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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面楚歌! 그리고 이긴 자와 진 자

solpee 2019. 10. 13. 16:29

 

《漢紀3 高帝 5 (己亥, 前202

 

 

 1. 12월에 항왕이 해하(垓下; 안휘성 영벽현 동남에 있는 12m높이의 절벽)에 이르렀는데, 군사는 적고 식량도 다하였고, 한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고 성에 들어갔으며 한의 군사와 제후들의 병사가 이를 겹겹으로 포위하였다. 항왕이 밤에 한의 군대가 사방에서 모두 초의 노래(계명가인지 초나라 노래인지 확실치 않다.)를 부르는 것을 듣고 마침내 크게 놀라서 말하였다.

 1. 十二月,項王至垓下,李奇曰:沛洨縣聚邑名。洨,下交翻。張揖《三蒼注》:垓,堤名,在沛郡。《史記正義》曰:按垓下是高岡絕巖,今猶高三四丈;其聚邑及堤在垓之側,因取名焉,今在亳州眞源縣東十里。垓,音該。兵少,食盡,與漢戰不勝,入壁;漢軍及諸侯兵圍之數重。重,直龍翻。項王夜聞漢軍四面皆楚歌,應劭曰:楚歌者,《雞鳴歌》也。漢已略得楚地,故楚歌者多,雞鳴時歌也。師古曰:楚歌者,爲楚人之歌,猶吳歈、越吟耳。若以雞鳴爲歌曲之名,於理則可,不得云雞鳴時也。高祖令戚夫人楚舞,自爲作楚歌,豈有雞鳴時乎!乃大驚曰:

 

 "한의 군사가 초를 이미 다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인들이 저리 많단 말인가?"

 밤에 일어나서 장막 안에서 술을 마시고 슬피 노래하다가 비분강개하여서 눈물을 흘려 몇 줄 떨어지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고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漢皆已得楚乎,是何楚人之多也!」則夜起,飲帳中,悲歌忼慨,泣數行下,忼,苦廣翻。行,戶剛翻。泣,目中淚也。左右皆泣,莫能仰視。

 

 이에 항왕은 추라 이름 붙인 그의 준마에 오르니, 깃발 아래에 있던 장사로 말을 타고 좇는 사람이 800여 명이었는데 밤새도록 줄곧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려 달아났다. 날이 밝자 한의 군사들이 마침내 이 사실을 깨달으니 기장 관영에게 명하여 5천의 기병으로 그를 추격하게 하였다.

 於是項王乘其駿馬名騅,騅,朱惟翻。蒼白雜毛曰騅。孔穎達曰:雜毛,是體有二種之色相間雜。麾下壯士騎從者八百餘人,直夜,潰圍南出馳走。平明,漢軍乃覺之,令騎將灌嬰以五千騎追之。

 

 항왕이 회하를 건너니, 말을 타고 좇는 사람이 겨우 100여 명이었다. 음릉에 이르러서 길을 잃었는데, 어느 농부에게 물으니 농부가 속여서 말하였다.

 "왼쪽(左; [zuǒ])이오."

 왼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큰 늪 속에 빠지니 이러한 연고로 한이 그를 쫓아서 따라잡았다..............중략.................

 項王渡淮,騎能屬者才百餘人。屬,之欲翻。至陰陵,班《志》,陰陵縣屬九江郡。《括地志》:陰陵故城,在濠州定遠縣西北六十里。迷失道,問一田父,田父紿曰「左」。紿,蕩亥翻;欺誑也。左,乃陷大澤中,以故漢追及之。............중략.............

 

 이에 항왕은 동쪽으로 가서 오강을 건너려고 하였는데, 오강의 정장이 배를 대고 기다리다가 항왕에게 말하였다.

 "강동은 비록 작지만 땅이 사방으로 천 리이고, 무리도 수십만 명이니 또한 충분히 왕 노릇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급히 건너십시오. 지금은 다만 신이 배를 갖고 있으니, 한의 군사들이 도착하여도 건널 것이 없습니다."

