翻。善用人,行法無所假貸。隆慮公主子昭平君隆慮公主,景帝女。班《志》,隆慮縣屬河內郡。慮,音閭。尚帝女夷安公主。班《志》,夷安縣屬膠西國。隆慮主病困,以金千斤、錢千萬爲昭平君豫贖死罪,上許之。爲,于僞翻;下同。

 

 융려공주가 죽자 소평군은 날로 교만해져서 술에 취하여 주부(主傅: 공주의 사부)를 죽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정위가 공주의 아들이라 하여 청하여 올렸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도 말하였다.

 "전에 또 대속금을 들여 놓았고, 폐하께서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황상이 말하였다.

 "내 동생은 늙어서 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죽으면서 나에게 부탁하였었다."

 隆慮主卒,昭平君日驕,醉殺主傅,服虔曰:主傅,主之官也。如淳曰:禮有傅姆。說者又曰:傅,老大夫也,漢使中行說傅翁主是也。師古曰:傅姆是。繫獄;廷尉以公主子上請。上,時掌翻。左右人人爲言:「前又入贖,陛下許之。」上曰:「吾弟老有是一子,死,以屬我。」弟,謂女弟。師古曰:老乃有子,言其晚孕育也。屬,音之欲翻。

 

 이에 황제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탄식하고서 말하였다.

 "법령이란 먼저 돌아가신 황제들께서 만드신 것인데, 동생인 연고로 먼저 돌아가신 황제의 법을 속인다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고묘에 들어갈 것인가! 또 아래로 만백성에게 잘못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 상주한 것이 옳다고 하고는, 슬픔을 스스로를 멈출 수 없으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슬퍼하였다. 대조인 동방삭이 황상 앞으로 나아가 축수하며 말하였다.

 於是爲之垂涕,歎息良久,曰:「法令者,先帝所造也,用弟故而誣先帝之法,吾何面目入高廟乎!又下負萬民。」乃可其奏,哀不能自止,左右盡悲。待詔東方朔前上壽,時有待詔公車者,有待詔金馬門者。朔時待詔宦者署。曰:

 

 "신이 듣건대, 성왕이 정치를 하면 상을 주면서 원수를 피하지 않고, 주살하면서 골육을 가리지 않았다 하였습니다.《상서》에서 '불편부당하니 왕도가 탕탕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는 오제가 중하게 생각하는 것이고, 삼왕도 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는데, 폐하께서 이를 실천하시니 천하의 사람들의 행복은 대단합니다. 신 동방삭이 술잔을 받들어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금 황상께서 만수하시기를 절하며 빕니다."

「臣聞聖王爲政,賞不避仇讎,誅不擇骨肉。《書》曰:『不偏不黨,王道蕩蕩。』師古曰:《周書‧洪範》之辭。蕩蕩,平坦貌。此二者,五帝所重,三王所難也,陛下行之,天下幸甚!臣朔奉觴昧死再拜上萬【章:十四行本「萬」下有「歲」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退齋校同。】壽!」

 

 황상은 애초에 동방삭에게 화를 냈으나, 이미 그리하고서 그를 훌륭하다하여 동방삭을 중랑으로 삼았다.

上初怒朔,旣而善之,以朔爲中郎。

 

 반고가 찬양하였다.

 "한은 수많은 왕들의 폐단을 이어받아서 고조가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올바르게 돌이켰으며, 문제와 경제는 백성을 기르는데 힘썼고, 고대의 예교를 상고하는 일에 있어서는 오히려 많이 빠져 있었다.

 班固贊曰:漢承百王之弊,高祖撥亂反正,文、景務在養民,至于稽古禮文之事,猶多闕焉。

 

 효무제가 처음 즉위하여서는 분명히 백가의 학설을 철폐하여 내쫓고 유가의 6경을 표창하여 드디어 누구라도 해내에서 꾀를 내고, 그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여 그들과 함께 공업을 세웠으니, 태학을 일으키고 교외에서의 제사법을 정비하며, 시와 음악을 짓고 봉선을 건립하여 많은 신령들을 예경하였고, 주의 후손을 잇게 하고 호령하는 문장은 분명하게 진술하여서 후사들이 너른 업적을 존중할 수 있게 하여서 삼대의 기풍을 갖고 있었다.

 孝武初立,卓然罷黜百家,表章《六經》,師古曰:百家,謂諸子雜說,違背《六經》。《六經》,謂《易》、《詩》、《書》、《春秋》、《禮》、《樂》也。遂疇咨海內,舉其俊茂,師古曰:疇,誰也。咨,謀也。言謀於衆人,誰可爲事者也。與之立功;興太學,修郊祀,改正朔,師古曰:正,音之成翻。定曆數,協音律,作詩樂,建封禪,禮百神,紹周後,號令文章,煥然可述,後嗣得遵洪業而有三代之風。

 

 만약에 무제의 영웅적 재능과 커다란 지략이 문제와 경제 같은 공손하고 절검하면서 이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을 고치지 아니하였더라면, 비록 《시경》과《서경》에 실려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무엇을 덧붙이겠는가?"

 如武帝之雄材大略,不改文、景之恭儉以濟斯民,雖《詩》、《書》所稱何有加焉!師古曰:美其雄材大略而非其不恭儉也。

 

 사마광이 말하였다.

 "효무제는 끝까지 사치하고 지극한 욕심을 가지고 번거로운 형벌을 사용하고, 세렴을 무겁게 거두어서 안으로는 궁실을 사치스럽게 꾸몄고, 밖으로는 사방의 이적들에게 일을 벌였으며, 신의 괴이함을 믿고 현혹되어 순유하는데 절도가 없었고, 백성들로 하여금 피폐하게 하여 일어나서 도적이 되게 하였으니, 그것은 진 시황과 다를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臣光曰:孝武窮奢極欲,繁刑重斂,斂,力贍翻。內侈宮室,外事四夷,信惑神怪,巡遊無度,使百姓疲敝,起爲盜賊,其所以異於秦始皇者無幾矣。幾,居豈翻。

 

 그러나 진이 이로써 망하고 한은 이로써 흥하였던 것은 효무제는 먼저 돌아가신 왕의 도를 존중하였고, 통제하고 지킬 바를 알았으며, 충직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이 속이고 감추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현명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죽이거나 상주는 것이 엄정하고 분명하였으며, 만년에는 허물을 고치고 후사를 돌아보고 부탁하는데 적당한 사람을 얻었으니, 이것이 그가 망한 진과 같은 실수를 갖고 있지만, 망한 진의 화를 면하였던 이유입니다."

 然秦以之亡,漢以之興者,孝武能尊先王之道,知所統守,受忠直之言,惡人欺蔽,好賢不倦,惡,烏路翻。好,呼到翻。誅賞嚴明,晚而改過,顧託得人,此其所以有亡秦之失而免亡秦之禍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