 於是項王欲東渡烏江,臣瓚曰:烏江在牛渚。《索隱》曰:按晉初屬臨淮。《括地志》:烏江亭,卽和州烏江縣是也;晉初爲縣。《水經》曰:江水又北得黃律口,《漢書》所謂烏江亭長檥船待項王,卽此地。余據烏江浦在今和州烏江縣東五十里,卽亭長檥船待羽處。烏江亭長檥船待,徐廣曰:檥,音儀,一音俄。應劭曰:檥,正也。孟康曰:檥,音蟻,附也,附船著岸也。如淳曰:南方謂整船向岸曰檥。《索隱》曰:檥字,諸家各以意解耳。鄒誕本作「樣船」,以尚翻;劉氏亦有此音。謂項王曰:「江東雖小,地方千里,衆數十萬人,亦足王也。願大王急渡;今獨臣有船,漢軍至,無以渡。」

 

 항왕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는데, 내가 왜 건너겠는가? 또한 나 항적은 강동의 자제 8천 명과 더불어 강을 건너서 서쪽으로 갔다가 이제 하나도 돌아온 사람이 없는데,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가련하게 생각하여 나를 왕으로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사 저들이 말을 안한다고 하여도 나 항적만은 마음속으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項王笑曰:「天之亡我,我何渡爲!且籍與江東子弟八千人渡江而西,今無一人還;縱江東父兄憐而王我,我何面目見之!縱彼不言,籍獨不愧於心乎!」

 

 그는 마침내 타고 있던 추마를 정장에게 하사하고 기병들로 하여금 모두 내려서 보행하여 짧은 무기를 들고 접전하게 하였다. 다만 항적이 죽인 한의 군사는 수백 명이었고 몸에도 십여 군데 상처를 입었다. 고개를 돌려서 한의 기사마인 여마동을 보고 말하였다.

 乃以所乘騅馬賜亭長,令騎皆下馬步行,持短兵接戰。獨籍所殺漢軍數百人,身亦被十餘創。被,皮義翻。創,初良翻。顧見漢騎司馬呂馬童,曰:

 

 "너는 옛날 나의 사람이 어니더냐?"

 여마동이 그를 대면하고 중랑기 왕예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항왕이다."

 항왕이 마침내 말하였다.

 "내가 듣건데, 한은 나의 머리를 천금과 읍 만호에 산다고 하니 내가 너를 위하여 덕을 베풀 것이다."

「若非吾故人乎?」馬童面之,張晏曰:以故人難親斫之,故背之也。如淳曰:面,謂不正視也。師古曰:如說非。面,謂背之,不正向也,面縛,亦反偝而縛之;杜元凱以爲但見其面,非也。貢父曰:面之,直向之耳。指示中郎騎王翳曰:「此項王也。」項王乃曰:「吾聞漢購我頭千金,邑萬戶;《史記正義》曰:漢以一斤金爲千金,當一萬錢也。余謂一斤金與萬戶邑,多少不稱,《正義》之說,未可爲據也。吾爲若德。」班《書》,「德」作「得」;鄧展曰:令公得我以爲功也。《史記》作「德」;徐廣曰:亦可是功德之德。《史記正義》曰:爲,于僞翻。言呂馬童與己是故人,舊有恩德於己。余謂羽蓋謂我爲汝自刎以德汝。

 

 마침내 스스로 목 동맥을 끊었다. 왕예가 그의 머리를 잘라 가지니, 다른 기병들도 서로 밟으며 항왕을 가지고 다투는데,  서로 죽인 자가 수십 명이었고, 맨 마지막으로 양희·여마동·낭중 여승·양무가 각기 그 몸의 한 쪽씩을 가졌으며, 5인이 함께 그 몸을 모두 모아보니 모두 옳았으니, 그러므로 그 호수를 나누고, 5인을 책봉하여 모두 열후로 삼았다.

 乃自【章:甲十五行本無「自」字;乙十一行本同;孔本同。】刎而死。刎,武粉翻。王翳取其頭;餘騎相蹂踐蹂,人九翻。爭項王,相殺者數十人;最其後,楊喜、呂馬童及郎中呂勝、楊武各得其一體;五人共會其體,皆是,故分其戶,封五人皆爲列侯。呂馬童封中水侯,王翳封杜衍侯,楊喜封赤泉侯,楊武封吳防侯,呂勝封涅陽侯。

 

 초 지역은 모두 평정되었는데, 다만 노만 떨어지지 아니하자, 한왕이 천하의 병사를 이끌고 이를 도륙하려고 하였다. 그 성 아래에 도착하였는데, 오히려 비파와 책 외우는 소리가  들렸고, 그곳은 예의를 지키는 나라여서 주군을 위하여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려는 것이니 마침내 항왕의 머리를 가져다가 노의 부형들에게 보이니 노가 마침내 항복하였다.

 楚地悉定,獨魯不下;秦,魯縣屬薛郡,項羽初封於此,漢爲魯國。漢王引天下兵欲屠之。至其城下,猶聞絃誦之聲;爲其守禮義之國,爲主死節,乃持項王頭以示魯父兄,魯乃降。

 

 한왕이 노공에게 항왕을 곡성에 후히 장사지내게 하고, 몸소 애도하고 그에게 곡하고 돌아갔다. 여러 항씨의 지속들은 모두 죽이지 않았다. 그리고 항백 등 네 사람을 책봉하여 열후로 삼고 유씨 성을 내려 주었으며, 여러 백성들로 항우에게 잡혀서 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漢王以魯公禮葬項王於穀城,宋白曰:宋州穀熟縣,古穀城也,漢於此置薄縣,又改爲穀陽縣。親爲發哀,哭之而去。爲,于僞翻。諸項氏枝屬皆不誅。封項伯等四人皆爲列侯,賜姓劉氏;諸民略在楚者皆歸之。

 

 태사공이 말하였다.

 "항우가 농무(農畮;밭 두덩)에서 일어나 3년 만에 드디어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진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나누어 찢어서 왕후로 책봉하였으니, 정치는 항우로부터 나왔는데, 지위는 비록 끝을 못 맺었지만 근고 이래로 아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太史公曰:羽起隴畮之中,畮,古畝字。三年,遂將五諸侯滅秦,此時山東六國,而齊、趙、韓、魏、齊並起,從羽伐秦,故云五諸侯。分裂天下而封王侯,政由羽出;位雖不終,近古以來未嘗有也!

 

 항우가 관중을 등지고, 초를 가슴에 품고서 의제를 쫓아내고 자립하였으니, 왕후들이 자기를 배반한 것을 원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스스로 정벌한 공로를 자랑하고 그 사사로운 지혜를 떨치며, 옛 것을 스승으로 삼지 않고 패왕의 대업이라 말하면서 힘으로 천하를 경영하고자 하였다.

 及羽背關懷楚,師古曰:背關,謂背約不王沛公於關中;懷楚,謂思東歸彭城也。余謂背關懷楚,文意一貫,言羽棄背關中之形勝而懷鄕歸楚也,不必分爲兩節。背,蒲妹翻。放逐義帝而自立;怨王侯叛己,難矣!自矜功伐,奮其私智而不師古,謂霸王之業,欲以力征經營天下。

 

 5년이 되어 끝내 그 나라를 망치고 자신은 동성에서 죽엇지만 오히려 깨닫지를 못하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돌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하늘이 나를 망쳤지 용병을 한 죄가 아니다.'라는 말을 인용하였으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五年,卒亡其國,卒,子恤翻。身死東城;尚不覺悟而不自責,乃引「天亡我,非用兵之罪也。」豈不謬哉!

 

 양자가 《법언》에서 평론하였다.

 "여러 사람이 물었다. '초가 해하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하늘아![tiān yĕ!]」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말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 정책은 여러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 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를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인데,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

 揚子《法言》:或問:「楚敗垓下,方死,曰『天也[tiān yĕ!]!』諒乎?」曰:「漢屈羣策,羣策屈羣力;諒,信也。屈,盡也。楚憞羣策而自屈其力。憞,徒對翻,惡也。屈人者克,自屈者負;天曷故焉!」溫公曰:何預天事。